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년째, 교습학원의 오후를 살다 보니 지원은 또 다른 오후를 꿈꾸게 되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
어릴 적부터 마음에 두었던 그 이름을 따 지원의 아이디는 ‘산토리니의 오후’로 정했다.
블로그를 만든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산토리니의 풍경을 배경으로, 사소한 일상을 적어갔다.
‘열공 스카이엠 영재 캠퍼스’ 간판에 불이 켜졌다.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문을 여는 교습학원의 하루는 오후부터 시작된다. 수학과 영어를 신청하면 무료로 수강하는 논술 과목 강사, 안지원의 출근은 오후 1시였다.
“내가 이 나라의 영재들을 기른다는 책임감으로! 교육자 여러분, 오늘도 열정적으로 지도합시다!”
수업 전 회의 시간, 원장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하긴, 나라도 동네에서 제일 큰 학원 원장에 4층짜리 건물주라면 책임감이 강물처럼 넘쳐흐르겠네…”
뒤에서 수학 강사가 중얼거렸다. 과학이 맞장구를 치듯 부러운 한숨을 쉬었다.
지원은 맨 뒤에 앉아 있었다. 원장이 말한 ‘교육자들’에 자신은 속하지 않았다.
수학, 영어, 국어, 과학 강사들은 정규직이었다. 그들은 유명 대학을 나왔고, 교원자격증을 가졌다. 여기서 계약직은 지원뿐이다. 같은 출입 카드를 목에 걸고 있지만 수당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다.
지원은 제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회의실을 정돈하고, 음료를 준비하고, 프린트물을 나눠 주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눈치껏 움직이는 건, 제일 나이 어린 강사라서가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재계약은 불투명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학, 그것도 문과 출신, 흔한 컴퓨터 자격증 하나 없는 지원에게 일자리는 요원했다. 꼽사리 논술 강사라도 감지덕지였다. 대형학원 강사라는 허울 덕에 서울에서 버틸 수 있었다. 더 높이 올라가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리를 지키고 싶을 뿐인데 이렇게나 애를 써야 할까. 지원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원장의 말이 길어지자, 모니터가 보호 화면으로 넘어갔다. 우주와 하늘과 시골 풍경이 원장의 PPT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지원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또 한 번 화면이 바뀌는 순간,
지원의 시야가 확 밝아졌다. 모니터에 펼쳐진 푸른 바다는, 마치 산토리니 같았다.
*
어릴 적, 가게 벽에는 은행에서 얻어온 달력이 걸려 있었다.
문을 열기 전 두부전골집 남매들은 가게 안에서 숙제도 하고 티브이도 보며 놀았다. 언니와 남동생이 요란하게 떠드는 동안, 지원은 달력의 어느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눈부시게 파란 바다와 하늘에서 기분 좋은 바람이 느껴지는, 낯선 곳이었다.
“오빠야.”
“왜?”
“여기 사진 밑에, 뭐라고 쓴 거야?”
지원은 용기를 내 오빠에게 물었다. 이 집에서 영어를 술술 읽는 사람은 오빠 하나였다. 평소 데면데면한 동생이 먼저 다가오니, 오빠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굳이 지원의 손을 끌어다 하나하나 짚으며 가르쳐 주었다.
산-토-리-니.
“산토리니가 어디 있는데?”
오빠가 모르는 게 있을 리 없다. 지원의 굳은 신뢰 앞에, 어린 오빠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 우리 마을 옆에 산포리 있잖아. 알지?”
“응, 시장 열렸을 때 엄마랑 가 봤지.”
“그 산포리 옆이 산토리일 거야. 피읖 다음은 티읕이라고, 너도 유치원에서 배웠지?”
지원은 오빠의 유식함에 큰 감동을 받았다. 초등학교 4학년이란 정말 대단한 존재다. 한낱 새싹반인 자신과 비교할 수가 없다.
산포리는 지원이 사는 동네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 옆 산토리에 가면 첫눈처럼 하얀 벽과 장난감마냥 둥그런 지붕을 얹은 건물이 있고, 황금빛 모래사장과 찰랑이는 바다가 있다.
일곱 살 지원은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산토리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해야 할 일은, 버스비를 모으는 것이었다.
지원의 모험은 의외로 빨리 끝났다. 혼자 버스를 탄 어린애를 수상쩍게 여긴 운전기사가 마을 어른들에게 귀띔을 했다. 제보를 받은 아버지가 산포리로 달려왔을 때, 지원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시장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이놈 자식이 겁도 없이! 혼자 옆 동네까지 싸돌아다녀? 집 잃어버리려고 그래, 엉!”
아버지의 호령에 지원은 꺽꺽대며 울었다.
“그게 아니고… 산토리… 바다 없어. 흐어엉….”
“뭐라고? 산토끼를 받으러 와? 그게 말이 돼?”
결국 아버지는 대화를 포기했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혼날 줄 알라는 협박과 함께 아이를 오토바이 뒤에 앉혔다. 덜컹거리는 고물 오토바이 소음에 맞추어 지원은 울고 또 울었다.
산토리니를 못 본 게 슬퍼서,
화가 잔뜩 났을 엄마가 무서워서,
아빠가 자기를 데리러 왔다는 게 기뻐서 울었다.
아빠, 나를 어떻게 찾았어?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혹시 나를 걱정했어?
저만치 집이 보일 즈음, 지원은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
“이것으로 주간회의를 마치겠습니다. 모두 파이팅!”
모니터 화면이 꺼졌다. 모두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원도 서둘러 주변을 정리했다. 구겨진 종이컵을 모으고 바닥에 떨어진 복사용지를 주웠다.
회의실을 나와서 안내 데스크에 앉았다. 꼽사리 논술 강사는 교실이 따로 없었다. 수학과 영어가 끝난 다음에야 교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자연스레 지원의 자리는 안내 데스크가 되었다.
몇 통의 상담 전화를 받고 나니, 어느덧 오후 세시였다.
벌써 2년째, 교습학원의 오후를 살다 보니 지원은 또 다른 오후를 꿈꾸게 되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 어릴 적부터 마음에 두었던 그 이름을 따 지원의 아이디는 ‘산토리니의 오후’로 정했다. 학생들 출석을 체크하는 학원관리 프로그램을 띄워놓고, 지원은 슬쩍 자신의 블로그를 열었다. 블로그를 만든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산토리니의 풍경을 배경으로, 사소한 일상을 적어갔다. 의미 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기록해 두고자 충동적으로 만든 블로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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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댓글 수는 0... 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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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아마 광고나 음란성 댓글일 거야. 지원은 별 기대 없이 클릭했다.
잘 읽었어요. 정말 글 잘 쓰시는 것 같아요.
짧지 않은 글인데 공감이 가서 한 번에 끝까지 읽었습니다.
아마 저도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서 더 그랬나 봐요.
자신에게 ‘뿌려도 그만, 안 뿌려도 그만인 후추’라고 하셨는데, 그 부분을 읽으면서 예전 저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세상에 의미 없는 삶이란 없어요. 태어났다면 그걸로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얼마 전에 읽었던 ‘가루 전쟁’이라는 책에 후추는 금과 은으로도 살 수 없는 향신료의 왕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단무지 없으면 느끼해서 짜장면을 못 먹는 사람도 있어요, 저처럼요!
오후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앞으로 자주 올 것 같아요.
오후님은 싫다고 하시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백탕도 꼭 먹어보고 싶네요.
♠남은 날도 좋은 날 되세요, 오후님.
작성자: 스페이드
지원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댓글을 읽었다. 기쁘면서도 수치스러웠다. 혼자 쓰는 일기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보고 있다. 공개적으로 쓴 글은 맞지만,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당장 블로그를 폐쇄하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면서도 결국 기분이 들떴다. 단 하나의 소중한 댓글이 지워질까 봐 잠금 처리를 했다.
‘정말 글 잘 쓰시는 것 같아요.’
‘앞으로 자주 올 것 같아요.’
‘세상에 의미 없는 삶이란 없어요. 태어났다면 그걸로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한 예쁜 말들.
지원은 손가락으로 댓글을 쓰다듬었다.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안 선생! 잠깐 나 좀 봐.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
원장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지원은 서둘러 블로그를 닫았다.
원장이 부르면 심장이 쿵쾅거린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 잘린 건가’ 생각이 든다. 지원은 가방을 뒤져 빨간 라이터를 꺼냈다. ‘참맛나는 두부전골’이라고 쓰여 있다. 학원에 라이터를 들고 다니기 그래서, 케이스를 씌웠다. 이 라이터가 있으면 안심이 된다. 지원은 라이터를 손에 꼭 쥐고, 원장실로 향했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