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은 학원 앞 무인 문구점과 간식창고를 지나 먹자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치킨, 족발, 호프집이 죽 늘어서 냄새를 풍겼다.
그 곁을 빠르게 지나가던 지원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얼핏 아는 얼굴을 본 것 같았다.
▶리치
- 안지! 괜찮아?
- 누가 건드리면 바로 들이받아.
- 참지 마.
- 따라 해, 부원장은 조빱이다.
- 영어는 콩밥, 수학은 개밥, 원장은 제삿밥~
- 조또 아닌 것들.
헉, 지원은 얼른 휴대폰을 뒤집었다. 누가 볼까 두려운 채팅이었다. 얘는 무슨 말을 이렇게 험하게 하냐, 투덜거리면서도 은근히 웃음이 나왔다. 리치가 거칠게 대하는 건 지원에게 적대적인 사람에게만이다. 적어도 리치는 유일한 지원의 편이었다.
출근해서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았다. 원장은 눈짓으로, 부원장은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강사들은 빠르게 지원의 곁을 스쳐 갔다. 모두가 정신없이 바쁜 와중, 혼자 할 일이 없는 것은 꽤 괴로운 일이었다. 지원은 연필을 깎고, 서랍정리를 하고, 교재를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면서 안내데스크를 지켰다.
수학이 문제집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났다. 지원은 얼른 나누어 들어주며 말을 붙였다.
“저어, 수학샘. 저랑 얘기 좀 해요.”
“무슨 얘기?”
“혹시 오늘 퇴근하고 시간 있으시면….”
수학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원이 먼저 보자고 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수학은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지? 오늘 보강이 있어서. 부원장님이 갑자기 3학년 시험 대비를 맡겨서, 시간이 안 되겠는데.”
“아, 그러면 내일이라도….”
지원은 진땀이 났다.
“이번 주 내내 바빠. 나중에 한가할 때 하자. 그나저나 논술, 복사기 하고 교무실 컴퓨터 또 고장 났더라. AS 불러서 해결 좀 해줘. 아유, 원장님은 돈 벌어서 다 뭐 하나 몰라. 저따위 고물로 무슨 일을 하라는 건지, 원.”
수학이 빠르게 사라졌다. 지원은 손에 힘을 풀었다. 꽉 쥐고 있던 라이터가 툭, 떨어졌다.
*
“AS 왔습니다. 고장이 잦네요.”
금세 기사가 도착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지난번에는 다른 기사 분이 오셔서 고쳐주셨는데, 당분간 괜찮을 거라 하셨거든요. 그런데 또 불러서 죄송합니다.”
지원은 민망해하며 음료를 내왔다.
“다른 기사 분이요? 누구?”
“키가 엄청 크고, 양복 입고 오셨어요.”
“아, 그분은 저 같은 AS 기사가 아닙니다.”
“아니에요? 기사님이라고 불렀는데. 어쩌지….”
“기사 아니고, 이런 거친 일하는 사람 아니고, 높은 분입니다. 그나저나 자꾸 기계 고장 내는 똥손이 대체 누굽니까? 이거 원, 일부러 고장 내려고 해도 못 하겠다. 기계 망가뜨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어. 하늘이 내린 똥손이야. 어떻게 생겼는지 그 사람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네요.”
그때, 수학이 교실에서 나왔다. 복도를 지나며 기사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탕비실에 들어가 커피를 타려는지 쿵쿵대다가, 정수기가 이상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기사가 눈길을 스윽 돌려 지원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 했다.
논술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 청소를 했다. 수학과 영어가 먼저 쓰고 나갔으나 뒷정리는 항상 지원의 몫이었다. 탕비실 정리까지 마치니 늦은 시간이었다. 수학의 보강은 끝났을까? 교실에 없었으니, 2층에서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려가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원은 거절당하는데 익숙했다. 다음에 보자는 사람 앞에 얼쩡거리기는 싫었다.
안내데스크 아래 두었던 종이가방을 꺼냈다. 그 안에는 부원장이 주었던 가방과 티셔츠,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부원장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동안 받았던 것들을 돌려주면서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듣고 싶은 변명이 있었다.
하지만 부원장은 원장실에 없었다. 원장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원은 원장의 눈에 뜨이기 전에 서둘러 등을 돌렸다. 오늘따라 학원이 조용했다.
▶리치
- 안지! 퇴근할 때 들러. 인기 폭발 먹태과자 들어왔는데 다 팔리기 전에 4 봉지 숨겨 놈. 맥주 안주로 이만한 게 없다지.
- 나 오늘 월말이라 편의점에서 이벤트 딱지 1000개 붙여야 돼. 새벽까지 근무 당첨.
- 사장님이 이제 나 엄청 좋아함. 잘생기고 싹싹하다고 동네에 소문났대.
- 날 위해 매상 좀 올려주고 가.
- 밥은 먹었냐?
그러고 보니 배가 고팠다. 오늘 학원에서 나눠준 간식은, 김밥 한 줄이었다. 컵라면과 먹고 싶었지만 수학과 영어 보기 껄끄러워 탕비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따뜻한 국물 생각이 간절했다. 속이 쓰려서 참기 힘들었다. 월급날도 가깝겠다, 모처럼 외식을 해 볼까. 지원은 분식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학원 앞 무인 문구점과 간식창고를 지나 먹자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치킨, 족발, 호프집이 죽 늘어서 냄새를 풍겼다. 그 곁을 빠르게 지나가던 지원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얼핏 아는 얼굴을 본 것 같았다.
부원장을 중심으로 수학과 영어, 그리고 중등부 강사 여럿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저마다 술잔을 든 채였다. 테이블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안주가 가득했다. 수학은 이미 취한 듯 얼굴이 시뻘갰다 호.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단톡방을 확인했다. 혹시 오늘 회식이 있었나? 내가 미처 몰랐나? 하지만 아무 흔적이 없었다. 인정해야 했다. 연락을 못 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지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쩐지 아까 본 원장이 떠올랐다. 원장은 팔짱을 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 술자리에 끼지 못한 건 원장과 지원뿐인 듯했다.
그때였다. 수학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두커니 서 있던 지원은, 흠칫 놀라 돌아섰다.
‘왜 숨는 쪽이 나인 거지? 들킬까 봐 조심해야 하는 건 그들이 아닌가.’
억울했지만 허둥지둥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세요.”
문을 연 가게에 대충 들어가 보니, 전골집이었다. 언젠가 영어가 ‘요 앞에 기가 막힌 전골집이 생겼다’고 말을 붙인 적이 있었다.
“두부인가요?”
“응?”
“두부전골이냐고요.”
지원의 비장한 물음에 수학과 영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부… 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저는 두부 안 먹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두부전골이에요.”
그때 딱 잘라 거절했던 메뉴였는데, 제 발로 걸어들어오다니. 이래저래 운이 나쁜 날이었다. 하지만 최악은 아직 남아 있었다.
“밤이라 재료가 다 떨어져서 두부전골밖에 안 돼요.”
거절할 힘도 없었다.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요란했다.
“아이고, 손님은 두부를 참 좋아하는가 봐. 아주 복스럽게 먹네.”
주인이 육수를 더 부어주며 감탄했다.
“아니거든요.”
지원은 볼이 터져라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저는 두부 안 먹거든요.”
꿀꺽, 뜨거운 두부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두부전골이에요.”
주인은 지원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
- 리치맨: 흠, 그랬구나. 오늘 힘들었겠네. 푹 쉬어. 그럼 내일은 뭐 할 거야?
- 안지: 학원가지 뭐 해.
- 리치맨: 내일 불금인데. 어디 놀러 가는 꼴을 못 보네. 그럼 주말엔?
- 안지: 월요일 수업 준비해야지. 별거 없어.
- 리치맨: 쟤는 학원밖에 모른다니까. 야, 너 요새 제일 재미있는 게 뭐야?
- 안지: … 없는데. 그러고 보니까 진짜 없어. 맥주?
- 리치맨: 맥주 빼고.
- 안지: 안주?
- 리치맨: 안주 빼고!
- 안지: 텔레비전도, 영화도 안 보고, 책도 요새 잘 안 읽혀. 쇼핑도 별로, 서울에는 만날 사람도 없고.
- 리치맨: 안지야, 너 정말 안 되겠다. 네 세상은 온통 학원뿐이야? 나 이제 부원장 얼굴에 점이 몇 개인지도 알겠어. 하도 그 사람 얘기만 들어서.
- 안지: 아 씨, 기분 나쁜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네.
- 리치맨: 안지야, 내가 이야기 하나 해줄게. 이름이 뭐더라, 어떤 물고기가 있는데 말야. 이 물고기를 어항에 넣으면 딱 그만큼만 자란대. 욕조에 넣으면 더 커진대. 그 물고기를 바다에 풀어주면, 엄청 커다란 고래가 된대!
- 안지: 너 또 이상한 거 봤구나? 유튜브를 다 믿지 마라.
- 리치맨: 나는 일본에 처음 가보고 알았어. 아,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구나. 세상은 참 넓구나. 가까운 나라도 이 정돈데 지구 반대편은 또 얼마나 신기할까? 그래서 말인데 안지야, 너 면허나 따라.
- 안지: 무슨 면허야. 차도 없는데.
- 리치맨: 차 있어야 면허 따냐? 아니 그럼 똥 눌건대 밥은 왜 먹어?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
- 안지: 뭔 헛소리야. 너 가끔 보면 또라이 같아. 그만해, 나 잘 거니까.
그날 밤, 지원은 꿈을 꾸었다. 운전하는 꿈이었다.
핸들을 돌리는 대로 방향이 바뀐다는 게 신기했다.
꿈이라서인지 무섭지도 않았다.
창문을 내리고 신나게 달리는데, 저만치에 누군가 보였다.
지나치며 보니, 엄마와 아빠였다.
무거운 짐을 잔뜩 들고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두 사람은 지원을 알아보지 못했다.
지원이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차는 멈추지 않았다.
창밖으로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두 사람을 뒤로하고, 지원은 혼자 달렸다.
차마 뒤돌아보지도 못한 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
8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