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가 잎을 갉아먹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잎은 조금씩 세상에서 사라져 갔고, 먹을 만큼 먹었는지 애벌레도 뒷걸음질로 물러갔다. 바람이 불자 깊게 파인 잎은 다른 잎들과는 다르게 파르르 떨리는 듯 보였다. 그때였다. 애벌레가 먹어버린 딱 그만큼의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자그마한 허공일지라도 무척이나 신기한 경험을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던 잎 저편의 세상과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곳에 존재할 수 있을까. 애벌레처럼 뒷걸음질로 물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