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무려 46개월 만에 복학을 했다. 2000년 3월 제대한 후 복학하기 전까지 숱한 아르바이트를 해왔지만 매달 5~60만 원 받는 월급으로는 집안 생활비 보태고 영어학원비를 내고 나면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5만 원뿐이었다. 모아놓은 돈이라고 해야 다음 달 월급 받을 때까지 간신히 버틸 수준이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을 쉴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을 마쳐야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려면 학교를 다니면서도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복학하자마자 학교를 다니며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수소문했다. 그러다 6개월 후인 2002년 초, 운 좋게 학교 주차장 야간 정산 아르바이트를 구하게 됐다.
최소 6개월~1년 정도는 일할 수 있는 자리였다. 평일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12시간 동안 주차장에서 요금정산을 하는 일이었다(일하는 환경이나 방식은 고속도로 톨게이트와 비슷함). 주말은 다른 근무자가 있어 온전히 쉴 수 있었다. 요새는 아마노 코리아나 아이파킹 등 무인 주차장 요금시스템이 완비되어 있지만 2002년만 해도 10,000원 이하의 소액 결제는 당연히 현금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직접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건네줘야 했었다.
학교 정문에는 왕복 4차선의 도로가 있었다. 정문을 나서는 두 개 차로엔 각각 요금 정산하는 자리가 2곳 있었지만 내가 일하는 야간엔 1곳만 운영했다. 나머지 1차로는 자동인식 태그를 지닌 교직원이나 대학원생의 차량만 빠져나가는 차로였다. 그곳에서 2명이 12시간 동안 알아서 주차 요금을 계산하고 자리를 지키는 간단한 알바였다. 또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니 월급도 60~70만 원 정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정도면 학교 다니면서 드는 온갖 비용(책값, 밥값, 용돈, 고시원비)까지 충분히 낼 수 있는 금액이었다.
평일에 날 새기로 일해야 하니 주중에 학교 근처에 머물 숙소를 구해야 했다. 다행히 학교 근처에 고시원이 많이 있어 나처럼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하숙이나 자취 대신 머물 수 있는 2.5평 정도 되는 방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주말에만 쉴 수 있기에 학교에서 가깝고 싼 고시원을 골랐다. 한 달에 7만 원이면 24시간 쓸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화장실과 욕실은 당연히 공동사용이다. 오직 방 1칸만 제공되며 창이 있는 곳은 월 8만 원, 없는 곳이 7만 원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창문이 있지만 매달 7만 원만 내는 걸로 고시원 방을 얻었다. 이제 아르바이트만 시작하면 되었다.
야간에 일하는 동안 내 학교 생활은 이랬다. 고시원이 근처에 있어 아침 8시쯤 느지막이 일어나 여느 대학생처럼 강의를 듣고 남는 시간엔 놀기도 했다. 일단 학점은 4.5 만점에 3.5 정도만 맞추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은행 쪽보다는 대기업의 영업 직군으로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학점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하는 쪽으로, 될 수 있으면 전공과목은 최소로 수강하고 다른 과의 강의를 듣는 쪽으로 수강신청을 했다. 사회학과, 영문학과, 국문학과, 심리학과의 수업을 주로 들었다. 학교가 꽤 큰 편이라(정문에서 후문까지 달려도 약 2km) 동선을 잘 계산해야 했다. 그래서 경영학과 근처에 있는 인문대, 사회대 강의를 주로 들었고 학점도 기대만큼 좋은 성적을 얻기도 했다(항상 그런 건 아님).
그러나 저녁 7시가 되면 생활인으로 변신해야 했다. 저녁에 12시간씩 1주일을 일해보니 여러 문제가 생겼다. 수업시간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특히 점심시간 이후의 수업은 교수님의 말씀을 듣기는커녕 잠자기 바빴다. 주 5일을 이렇게 살다가는 간신히 아르바이트만 할 뿐 학교 성적은 안 봐도 뻔했다. 그래서 같이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생에게 부탁했다. 일하는 12시간 중 내가 19시부터 03시까지 할 테니 넌 23시부터 07시까지 하는 게 어떨지 제안을 해봤다.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들어오는 차의 요금만 제대로 계산하면 되는 일이라 업무강도가 약한 편이었다. 누군가 밤중에 나와 2명이 제대로 일을 하나 감독을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편법을 쓰게 됐다. 원래대로라면 2명 모두가 정위치에서 일을 해야 하지만 학교도 다녀야 하고 일도 해야 하는 나로서는 궁여지책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같이 일하는 동생과 시간을 나누어 일하게 됐다. 교직원들이 주로 퇴근하는 8시부터 야간대학원이 끝나는 저녁 10시가 가장 바쁜 시간대였지만 난 새벽 3시부터 7시까지의 잠이 중요했기에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또 그걸 이해해준 동생에게 덕분에 학교 다니며 일할 수 있게 됐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학교에 행사가 있는 날이면 주차장에 손님이 정말 많았다. 무슨 차들이 그렇게 많은 지, 계산하기 위해 줄지어 선 차들이 족히 20대는 넘어 보였다. 또 저녁에는 정문을 빠져나가는 2차선 중 1차선에만 계산대가 열려 일반 차량들이 요금계산 후 지나갈 수 있었고 2차선은 자동인식 태그를 발급받은 교직원이나 대학원생의 차만 요금계산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분명히 계산대 진입 30m 전에 이런 내용이 쓰인 안내 표지판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 주차장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아마도 90% 이상) 그걸 제대로 보지 않았고 그 결과 행사가 있는 날이면 양쪽 차선 모두 10여 대 이상의 차로 가득 차는 일이 되풀이됐다. 그걸 정리하는 것도 역시 내 몫이었다.
그런 식으로 양쪽 차선이 차로 가득 찰 경우 요금계산까지 보통 10여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다. 주차요금 계산을 하는 짧은 시간 동안 전후 사정을 설명하면 대부분 좋게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소수의 진상고객님도 있어서 소리를 지르거나 경적을 심하게 울리는 경우도, 심지어는 계산대 문을 열고 들어와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따라 차들이 줄지어서 계산대로 밀려드는 통에 30여분 이상 꼼짝도 못 하고 주차권 받기→ 요금 고지 → 손님에게 돈 받기 → 다시 거스름돈 건네기를 무한반복 중이었다. 자동 태그만 인식하는 바깥쪽 2차선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기 안 하는 거야? 빨리 계산해야지, 앞 차는 잘 열리더니 뭐야 이게” 진상고객님의 등장이었다. 차로 가득 찬 1차로를 지나쳐 본인만 빨리 가려고 상대적으로 한가한 2차선으로 진입한 차량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내 앞에서 거스름돈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며 계산대의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 외쳤다. “그쪽은 자동 인식된 차만 나가요, 앞에 안내판에 쓰여 있습니다. 뒤에 기다리는 차를 이쪽으로 유도할 테니 이쪽 차선으로 오세요, 여기서만 계산됩니다.” 말을 마친 후 1차선에서 주차요금 계산할 차례를 기다리는 차가 얼마나 되나 가늠해봤다. 대략 10대 정도다. 서둘러 2차선에 있는 4대의 차를 1차선으로 옮기고는 2차선을 막아버렸다. 가끔 차가 붐비는 날엔 자동 인식된 차만 나가는 2차선을 막아버려야지 계속 열어놨다가는 제2, 제3의 진상고객님들이 나타났다.
서둘러 계산대로 돌아와 3~4대쯤 계산에 전념하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계산대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들어오세요, 지금 계산중이라 못 나가요” 아뿔싸, 그런데 계산대 문 밑의 롤러가 고장 난 상태였다. 일하는 우리는 그 문이 잘 열리지 않는 걸 알고 있어서 미닫이 문을 열고 닫을 때면 꽤나 힘을 써야 했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그걸 몰랐다. 그리고 난 그 사실을 차분하게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나 : 힘으로 밀면 돼요, 들어오세요
진상 : (한참을 끙끙대더니 결국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옴, 다짜고짜 내 뒤통수를 때림)
나 : 지금 뭐 하는 거예요?(하지만 일어설 수 없음, 화가 났지만 참으면서 계속 요금 계산함)
진상 :!@#%$#^%$&&$#^^$%&m#$%
진상고객은 자신이 좋게 항의하러 왔는데 왜 문을 열어주지 않느냐며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문이 고장 났고 또 바깥 차선은 자동 인식된 차만 나갈 수 있다고 안내했던 건 모두 잊어버린 듯했다. 자신은 차례를 오래 기다렸는데 나갈 수 없으니 짜증이 났고 그 짜증을 나한테 모두 풀고 있었다. 옆에 아내를 태우고 있었는데 왜 그러나 싶었다. 성질 같아서는 몇 대 쥐어박고 싶었으나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나가려고 기다리는 차는 어쩔 것인가? 몸싸움이 벌어지면 여긴 누가 관리하나? 진상고객을 쥐어박은 후 합의금은 어떻게 마련할까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냥 참게 됐다. 지금 학비와 생활비 벌기도 힘든데 여기서 화내면 안 된다 스스로를 다독였다.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지만 꾹꾹 내리눌렀다. 내가 간신히 참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상고객은 혼자 뭐라고 중얼대더니 조용히 뒤에서만 내가 바삐 일하는 걸 쳐다보고 있었다.
5분쯤 지나 차들이 빠져나가고 정문의 수위실에 전화했다. 그리고 경찰에도 신고했다. 내가 있던 계산대는 일단 수위 아저씨가 책임지고 계셨고 정문의 수위실로 나와 진상고객은 이동했다. 진상고객은 한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날 조롱했다.
진상 : 아까 네가 소리쳤을 때 나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경찰한테 그래도 말할 거야.. 알았냐?
나 : 반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때린 거 고소할 테니 알아서 하세요
진상 : 내가 언제 때렸냐?
나 : (더 이상 말하지 않음)
(정말 아무도 없는 곳에 있었으면 꽤 진한 몸의 대화를 나눴을 텐데 무지 아쉬웠음)
밖에선 진상의 아내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저런 지질한 사람을 남편으로 만난 사람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진상과는 달리 얌전히 차에서만 기다리는 진상의 아내는 좋은 사람 같아 보였다. 날 계속 비꼬던 진상은 당직근무를 서던 학교 관계자와 경찰이 도착하자 180도 변했다. 신분확인을 하니 30대 중반의 나이였다. 자기보다 10살이나 어린 동생을 홧김에 때려놓고는 끝까지 안 때렸다며 발뺌하고 있었다. 경찰은 내가 외관상 다친 데가 없어 보이니 그냥 화해시키고 얼른 마무리하려 했다. 사건 처리하려면 일거리가 생기니 귀찮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학교 관계자도 마찬가지였다. 억울한 나는 고소하겠다고 맞섰지만 학교 관계자의 종용(계속 내 뜻대로 고소할 경우 관계자의 입김으로 자칫 아르바이트 자리를 놓칠 수 있다는 불안함)에 어쩔 수 없이 악수하며 좋게 마무리를 했다. 진상고객의 말이 걸작이었다.
형식적으로 악수를 하고 그냥 일터로 복귀했다. 한 대 맞았을 때 두 대 이상 갚아줄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왜 뒷감당할 일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화도 제대로 못 내는 내가 바보 같았다. 그날은 일을 마치는 내내 기분이 우울했고 무력한 내게 화가 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참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1년 동안 평일 저녁 7시 ~ 다음 날 7시(같이 일하는 동생의 배려로 새벽 3시까지 하고 4시간은 쉴 수 있었다)까지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저녁이면 도서관에서 열심히 토익공부나 다른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울 때도, 좋은 부모님을 만나 인생 편하게 산다며 혼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건 잠시 뿐, 그런 감정은 내겐 사치였다. 당장 오늘 일하지 않으면 1달 뒤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걱정해야 했으니까.
저녁 12시면 변하는 신데렐라처럼 난 저녁 7시면 대학생에서 생활인으로 변해야 했다. 그래야 내가 살아갈 수 있었다. 그땐 꿈도 희망도 모두 뒤로 한 채 어엿한 직장인만 꿈꿨다. 정장에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니는 직장인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그리 되는 것이 하루에 4시간만 자며 힘들게 생활하는 내가 누리는 최고의 보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힘든 1년을 보내고 00 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