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정유 동 0 주유소에서 치열한 2달 보내기
2000년 1월 짧으면서도 길었던 군 생활의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이제 드디어 1달만 지난다면 군대에서 해방이라는 생각에 들떴었다. 하지만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아 신나는 마음으로 도착한 집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였다. 그때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쓰겠다. 분명한 사실은 제대하자마자 난 돈을 벌어야 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군생활 틈틈이 제대 후 어떻게 살아 보겠다는 계획은 모두 완벽하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어차피 군대 가기 전까지의 난 학교와 집만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해왔고 사회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으니 어찌 보면 새로운 기회로 볼 수도 있었다. 그건 자기 위안일 뿐, 마음 한 구석은 구멍이 뻥 뚫린 듯 허전했다. 새로운 계획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접는다는 게 아쉬웠지만 어쩌랴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그래서 2000년 3월 2일 토요일 제대한 후 이틀 쉬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바로 일자리를 구한다. 그건 바로 주유소 아르바이트였다.
광주의 동 0 주유소에서 09시 ~ 18시까지 세차와 주유를 겸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게 됐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주유소에 들어오는 차나 오토바이에 기름을 채워주는 일과 차량 세차 업무였다. 그 주유소는 오전 7시부터 저녁 23시까지 영업을 했다. 그곳의 특징은 정유사에서 직접 경영하는 직영주유소가 아닌 일반 자영업처럼 사장님(주유소라 호칭은 소장님이었다.)이 운영하는 일종의 회사였다. 주유기는 총 4개, 자동세차기 1대가 있어서 내부 세차(진공청소기로 차 안의 먼지 제거 및 대시보드와 좌석 닦기, 발판 세척)와 외부 세차(세차기 진입 전 고압세척기로 분무 세척 -> 세차기 진입 -> 수건으로 남아있는 물기 제거) 그리고 주유가 동시에 이뤄지는 곳이었다. 그래서 아래만큼 아르바이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2000년만 해도 전남 광주에서 셀프 주유소는 없었다. 으레 주유소에 가서 3만 원 정도만 기름을 채우면 휴지도 주고 차 안 쓰레기도 비워주며 간혹 워셔액까지 채워주는 지금과 비교하면 초특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일단 주유소에 차가 들어오면 아르바이트생인 나는 차를 주유기 앞으로 이끈다. 그다음 운전석 쪽으로 가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LG CALTEX 동 0 주유소입니다. 얼마 넣을까요?”
“가득” 또는
“이빠이(가득이라는 일본말인데 일하는 당시의 느낌을 살리려 그대로 쓴다)” 또는
“3만 원”이나 “5만 원”
아주 가끔 “00리터” 등의 대답이 돌아온다.
“네, 시그마 6(당시 LG정유에서 팔던 휘발유 브랜드명) 가득 또는 3만 원 주유하겠습니다.
차 안에 쓰레기통 비워드릴까요? 워셔액(당시는 메탄올에 물을 희석한 워셔액을 주유소에서 직접 제조함) 채워 드릴까요?”
기름을 채우는 그 2분 남짓의 시간 동안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며 계산도 했다. 물론 지금과는 달리 현금으로 계산하는 분들이 70% 정도, 나머지 분들만 카드로 계산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님에게 “세차하시나요?”라고 물으면 최고의 업무 수행 태도를 지닌 직원이 될 수 있었다.
서비스업 특성상 일이 몰리는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매번 달랐다. 사람이 원인일 때 도 날씨가 원인일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황사가 오고 난 뒤에는 주유 손님의 비중은 10%지만 세차 손님이 90%라 일하는 내내 세차만 하는데 종일 세차만 하다 보니 300대까지만 세고 숫자 세기를 포기한 경우도 있었다. 간혹 아프거나 무단결근하는 알바가 있을 경우 주유와 세차할 차들이 밀려들면 몸이 2개도 모자랄 정도로 뛰어다니며 일을 처리하고는 했다.
2주 정도 지나니 일이 손에 익었고 처음처럼 오토바이에 기름을 넣다 넘치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오토바이는 일반 차와는 달리 기름을 빠른 속도로 넣으면 안 된다. 특히 작은 스쿠터의 경우는 기름통이 작아 천천히 넣어야 하며 기름이 다 찰 때까지 주유기를 손으로 잡고 계속 확인해야 한다. 안 그러면 기름이 넘친다. 그런데 처음 일하는 사람이 그걸 어찌 알겠는가? 다들 맨땅에 헤딩하며 배우는 거지 뭐, 1-2번 실수할 때가 있었고 그때마다 정중히 사과했다. 흔쾌히 괜찮다는 손님이 있는 반면에 기름이 넘쳤다며 배상을 요구하는 손님도 있었다. 오토바이에 넣은 기름이 넘쳐봤자 얼마나 넘쳤을까 그래 봤자 작은 요구르트 병 1개도 되지 않았을 테지만 그냥 500원 주는 걸로 해결할 때도 있었다. 그런 분들의 특성상 500원이라도 받지 않으면 절대 그냥 돌아가질 않았다. 길길이 날뛰며 보상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진상 손님도 몇 분 기억이 난다. 진상이란 말은 흔히 악성고객을 가리키는 서비스업에서 주로 쓰는 표현이다. Citi 100 오토바이에 5000원 정도 기름을 채우러 오는 중국집 사장님이 있었다. 그 사장님은 올 때마다 우리에게 요구사항이 많았고 말도 많았다. 본인 입으로 “나 무쏘 샀다. 차 곧 나온다.”. “5000원어치 기름 넣었는데 휴지 몇 개만 더 주라.” 지금 생각해도 30대 후반의 손님이 20대 초반의 애들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5000원 기름 팔아 얼마나 이윤이 남는다며 나를 비롯한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아주 많은 서비스를 요구했다. 막상 차가 나오자 내가 일하는 주유소는 기름값이 비싸다며 주유하러 오지 않았다.
60대로 보이는 어떤 손님이 있었다. 비싸다며 기름은 최소한으로만 주문할 뿐 오직 세차 목적으로만 오는 분이었다. 그분은 싼 가격에 꼼꼼한 세차를 하고 싶으셨나 보다. 내가 일하던 동 0 주유소에서는 내부 세차와 외부세차 모두 합쳐 5000원이었다. 세차기에서 건조가 끝나면 나를 비롯한 아르바이트생들이 붙어 세차하고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는다. 그런데 그 손님은 세차기에 나오면 꼭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리고 차 문을 다 열며 문틈과 웨더스트립(차 문을 열면 빗물이 들이치는 걸 막기 위해 검은색 고무가 달려 있다) 사이에 스며든 물기를 모두 닦아달라고 했다. 심지어는 트렁크 문까지 열며 밑에 남아있는 물을 닦으라고 손짓했다. 그분이 몰던 차는 당시 국내에서 제일 고급차였던 현대 에쿠스였다. 좋은 차를 모는 사람이라고 해서 인격마저 훌륭한 것은 아니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해 준 고마운(?) 분이셨다.
주유소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어가며 사회생활의 기초를 다지던 중 소장님이 아르바이트생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앞으로 2주 이내 본사에서 주유소 친절도 평가를 하기 위해 방문 예정이다. 소속을 드러내지 않고 일반 손님처럼 암행 방문할 테니 지금보다 더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해달라, 우리 주유소는 작년에 전국 최우수 친절 주유소였다. 올해도 꼭 최우수 친절 주유소로 뽑혀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 말은 앞으로 본사에서 방문하기까지의 2주 동안은 많이 힘들 거라는 소장님의 선전포고였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커야 하고, 표정도 더 밝게, 힘들어도 꾹 참고 웃으며 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29살이었던 소장님은 최우수 친절 주유소라는 목표에 미쳐 있었다. 본인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그게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과는 똑같을 수는 없었다. 평소보다 업무강도가 세지는 반면 아무 보상도 없는 그런 일을 어느 누가 좋아하랴?
그래도 다들 순종적인 알바들만 모였는지 별 군소리 없이 열심히들 일했다. 그러다 어느 날 오후 평소보다 조금 한가해져서 잠시 숨 돌릴 틈이 있었다. 때마침 세차기 앞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다 일어서며 살짝 허리 근육이 놀라 몸이 잠시 말을 안 들었다. 별안간 소장님이 나를 보며 “차 들어오는데 안 뛰어가고 뭐해?”라며 소리쳐도 서운했지만 그냥 꾹 참으며 일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 놀고 있던 것이 아니고 허리가 잠깐 아파서 못 움직인 건데. 그 2주 간의 평가 기간 동안 소장님과 아르바이트생들 모두 신경이 날카로웠고 일은 고되고도 힘들었다.
전국 최우수 친절 주유소라는 뭔가 거창한 나와는 상관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상관있을법한 그 목표를 치열한 2주를 보내고 난 뒤 우리는 이뤄냈다. 발표가 난 다음 주 월요일 출근했던 난 주유소 입구에 세워진 입간판과 주유기 위에 걸려있는 큼직한 플래카드를 볼 수 있었다. 그 플래카드와 입간판엔 이런 글귀가 있었다. “2000년 전국 최우수 친절 주유소”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힘들기만 했었는데 이렇게 색다른 경험이 생길 줄이야,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난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소개서를 썼고 면접관들에게 날 차별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소재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