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
본 에세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허구로 등장하는 모든 이름(기관명, 지명, 인물명 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무원은 비밀유지의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정보 및 민감정보 외에는 모두 실화입니다. 퇴사를 꿈꾸지만 아직은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저희 기관장님을, 저의 모든 동료분들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이런… 미친……!”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하여 입을 틀어막았지만 사무실 안이 너무 고요했기 때문에 모두가 내 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특히, 하필이면 팀장님이.
“김토끼 쌤, 무슨 일 있어?”
“… 전임 선생님이……자료를 다 삭제해 버리고 가셨어요. 컴퓨터에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 뭐라고!?”
팀장님은 부들부들 떨며 내 자리 뒤에서 모니터를 확인했고 어제 산 컴퓨터처럼 깨끗한 PC를 나와 함께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럴 애가 아닌데……. 노루가 자료 공유 좀 최대한 해주고. 다들 김토끼 쌤 좀 도와줘, 알았지?”
팀장님은 시원시원하고 거침없었다. 이름 그대로 바위같이 대쪽 같으신 분이었다. 카리스마가 흘러 넘쳤다. 그녀의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나는 8급 나부랭이였기 때문에 사업을 담당하더라도 큰 사업의 일부 몇 꼭지정도였다. 옆자리 선배인 최노루가 사업의 총괄이자 메인이라면 난 그녀를 보조하는 서브 포지션이었다. 팀장님은 본청이 처음인 나를 위해 그렇게 배려하여 업무분장을 짜주었던 것이 신의 한수였다. 삭튀를 당했으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맨땅에 헤딩하는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나한테 그동안 공유받았던 자료 있으니까, 그걸 우선 메신저로 다 줘 볼게요.”
그녀는 웃으며 나에게 대량으로 파일을 전송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우선 다운을 받으며 이 와중에 내 담당 사업과 동일한 사업을 맡고 있는 지원청 담당자들의 이름을 틈틈이 파악하기 시작했다. 발령 전, 본청에서 수습직원으로 일했을 때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본청은 사장님이라고 생각하면 돼. 지원청은 우리 밑에서 일하는 중간관리자라고나 할까?”
“… 그렇군요……?”
“학교랑 직접 부딪히는 건 다 지원청 시키면 우린 뒷짐 지고 구경하는 권력을 누릴 수 있지.”
“지원청이 시키는 대로 안 하면요?”
“그러니까 자알~구슬려놔야지. 본청에서 일하게 되면 먼저 지원청 담당자들부터 내 편으로 만들어놔.”
지원청 담당자 명단을 확인하던 중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어라? △△지원청 담당자는 강토순이잖아!?”
나는 바로 토순에게 메신저를 날렸다.
김토끼: 토순쓰. 너 복지팀 갔음?
강토순: ㅇㅇ 힘들다고 옮겨달라 했더니 옮겨줌. 개꿀~
김토끼: 내가 너 상관임. 엣헴 ㅎㅇ잘 보여라
강토순: ㅎㅇㅎㅇ개꿀이네 나 자료 좀 늦게 내도 됨?
김토끼: ㅋㅋㅋㅋㅋ되겠냐? 넌 하루 일찍 내야행. 근데 나 좀 큰일나썽
강토순: 왜
김토끼: 전임자가 삭튀함
강토순: …저런 개……
이후 그녀는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보내왔고,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지만 이전 담당자가 지원청에게로 뿌렸었던 파일들을 대용량 파일 전송으로 보내왔다.
강토순: 일단 지원청에서 받는 파일은 이 정도야. 갖고 있어 봐. 나도 업무 파악 하는 중
김토끼: ㄳㄳ나도 업무 파악 해야 하는데 이게 뭐냐
그때,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쌤…안녕하세요. 저도 이번에 쌤이랑 같이 복지팀으로 발령받은 박수달이라고 해요.”
그녀는 어여쁜 얼굴로 수줍게 인사했다.
“아핫! 안녕하세요!”
“저는 옆팀에 있다가 이쪽으로 오고 싶다고 해서 재배정받았어요. 잘 부탁드려요. 전 팀서무 업무를 맡았어요.”
나는 포카리스웨트 광고의 여주인공처럼 최대한 싱그럽게 웃으며 화답했다. 나의 구원자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수는 운 좋게도 나보다 아래였고, 기수대로 업무 분장이 되다 보니 팀서무 업무는 그녀의 몫이 되었다.
‘안 그래도 노괭이가 나 서무 업무 못한다고 맨날 면박 줬는데. 서무 업무 안 해도 돼서 좋다!’
보통 저경력자가 본청에 전입하면 서무 업무를 피하긴 쉽지 않다. 딱히 실적이 될 만한 건 없는, 잡무 같은 일부터 시작하여 일을 배워가는 게 이곳의 암묵적인 룰이었지만 난 쏙 피해 간 셈이다.
“제가 듣기론 전임자 선생님이 바꾼 PC가 아직 탕비실에 있다더라고요. 한번 가보세요. 그리고, 여기 자리 이동이 빈번하게 있었대요. 다른 분들께 부탁해서 컴퓨터에 자료 있는지 물어봐요.”
정말 어디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일까. 옆자리 선배도, 이 사람도 나를 최대한 도와주려 하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마치 자신이 삭튀 당한 당사자인 것처럼 적극적으로 같이 해결방안을 고민해 주며 전임자를 비난했다.
나는 연신 고맙다고 꾸벅 인사를 하며 탕비실로 와다다 달려갔다. 탕비실에는 폐기 처분 예정일 데스크톱들이 한쪽에 쌓여있었다.
“이 중에서…어떤 걸까…….”
나는 가장 윗 줄에 있는 데스크톱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을 때 과 전체 서무가 마침 탕비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과' 단위의 꽤 큰 조직의 서무답게 모르는 게 없었다.
“그 혹시…삭튀의 희생자이신가요?”
“네네! 맞아요!”
“맨 위에서 오른쪽 컴퓨터가 전임 선생님이 쓰던 거였어요.”
“… 감사합니다!!”
나는 낑낑거리며 데스크톱을 내 옆자리에 풀썩 내려놓았다. 이제 자료 정리 좀 해볼까 했는데 갑자기 결재요청 문서들의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 이게……뭐야…?”
본청에서는 전화 응대할 일이 별로 없었다. 대신 새로운 복병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위대한 요구자료 폭탄. 국회의원 요구자료, 시의원 요구자료.
정치 뉴스에서나 보던 사람들이 정책 입안을 위해 또는 모종의 이유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자료를 요청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수업료 현황제출…? 3개년이나…? 기한은 내일……? 내일까지 어떻게 하라고.”
아직 자료를 다 모으지도 못했는데 3개년치 자료를 내일까지 내라는 야박한 요청 공문이었다. XXX 시의원이었다. ㅁㅁㅁ국회의원은 다른 건으로 또 5개년치 자료를 내일모레까지 내라고 요청해 왔다.
“이거… 밤새서라도 해야……겠는데…?”
나는 업무 파악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모은 자료를 급하게 정리까지 해야 했다. 그나마 최노루 선배가 준 걸로 몇 개는 금방 해결될 것 같았지만 5개년치를 요구하는 것들은 쉽지 않았다.
“… 저 혹시 PC 비밀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내 사정을 알고 있는 다른 팀원들은 흔쾌히 알려주었고, 나는 모두가 퇴근하고 홀로 빈 사무실에 앉아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자료를 찾아 헤맸다.
그때였다.
띠리리링- ♬
“어, 여보세요?”
-토끼야. 네가 말한 거… 가져왔어.
그는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정문이야? 바로 나갈게.”
결국 남자친구 독수리도 소환했다. 그는 1시간 반 거리를 달려 USB에 PC 복구프로그램을 담아가지고 왔다. 마치 비밀 요원 접선하듯 우리는 어두운 밤, 본청 정문 앞에서 마주했다.
“여기 있어. 이 USB를 꽂고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봐. 잘 안 되면 전화해.”
“멀리까지 와줘서 고마워….”
“어서 가봐! 난 근처 카페에 있을게!”
우리는 곧 못 만날지도 모를 전우처럼 깊은 포옹을 한 번 나누었다. 터덜터덜 가로등 불빛 사이로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어딘가 아련했다.
나는 감상에서 깨어나 사무실로 뛰어들어갔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컴퓨터에 USB를 꽂고 그 안에 든 파일을 실행시켰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제발, 복구되기를. 그렇게 컴퓨터에 능한 자가 아니기를.
“이럴 때 공대생 남친 버프 좀 받아보자...뭐야,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나는 독수리에게 다시 전화했다.
“실행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
-흐으음… 그러면…….
그는 다른 프로그램을 연 다음 무슨 명령어를 입력하라고 시켰다. 문외한이라서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시키는 대로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변하는 건 없었다.
“그래도 똑같은데.”
-너 전임자 엄청 치밀하네…. 그렇게까지 싹 포맷을 했다고?
“그럼 자료복구 못해?”
-완전히 밀어버렸는데 어떻게 해. 이건 빌 게이츠 할아버지가 와도 못해.
나는 그대로 좌절하고 말았다. 책상에 엎드려서 울고 싶었다. 순진하게 이전 컴퓨터에 자료가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이게 오늘 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우리 회사에서는 이렇게 삭튀하면 바로 징계 먹고 사퇴당해.
나는 더 좌절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 뒤로 사방팔방 모든 팀원들의 컴퓨터를 다 켜서 폴더들을 다 뒤져보았다. 기다리고 있을 독수리가 마음에 걸려 다람쥐가 재빠르게 도토리 모으듯 모으다 보니 5개년치 정도는 어떻게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다.
“오빠, 근데 나 시간이 더 걸릴 거 같아서. 그냥 집에 먼저 가. 미안해.”
-떼잉…. 알았어.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말고!
“끝나면 바로 전화할게! 오늘 고마웠어!”
그대로 전화 통화를 끊고 야박한 제출 기한들로 점철된 자료들을 작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지원청에서 구르고 구른 구력이 있다고. 이쯤이야!”
다 끝내고 나니 거의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곳에는 지원청에서처럼 이제 그만 나가달라고 재촉하는 당직 기사는 없는 모양이다. 차례차례 결재라인을 설정하는데 어쩐지 눈앞이 좀 침침하고 어질어질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자아, 결재 다 올려놨으니까, 어서 집에 가자.”
이제부터는 모은 자료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업무 파악을 해가면 그럭저럭 이 사막 같은 곳에서도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서 일하든 출근 첫날은 스펙터클했지만 이렇게 스릴러 물 같았던 하루는 처음이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난 이제 집에 보내달라고 엄마를 찾는 징징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난 어떤 일에도 의연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 다녀왔습니……으으.”
집에 오자마자 긴장이 탁 풀리면서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렸다.
“… 토끼야!”
엄마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To be continued-
[Behind the Scene]
1. 이번 화에 김토끼의 남자친구가 최초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구남친이 되어버린 저희... 편집장님이십니다. 자꾸 자신을 차은우처럼 묘사해 달라고 하는데 커트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김토끼 시리즈는 글자수가 4000자가 넘는데 님을 차은우처럼 묘사해 줄 틈은 없다고 했더니 시무룩해하며 자러 갔습니다.
2. 공직에서는 삭튀가 정말 종종 있는 일입니다. 저 때는 운이 좋아서 이리저리 모아 대충 복구가 가능하지만 만약 학교에서 근무하는데 전임자가 삭튀하고 떠나면 어디 복구할 구멍이 1도 없습니다. 이건 본청이기 때문에, 그리고 업무 특성상 큰 사업 하나를 여러 명이 나눠서 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이런 식의 도토리전법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웬만하면 삭튀하지 맙시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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