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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들의 친구 음악가 에흐네 꺄바네흐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82화

by 오래된 타자기



17장-6
(1882)



꺄바네흐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병에 걸려 병상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런 그를 인상파 화가들인 친구들이 요양소로 옮겼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관계로 요양소에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재빨리 동지들이 모여 병석에 있는 그를 돕고자 자선바자회를 열었다.


꺄바네흐는 더할 나위 없이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여느 사람과는 달리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온유한 성격에다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용모에 독특하게도 작곡가이면서 연주가인 아주 훌륭한 재능을 지닌 음악가였다.


말할 것도 없이 너무도 가난했던 탓에 초라한 행색을 하고 다녔을 뿐이지만, 모든 화가가 한 번쯤 그를 화폭에 담고 싶어했을 정도로 그가 작곡한 음악을 듣기만 하면 금방 그의 음악에 빨려 들어가곤 했다.


1880, Portrait de Ernest Cabaner.jpg 마네가 그린 에흐네 꺄바네흐(Ernest Cabaner)의 초상, 1880.


꺄바네흐는 인상파 화가들에게 있어서 디드로가 쓴 소설 『라모의 조카(Neveu de Rameau)』에 등장하는 현대판 인물이었다. 말 그대로 자유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또한 그들의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동지이기도 했다.


29-2 Le Neveu de Rameau, Denis Diderot.jpg
29-1 Le Neuveu de Rameau.jpg
드니 디드로가 쓴 「라모의 조카(Le Neveu de Rameau)」 연극 공연 포스터 및 오트 마흔느(Haute-Marne) 광역단체가 설치한 조각상.


꺄바네흐는 생계수단으로 일주일에 두서너 차례 저녁마다 대로변에 위치한 공연장이 딸린 카페들을 찾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모든 악기들을 다루면서 연주했다. 덕분에 화가 친구들은 최신 유행의 카페에서 그들의 동지가 연주하는 곡에 빠져들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있었다.


꺄바네흐가 연주한 곡은 그가 직접 작곡한 곡이었을까? 당연하다. 거기다가 매번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작곡에 연주에 그는 그야말로 재능이 흘러넘쳤다. 만일 인상주의 작곡가라 제청할 필요가 있다면, 그가 바로 이에 해당했다. 수잔 역시 그와 함께 연주하는 걸 즐겼다. 하지만 수잔이야말로 꺄바네흐가 작곡한 곡들의 악보를 유일하게 보관하고 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리슈팽이 작사한 가사들을 갖고 꺄바네흐가 작곡한 건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마네는 가끔씩 악보가 출간될 때마다 표지에 삽화를 그려 넣었다. 오늘날 전해오는 것 역시 그 가운데 하나다. 꺄바네흐는 보들레르의 시뿐만 아니라 비용, 크로의 시를 아주 멋지게 작곡한 음악가이기도 했다.


크로의 「훈제 청어」가 꺄바네흐의 음악 덕분에 큰 성공을 거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작품이 절대로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어떡해서든 비참한 삶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건만, 꺄바네흐의 모진 삶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Affichette de Franc-Lamy pour Le Hareng saur de Charles Cros, dit par Coquelin Cadet sur une musique de Cabaner (vers 1875-1880)..jpg 샤를 크로가 작시한 「훈제 청어(Le Hareng saur)」를 에흐네 꺄바네흐가 작곡한 내용을 담은 전단지(Affichette), 1875-1880년경.


마네에게 있어서 꺄바네흐는 그야말로 모델 중의 모델이었다. 「늙은 연주가」, 「걸인」, 「철학자」 등 마네의 수많은 걸작들 속에 등장하는 모델이 바로 그였다. 꺄바네흐야말로 화가들에게는 재능 많은 인물로서 아주 매력적인 모델로 딱이었다.


특히나 옛 바티뇰 군단에 속한 가장 오래된 멤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인물이었다. 보헤미안 기질을 똑같이 타고난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 이웃해 살기에 그만한 인물도 없었다.


30-2 Le Mendiant, 1881.jpg
30-3 Le Philosophe, 1867.jpg
30-1 Le Vieux Musicien (Copie), 1862.jpg
에흔느 꺄바네흐를 모델로 했거나 그만의 독특하고도 기이한 삶에 영감을 받아 마네가 완성한 그림들인 「걸인」(1881), 「철학자」 (1867), 「늙은 연주가」(1862).


베를렌느는 마네가 그린 그림에서 꺄바네흐를 알아보고는 그가 마치 “「압생트 주를 마시는 사내」를 그린 지 3년 후에 완성한 「천사들에 둘러싸여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닮았다는 이야기마저 털어놨다. 꺄바네흐는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켜 “나폴레옹처럼 짐승 같은 작자”라는 말도 서슴없이 지껄이기까지 했다. 쌍스럽기는 했으나, 그렇다 해서 정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꺄바네흐는 변함없이 로슈푸코 거리에 면한 커다란 방 한 칸짜리 스튜디오에서 기거했다. 벽에는 친구인 세잔이 그린 「멱감는 이들」이 걸려있어 음악가를 항상 지켜주었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곤궁한 이들에게 기꺼이 숙소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그는 또한 볼품없는 선량한 이들의 클럽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중, 어느 날 그를 보러 와서 집에 눌러있던 중에 다시 집을 나갔다 들어온 어린 랭보가 그와 함께 기숙하는 동안 그를 깜짝 놀라게 해 준 건 물론, 그의 집을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 걸 지켜보기도 했다.


쥐티끄의 바맨으로 일하는 동안에 그가 작곡한 몇 개의 소네트들은 마네에게 헌정한 작품이었다. 그 가운데 한 작품이 랭보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랭보는 기발하게도 시인 자신이 발명한 모음들에 색조를 결합하여 시를 창작한 것이지만, 꺄바네흐는 거기에다가 곡조를 더하여 소네트로 만들기까지 했다.



라(OU) 자줏빛,
시(EU) 오렌지빛,
도(O) 노랑,
레(A) 녹색,
미(E) 파랑,
파(I) 보랏빛,
솔(U) 진홍빛



소네트는 화가들을 위한 것이었다.


모두가 꺄바네흐를 혼자 고독한 가운데 죽어가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요양원에 밀린 돈을 지불하기 위해 모두가 작은 정성이나마 십시일반 도움을 주었다. 깜짝 놀랄 일은 마네가 다락방에 처박아뒀던 예전에 그린 그림 한 점을 바자회에 내놓았다는 점이다. 한 번도 만인에게 공개한 적이 없는 「자살한 사내」란 그림이었다. 꺄바네흐로 말미암아 마네가 느낄 수밖에 없던 착잡한 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이 그림의 내용은 아니었을까?


1877-1881, Le Suicidé.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자살한 사내(Le Suicidé)」, 1877-1881.


그림이 팔린 건 1881년 5월 14일이었다. 꺄바네흐가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친구인 마네 덕분이었다. 덕분에 꺄바네흐는 8월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마네가 바자회에 내놓은 「자살한 사내」란 그림은 마네-모리소 양쪽 집안사람들 모두를 긴장시켰다. 그림 탓에 가족들 모두가 수잔더러 마네의 정신상태가 어떤지를 물어보게 만들었다. 수잔은 두 눈으로 베르트를 이리저리 훑어보면서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마네가 매독에 걸렸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너무도 통쾌했다. 집안사람들은 마네의 병을 가리켜 늘 유전적 류머티즘이 발병한 것이라고 이야기해 버릇해 왔기 때문이다.


마네는 그처럼 병들고 기진맥진한 채, 모든 걸 낙담하기까지 한 상태인 데다 그마저도 앞으로 병이 나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한쪽 발이 아프다가 통증이 멎으면 다른 쪽 발이 아파오고 이쪽 다리에서 시작된 통증이 저쪽 다리로 옮겨가고. 시르데 의사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분별력 없이 정체마저 알 길이 없는 엉터리 약을 처방하면서 치료조차도 일관성 없이 이랬다 저랬다 했다.


더군다나 호밀을 발효시켜 만든 위험천만한 돌팔이 약까지 과도하게 남용한 탓에 마네는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졌을 뿐 아니라 통증을 이기지 못한 채 광분하기까지 했다. 마네는 병이 나아지리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통증이 심해질 때마다 다른 치료법 없이 오직 물 치료만 계속 받았던 탓에 설상가상으로 병은 더욱 악화되어 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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