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는여름 Nov 21. 2021

마흔여덟, 신입입니다_3주차

신규공무원 3주차: 각자의 방, 각자의 별에서-

 3주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업무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인수인계 없이 빠르게 업무가 이루어진다는 공무원 세계에 대한 사전 정보와는 달리 이곳은 신입들을 관망하며 지켜보는 쪽인 듯 1주에는 전혀 업무를 주지 않았다.

 할 만해요?

 네, 뭐.

 일이 없으니까아

 1주차에는 과장님의 웃음에 함께 웃을 수 있었다. 동기들은 모두 같은 정도로 한가했다. 2주에 돌입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사수에 따라 꽤 많은 업무를 배정받는 동기가 있나 하면 나처럼 한가한 동기도 있었고. 누군가는 네모, 다른 이는 세모 이런 식으로 업무도 제각각이었다. 같은 직렬이고 결국 같은 일을 하게 될  신규에게 어째서 사수들은 한데 모여 동시에 같은 종류의, 일정한 양의 업무를 배정하도록 합의하지 않는지는 모를 일. 그런 상태에서 일이 많이 몰린 동기 C는 벌써 발군의 업무처리 능력을 보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C가 서른 건의 일을 처리할 동안 나는 서너 건을 처리했다. 저도 일을 주세요,라고 몇 차례 말을 했으나 사수는 그다지 흡족할 만큼의 업무를 배정하지는 않았다.


 이즈음 나는 사수에 대한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꼼꼼하게 일을 하나하나 가르쳐주던 내 사수는 문서를 출력할 때면, 땡 씨, 시력 좋아요? 난 눈 나빠서 2페이지 모아 찍기로 해요, 시력 좋은 사람들은 4페이지 모아 찍기 하던데 (힐끗) 땡땡 씨도 시력 좋을 나이는 아니잖아.

 땡땡 씨, 내가 늘 인상 쓰고 있어서 화나 보인다고 생각하지 말고 물을 거 있음 물으러 와요. 땡땡 씨도 알잖아, 우리처럼 나이 먹으면 늘 화난 인상인 거.

 우루루 커피를 마시러 갔을 때였나, 아아와 뜨아파로 나뉘었다. 20대 동기들이 아아를 외칠 때 난 뜨아를 속삭였다. 그때도 들려왔다. 나이 먹으면 다 뜨아지.

 하아, 난 보란 듯이 4페이지로 모아 찍기를 하며 보이는데? 보이는데에에? 소심하게 내 시력을 어필했고 (아니, 잘 안 보여. 인상을 쓰고 봤어.)

 거울을 흘깃흘깃 보며 아닌데에, 아닌데에, 난 웃고 있는 데에- (아니, 어색하게 얼굴이 일그러져있어. 주름이 자글자글해)

 아닌데에, 아닌 데에, 난 어릴 때부터 따뜻 따뜻한 믹스 파였는데에-

 겁나 유치하게 속으로 아닌데를 시전 했다.

 사수의 태도가 이러하다 보니 난 그가 나이 많은 를 고깝게 여겨, 혹 못 미덥게 여겨 업무 배정을 하지 않는 것인가 심란해졌다.

 3주 차에는 일이 없어 초조했다. 나에게도 업무를 주긴 하겠지? 일이 많댔는데 실은 안 많은 건가? 이즈음에는 지나가던 과장님의 어때요, 괜찮아요? 란 물음에 시무룩한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제가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업무를 모르겠단 뜻이 아니라 진짜 내가 이곳에 와서 당최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단 의미였는데 저 멀리 과장님 뒤통수가 보일 즈음 내 머리를 쳤다. 아직도 업무 파악을 못 하고 있다고 받아들였을 수 있잖아. 하아, 너무 한가해서 힘들다는 뉘앙스라도 전할걸 뒤늦은 후회다.

 그나마 몇 건 업무를 처리했던 이틀 후 수요일과 목요일은 사수가 교육으로 자리를 비웠다. 화요일 저녁 즈음 일을 주시면 제가 처리를 해놓을게요, 했으나 됐어요, 쉬고 있어요, 란 답이 돌아왔다.

 목요일 아침의 출근길에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린 동기들은 벌써 저만큼 앞서 나가는데 역시 나이 많은 신입이라 업무 처리가 늦다고 오해 받을 일에 마음이 급했다.

 자꾸만 지방직에서 국가직과 다른 두 과목을 선택해 한 달만 공부했음에도 1점 차로 필기에 불합격한 사실을 어필할 때처럼 사수가 일을 주지 않아 일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무능한 게 아니오, 내가 무능한 게 아니라오오오오. 대숲에 숨어들어 사수가 일을 안 줘요 부르짖으려 할 때, 어린 동기 한 명이 뭐하냐고 메신저를 보내왔다.

 

 휴게실에서 커피 한 잔 했다.

 아직은 일이 되게 힘든 것도 아니고, 사람들도 다 좋은데, 왜 오기가 싫을까요.

 업무처리에 특화된 능력을 보인다는 C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니!

 기분이 자꾸 다운돼요.

 동기와 둘만 오래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분위기가 편해지니 과장님과 팀장님, 사수에 이르기까지 꽈배기가 된 마음도 적당히 웃으며 터놓게 됐다.

 정말 작작 좀 해요! 싶었다니까요. 크크.

 C는 사실 다른 직렬로 들어왔는데 우리 쪽 인원이 부족해 이쪽 업무에 배정된 상태였다. C를 제외한 다른 동기들은 모두 예상한 업무를 맡았으나 C만 예외인 상황. 허나 자신은 언젠가 순환하면 다 맡게 될 일이니 미리 경험한다 생각하고 좋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볼 때마다 배려심 쩌는 과장님과 팀장님이 그런단다.

 C 씨, 괜찮아요?

 사수도 괜찮아요? 선배들도 괜찮아요? 다른 동기들도 괜찮아요? (나도 포함돼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말을 듣다 보니 아, 그렇게 미안하면 애초에 이 업무에 배정을 하지 말던가 싶고 괜찮다가도 그 말을 듣다 보면 안 괜찮아진대.

 그리고 20대 동기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것도 신경이 쓰였나보다. 아, 물론 제가 스물아홉이니까 당연히 20대 중에 제일 많죠 큭큭.

 나에게는 똑같은 20대건만 그 안에서는 또 다른 느낌인가 보다.

 이야기 끝에 다른 동기 K의 얘기도 나왔다.

 면담시간에 과장님이 그러셨다.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일이 잘해봤자 누가 얼마나 더 대단히 뛰어나게 잘하겠는가, 업무 능력은 결국 그만그만하다. 그보다는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누군가가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돼야 한다. 친절하고 사람들한테 잘하고. 두루두루 사이좋게 지내고. 결국 그런 사람이 좋은 자리 가고 인정받는 거라고.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그 사회적 부적응자, 나야 나-하고 있을 때,  C에 따르면 K는 과장님이 자기한테 하는 이야긴가 싶어 자기는 안 되겠다 했단다.

 동기 중 유일하게 내성적이고 나서서 말하는 법이 없는 K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 나는 틀렸다며 그냥 내 할 일이나 열심히 해야지, 뭐 그랬단다.

 

 금요일, 사수가 교육에서 돌아왔다.

 땡땡 씨, 땡땡 씨한테 어떤 일을 줘야 할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처음부터 급하게 여러 일을 하는 게 오히려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 한 가지 업무만 우선 주려고 해요. 그리고 전체 흐름을 알면 다른 일을 처리하기가 더 쉬워지니까 이쪽 일이 익숙해지면 다른 일도 많이는 말고 조금씩 줘 볼게요.

 내가 다른 동기들과 보폭을 맞추려 서두를 때 나의 사수는 조금씩 천천히 내가 익숙해지도록 배려하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왜 나를 나로 봐주지 않고 나이로만 보냐고 움츠러드는 마음 가득이었는데 정작 나를 나로 보여주지 못하고 나이로만 보여주던 게 나였나 보다.

 다음 주면 또 변할 마음일테지만 과장님과 팀장님, 사수와 동기들에게 0.1밀리 또 마음을 연 한 주.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 각자의 별에서 각자의 생각과 고민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끄집어내 놓고 보면 그 생각들과 고민들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제목은 방탄소년단 노래 소우주의 가사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마흔여덟, 신입입니다_2주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