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미생에게 완생의 길은 어디에 있나요?
본 에세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허구로 등장하는 모든 이름(기관명, 지명, 인물명 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무원은 비밀유지의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정보 및 민감정보 외에는 모두 실화입니다. 퇴사를 꿈꾸지만 아직은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저희 기관장님을, 저의 모든 동료분들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으음…….”
눈을 떠보니 병원인 것 같았다. 엄마는 안쓰럽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이 들어? 다행히 큰 이상은 없대. 그래도 일단 오늘은 하루 휴가를 내는 게 좋겠어.”
“으음… 안 되는데.”
머릿속으로 끝없는 요구자료와 파악해야 할 업무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하지만 숟가락 하나 쥘 힘이 없었기 때문에 간신히 팀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몸이 안 좋아 부득이 하루만 병가를 내겠다고. 팀장님은 쿨하게 몸조리 잘하라고만 했다.
그렇게 쉴 수 있을 줄만 알았다.
띠링.
박수달: 쌤, 몸은 괜찮아요?
팀 서무를 맡고 있는 수달이 톡을 보내왔다.
김토끼: 오늘 하루 쉬면 괜찮을 것 같아요.
박수달: 병가 냈는데 미안해요. 내일까지 우리 팀 전체 업무에 대해 설명하라는 요구자료가 와서요. 쌤 파트는… 작성해서 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 정도는 나의 옆자리 선배인 최노루도 할 수 있을 텐데. 역시 본청이라 그런지 내 일과 내 일이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확실한 모양이다.
급작스레 병원에 온 것이라 나는 어떤 자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병가 올린 것을 취소하고 나는 부득부득 출근을 감행했다.
“아니, 병가라며 어떻게 왔어?”
“요구자료 내일까지 내라는 게 있다던데요.”
“아아, 그거 별거 아닌데. 다른 사람한테 대신해달라 하지.”
팀장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다. 막상 와보니 별로 중요한 자료가 아닌 듯했다. 박수달의 연락만 봐서는 당장 안 하면 큰일 날 것 같았는데. 선배 최노루는 입모양으로 ‘괜찮아요?’ 하고 묻더니 얼른 모니터로 얼굴을 돌렸다.
“쌤…나 때문에……미안해요.”
박수달은 슬쩍 내게 탕비실 간식을 내밀며 속삭이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최종 수합자로서 어쩔 수 없었겠거니 생각하고는 꾸역꾸역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는 몸이 따라주지 않아 급한 일만 처리하고 병조퇴로 복무를 바꾼 다음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젠 진짜 쉴 수 있을 줄 알았다.
띠링.
또 그녀였다. 박수달.
박수달: 쌤…자리로 전화가 오늘은 좀 많이 와서. 착신 돌려놓아도 될까요?
이것도 최노루가 대신 답변 할 수 있을 텐데. 아니면 내일 전화하라고 해도 되고. 내 자리에 그렇게 전화가 많이 오지 않는데, 무슨 일일까.
내가 뭐라고 답장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사이 그녀는 또 톡을 연속으로 보냈다.
박수달: 팀장님이 혹시 가능하면 착신 돌리래요. 미안해요….
김토끼: 네, 알겠습니다.
박수달: 아픈데, 미안해요! 푹 쉬세요!
그 뒤로 계속 착신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침을 집에 가져갔던 게 신의 한수였다.
“아니, 너네 팀은 직원이 너밖에 없니? 뭔 사람을 쉬지도 못하게 해?”
보다 못한 엄마가 답답한 듯 내 방에 들어왔다.
“… 몰라. 엄마가 대신 좀 받아줄래? 내일 전화하라고.”
“그래, 알았어.”
나는 엄마에게 전화응대 멘트와 내일 전화하라는 문구까지 적어서 주었다. 그제야 아무 생각 없이 잘 수 있었다. 독수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대폰도 꺼버렸다. 왠지 휴대폰을 열면 또 박수달에게 연락이 와 있을 것만 같았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본청에서의 삶은 이상하게 버거웠다. 처음에 사람들은 친절해 보였으나 진심으로 친절하지 않았다. 나는 그럼에도 다가가려고 노력했지만 내가 관심 없어하는 주제를 기가 막히게 꺼내서 그들끼리만 하하 호호 즐거웠다. 나는 끼어들고 싶어도 애써 그림처럼 웃기만 할 뿐 끼어들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운동이 대표적이었다.
“러닝 어플에 친추했죠? 쌤이 독려하기 눌러가지고 운동 째려다가 나갔잖아요.”
박수달이 최노루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까르르. 못 째 못 째. 몸은 떨어져 있어도 같이 뛰는 거야~”
“…무슨 어플이에요?”
나는 용기 내어 끼어들어보았다.
“아… 이거 같이 뛰는 거 기록하는 어플인데… 쌤도 할래요?”
최노루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웬만해선 나도 하겠다고 하고 싶었지만 난 뛰고 싶지 않았다. 남들보다 폐활량도 약했고, 운동엔 영 젬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점 더 나는 묘하게 소외되었다.
“엇… 설마 또 요구자료……? 아, 아니구나.”
결재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움찔거렸다. 모든 걸 계획적으로 하길 좋아하는 나로서는 불시에 들어오는 과제가 스트레스였다. 요구자료는 밤낮구분도, 평일주말 구분도 없었다. 갑과 을의 관계란 이런 것일까. 갑자기 주말에 출근하는 것도 부지기수였고 독수리와 만날 약속을 잡는 것도 애매해졌다.
“하… 이게 뭐지.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네.”
출근하기가 참 싫었다. 출근해서 자리에 앉으면 이상하게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야속하게도 업무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지원청에서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업무 내용이 친숙했기 때문이다. 숙지해야 하는 기능들도 반복적으로 질문을 받다 보니 금방 숙달됐다.
이때만큼 업무가 나에게 쉬웠던 적은 없었다. 업무내용만큼은 딱 내가 원하는 강도로, 내가 원하는 정도의 보람, 신의 직장이라고 할 만했다. 딱 그것만.
그 외에는 이런 지옥이 따로 없었다. 차라리 의자를 던지던 민원인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나 혼자만 느끼는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학교에서 느끼던 외로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 같이 모여있지만 모래알처럼 알알이 흩어지는 이 느낌. 신발에 모래가 들어가면 은근히 아프듯이 부정적인 감정이 조금씩 나를 갉아먹어갔다.
어떻게 풀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게 다 짜증이 나는 데다가 난 힘이 없었다. 이때 독수리가 가장 큰 피해자였다.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독수리에게 풀다 보니 내 눈에는 사사건건 독수리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한 채 나에게 이별을 선언했다.
“나,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어. 미안해.”
당시에는 그를 잡을 명분도, 힘도 없었기 때문에 그를 보내주었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나의 우울은 극에 달했다. 일하다가 혼자 괜히 눈물이 톡 쏟아지기도 했다.
나는 박수달에게 먼저 다가가 탕비실에서 얘기 좀 하자고 불렀다. 그녀는 나의 말을 끝까지 귀담아 들어주는 몇 안 되는 동료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생각보다 더 쉽게 그녀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쌤……저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 너무… 슬퍼요.”
“어머, 어떡해. 근데 쌤, 저도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우리 완전 찌찌뽕이다.”
그녀는 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더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곳에서도 내 편인 사람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녀는 나를 위로해 줘야겠다며 갑자기 저녁 약속까지 잡았다. 최노루와 다른 또래 팀원까지 껴서 4명이 번개처럼 모였다.
“왜왜, 어쩌다가 헤어졌는데.”
“세에~상에. 빨리 새 남자로 잊자, 잊어.”
갑자기 나는 박수달과 함께 여의도 러닝크루에 충동적으로 가입하게 되었고 이제야 나도 그룹에 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 본청에서의 나의 삶은 좀 안정된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냥 직장인이기에 피곤한 것치곤 난 계속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몸살 난 것처럼 아프고 기운이 없었다.
꾸준히 병원이라도 다녀보려고 유연근무를 신청해 보았다. 남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하여 30분 일찍, 5시 30분에 집에 가는 것이다. 내가 오자마자 아팠던 이력 때문에 나의 유연근무 결재는 손쉽게 이루어졌다.
“저 이만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어어, 근데 쌤 오늘은 빨리 퇴근 못해. 건물 폐쇄됐다던데?”
“네……?”
본청 근무의 또 다른 복병이었다. 건물 폐쇄. 으레 국회의사당 앞에서 수많은 시위대가 진을 치고 시위하듯이 본청 앞에서 시위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뭔가 부당하다고 개선을 촉구했다. 심한 경우에는 경찰 버스까지 출동하곤 한다. 하필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다들 창가에 달라붙어 바깥을 확인했다.
“경찰버스 왔다. 망했다.”
“집에 갈 수나 있으려나 몰라.”
나는 확실하게 집에 갈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하여 몰래 1층에 내려가보았다. 정말 셔터 문이 내려져 있었고, 마치 건물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정문 유리문 밖에는 시위대가 돗자리까지 펴놓고 아예 드러누운 듯한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참나. 병가를 내도 쉴 수 없고, 퇴근을 해도 집에 갈 수 없다니. 뭐 이런 데가 다 있지?”
나는 아직도 이곳에서의 생존법을 터득하지 못한 미생이었다.
-To be continued-
[Behind the Scene]
1. 이제 글쓰기가 어려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제가 당연히 너무 안일하게 대했던 점, 그냥 사람 자체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것들... 그런 것들이 다 문제였더라고요, 돌이켜보면. 아쉬워요. 더 프로답게 지내지 못해서. 독수리와의 연애사는 나중에 새 브런치북으로 엮어나갈 예정이라 여기서는 아주 가볍게 다루고 넘어갑니다. 그는 정말 할많하않 차은우(?)랍니다.
2. 이제 김토끼 이야기도 한.. 4화 정도 남은 것 같아요. 해야 할 이야기들이 참 많이 있지만, 아무래도 정치적 이슈 등 쓸 수 있는 이야기가 한정적이더라고요. 완결까지 힘내서 같이 달려주세요!
3. 네이버 공모전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무려 한 달 동안 해요. 저는... 좀비처럼 첫 페이지에 살아있다가 뒤로 밀려나갔습니다.
지금은..조작단한테 밀리고 있네요.
여러분의 방문과 별점이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