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상투적일지라도
바야흐로 히어로 무비 전성시대다. 특히, 마블 스튜디오의. 2008년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아이언맨 1>을 내놓았던 마블 스튜디오가, 이제는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따로 구축할 정도로 성장했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앤트맨>,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토르>를 통해 차곡차곡 마블 시네마 유니버스(MCU)의 단초를 쌓아갔다. 그리고 <어벤저스>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세계가 한 고리를 이루어야 하는 이 시점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필연적으로 등장해야 하는 히어로였을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멀티버스를 오가며 보이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영웅이다. 그리고 '마법'을 사용한다. 마법은 여태껏 MCU 내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개념이다. 어마어마한 자본과 기술로 제작한 모빌슈츠를 입고 싸우는 아이언맨과 앤트맨, 생체실험의 결과물인 캡틴 아메리카와 헐크, 인피니티 스톤으로부터 힘을 받아 신묘한 힘을 사용하는 스타로드와 스칼렛 위치, 그리고 비전. 토르와 로키는 태생이 신 혹은 이종족이고, 단독 영화 내에서도 그들이 마법을 사용한다는 묘사는 없다.
앞서 언급된 히어로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현대 사회에서 수긍할 만한 '기술'이 그들을 히어로로 만들어 줬다는 것이다. 그런 기술이 현재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들, 토니 스타크나 스티브 로저스 같은 '평범한 인간'들이 히어로가 된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끔 만든다. 일종의 개연성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그런데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런 현실과의 고리가 없다. 탁월한 실력 덕분에 아주 잘 나가던 외과 의사였고, 아주 똑똑하다는 것 밖에는. 사고로 인해 폐인이 되었는데, 우연히 '영험한 분'을 만나 내면의 신비한 힘을 깨닫게 된다니. 치밀하게 짜여진 설정과 개연성에 익숙해진 현대 관객들에게는 허술하게 다가올 전개다. 게다가 MCU에서 '마법'이라는 개념이 다뤄진 적이 없기에, 더욱이 닥터 스트레인지는 묘사하기 까다로운 히어로였다. 그러나 마블 스튜디오는 이번 영화를 통해, 또 한 명의 입체적 히어로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애초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합리적 사고에 익숙해진 현대 관객들을 논리로 포섭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오컬트와 마법, 그리고 유물 무기를 지금 세상 어떤 관객이 믿겠는가. 그래서 마블 스튜디오는 어설프게 과학적 논리를 삽입하는 것을 그만뒀다. 이로 인해 '비싼 특촬물'이라는 비판을 들을 가능성이 농후해지긴 했지만.
스티븐 스트레인지가 닥터 스트레인지로 변해가는 과정은 관객의 인식 변화 흐름을 닮았다. 영화 초반, 스크린 속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관객을 대신해 에인션트 원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현대 과학 기술로 증명되지 않은 차크라, 에너지 따위의 개념은 믿지 않는다고. 스트레인지의 이런 보수적인 입장은, 어쩌면 관객들이 매번 마블 히어로들에게 던진 질문들과 일맥상통한다. 네가 어떤 능력이 있기에 히어로가 된 거냐는, 그런 질문.
사실 이 장면 속에 명쾌한 해답은 없다. 에인션트 원이 스티븐 스트레인지에게 유체 이탈과 멀티버스를 경험시켜주고, 마치 마약의 환각 현상과도 같은 몇 분 짜리 영상이 지나간 후에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무릎을 꿇는다. 스티븐 스트레인지로 분한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복잡다단한 표정연기가 간극을 메워주기는 하나, 그의 힘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는 않는다. 그냥 특별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 밖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카마르 타지에서 빠른 속도로 마법을 학습하며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치열한 전투에 임하고, 미스틱 아츠(Mystic Arts)를 기반에 둔 환경을 스크린을 통해 보여준다. 모든 게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있을 법 한' 현실성이 특징이었던 기존 MCU 작품들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원작의 베이스가 된 동양 철학만큼이나 모호하고 상대적이며, 뚜렷한 공식이 없다. 하지만 이런 모호함, 그리고 관객의 끝없는 의심이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히어로를 탄생시킨다.
러닝타임 말미에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종종 과학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나듯, 카마르 타지도 실제 존재할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이름만큼이나 '이상하'며,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영웅. 오히려 의도한 듯한 이질감 덕분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더욱 현실적인 캐릭터로 다가오는 셈이다.
마블 스튜디오는 캐릭터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 장기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된다. 영화 속 닥터 스트레인지는 속물이자 순수한 의사이며, 때로는 나약한 인간이기도 하지만, 종단에 이르러 모든 두려움을 짊어지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인션트 원의 사망 전 마지막 문답 장면은, 급작스런 닥터 스트레인지의 변화에 당위성을 부여해준다. 이 문답에서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사람을 살리고 싶어 의사가 됐지만, 실패가 두려워 속물이 되어버린 사람으로 비추어진다. 원래는 참 선한 사람임에도, 현대 기술의 한계 때문에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 인간. 그랬던 자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힘을 얻었다면, 어긋난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닥터 스트레인지는 힘을 얻고 타락해 버린 케실리우스와 다를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을 살리고 싶다. 그리고, 지구-616을 지키고 싶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열망은, 반복된 시간 속에서 끝없이 사지가 찢기고 레이저로 몸이 관통되는 고통을 참아내게 했다. 심지어 도르마무와 거래하는 순간엔, 해탈 혹은 초월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이런 '타고난 선함'은 MCU 내에서 잘 볼 수 없는 성질이다. MCU 세계관 히어로들은 저마다 가진 '인간적인' 이유로 세상을 지키며, 그 점이 매력 포인트로 작용한다. 성질 자체가 선한 히어로로는 이미 캡틴 아메리카가 존재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는 여기에 지식에 대한 갈망과 삐딱한 성격이 섞였다. 이런 특징은 많은 MCU 히어로 사이에서 닥터 스트레인지가 독보적인 캐릭터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스토리라인이 몹시 상투적이라는 것이다. 모종의 계기로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고, 스승의 죽음을 겪은 후 각성해 세상을 구한다는 흔한 영웅 서사 플롯. 물론, 대부분 히어로 영화가 이 플롯을 따르긴 한다. 하지만 현재의 마블 스튜디오라면 좀 더 신선한 전개도 가능하지 않았겠냐는 아쉬움이 투영된 비판이다.
그러나 앞서 거론했듯, 닥터 스트레인지는 원작 설정 자체가 지금의 히어로 영화 트렌드와는 동떨어진 캐릭터였다. 이전 영화들에서 학습된 적 없는 스타일의 인물이고, MCU 내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마법의 개념까지 끌고 온다. 이 상태에서 복잡한 스토리까지 들어갔다면 난해한 오컬트 특촬물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담백한 전개 덕분에 캐릭터가 더 돋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내내 빗발치는 새로운 정보 때문에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틸다 스윈튼의 감정 연기를 지나치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슬픈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