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85화
17장-9
(1882)
여름이 시작되자 마네는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독특한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이사벨 르모니에에 홀딱 빠진 탓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담은 데생은 물론 수채화를 연거푸 그리는 중에 그녀더러 아틀리에를 한 번 찾아달라는 간절한 내용을 담은 그림편지들까지 보내면서 이사벨 르모니에에게 몹시도 귀찮게 굴었다.
이사벨 르모니에는 묵묵부답이었다. 마네의 진의를 의심한 게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레옹보다 훨씬 어렸다! 레옹은 여전히 마네 곁을 지키고 있었다. 레옹은 왼 종일 아틀리에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도왔을 뿐 아니라 대부의 병간호까지 도맡아 했다.
마네의 건강이 불안하여 안절부절못하던 수잔은 마네에 의해 아틀리에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레옹을 통해 마네를 원격조정하고 나섰다. 레옹은 모친의 지시에 따라 언제든지 행동에 나설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였다.
당시 가장 절친했던 여자 친구는 메리 로랑이었다. 그녀야말로 마네의 모든 사정에 다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마네는 더 이상 혼자 있을 수 없었기에 그녀의 따뜻한 보살핌이 절실히 필요한 처지였다.
메리 로랑은 매일 아틀리에를 찾았다. 간혹 가다가 두 번씩 아틀리에에 들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아틀리에에 올 수 없을 때에는 그녀의 가정부였던 엘리자를 보내곤 했다.
엘리자 역시 마네라는 신사 분하고 아주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 엘리자는 마네의 모친이나 수잔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마네를 애지중지 보살폈다. 모친이나 아내는 이제 더 이상 마네에게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항상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던 프루스트가 이제까지와는 달리 조형예술부 장관으로서 마네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고자 시도했다. 그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았던 탓에 훈장을 수여하고 말고는 국가수반이 결정할 사항이라는 것이 당시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대통령인 쥘 그레비가 직접 나서서 마네의 이름을 공언하면서까지 훈장 수여를 결정하는 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태로 비화되었다. 그러자 이는 국가원수로서 주어진 권한 이상의 월권행위라고 감베타가 목소리 높여 주장했다.
“대통령 각하! 각 부서의 장관들이야말로 레지옹 도뇌르 십자 훈장을 수여할 권한이 있다는 건 당연한 사실입니다.”
대통령은 결국 문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감베타는 1881년 12월 30일 마네에게 드디어 레지옹 도뇌르 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늘 견유주의자답게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던 마네는 에흔느 셰노에게 자신의 심정을 피력했다. 기자 출신인 에흔느 셰노는 권력의 숲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만을 숨어서 지켜보던 참이었다. 그 역시 마치 무슨 대단한 사건인양 마네의 수상메달을 환영하고 나섰다.
“너무 늦었소. 만일 당신들이 내게 수상메달을 수여하려 했다면, 20년 전에 했어야 마땅한 일이로소이다. 지금에 와서 내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20년 동안 나를 도외시하던 당신들의 잘못을 다 만회하려 든다면 그거야말로 어불성설이로소이다.”
자칫 잘못했다간 큰 일 날 사건이었다. 프루스트는 이 일로 말미암아 며칠 있다가 조형예술부 장관 직에서 물러났다. 1882년 1월 26일 공식적으로 장관 직을 때려치울 수밖에 없게 된 탓이었다. 감베타 내각에서 장관으로 발탁된 지 77일째 되는 시점이었다! 감베타조차 프루스트를 어떻게 도와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목에 걸었다.
“고마워! 친구! 자네가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해줘서 고맙네. 항상 입에 발린 소리만 하더니 마침내 날 도와줬네 그려. 하긴 떠벌리는 것이 자네 천성이었긴 하네만.”
“당연한 일이었네.” 몹시 뿌듯한 듯 프루스트가 맞받아쳤다.
“아! 시기가 적절했다는 말이지? 수상메달을 수여할 아주 적절한 시기였다는 말 아닌가? 우리가 죽은 다음에나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오라 내가 그걸 벌써 짐작하고 있었기는 하지만, 자네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네 그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자꾸 떠오르게 만드는 훈장이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모든 게 잘 되어갈 것인가? 이 3센티미터도 안 되는 레지옹 도뇌르 붉은 훈장이 영원불사의 힘이라도 지녔단 말인가?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누구보다도 아버지에게 훈장을 목에 걸어주고 싶었다. 어머니 역시 목에 훈장을 걸어주고 싶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훈장은 서랍 속에 처박혀있을 뿐이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모든 게 너무 늦어버렸다. 더 이상 기뻐서 즐거워할 처지도 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그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간 낙선의 설움을 딛고 수상메달을 거머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참고 기다려준 가족 모두를 위한 것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더군다나 어느 정도 보상받았다는 점도 작용했다.
레지옹 도뇌르 기사장이란 과연 어떤 훈장인가? 5등 훈장으로서 아무 쓸데없는 것에 불과했다.
시나브로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1] 메리 로랑(Méry Laurent)은 그녀 스스로 마네의 아틀리에를 들를 수 없을 적에는 그녀가 직접 고른 과일들과 꽃다발을 가정부에게 들려 보내곤 했다. 메리 로랑의 가정부인 엘리자(Éliza)가 자주 아틀리에에 들르면서 마네는 가정부의 모습까지 화폭에 담았다. 이후로 두 사람은 특별한 관계에 빠져들었다. 그림 속 검은색 옷을 입은 왼쪽 여인은 당시 마네가 제일 친하게 지냈던 여친인 메리 로랑이고 하늘색 리본을 단 오른쪽 여인은 메리 로랑의 가정부 엘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