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라!
본 에세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허구로 등장하는 모든 이름(기관명, 지명, 인물명 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무원은 비밀유지의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정보 및 민감정보 외에는 모두 실화입니다. 퇴사를 꿈꾸지만 아직은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저희 기관장님을, 저의 모든 동료분들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렇게 나는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본청 경력직인 동기언니 사슴에게 메신저를 날려보았다.
김토끼: ㅎㅇㅎㅇ 우리 퇴근 진짜 못해?
이사슴: 기다려봐 중생아
김토끼: 무슨 뜻이야?
이사슴: 사장님은 집에 안 가고 싶겠니?
본청의 위엄이 느껴지는 또 하나의 포인트. 바로 교육감과 한 건물에서 근무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정치 뉴스에서나 보던 사람을 우연히 오피스 로맨스물에서 남자주인공 마주치듯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도 그런 뼈 아픈 경험이 있다.
어느 출근길 아침, 나는 늦을까 봐 헐레벌떡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은 멀뚱멀뚱 딴 데만 쳐다보며 양보를 해주었기에 가능했다.
알고 보니… 교육감님이 타고 있었다. 본청생활 쪼렙인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그 불운의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바쁜데도 타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는 애써 땀을 닦으며 시선을 1시 방향으로 돌렸다.
“오늘 하루도 수고해요.”
나는 조용히 인사를 하고 내리려 하니 교육감님이 인자한 목소리로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최악의 30초였다.
나는 얼른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회상에서 빠져나와 다시 열심히 답장을 보냈다.
김토끼: 당그니 퇴근하고 싶겠지
이사슴: 어차피 저들의 타깃은 사장님이야. 사장님 없으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과 단톡방이 시끌시끌했다. 과 서무가 공지를 띄웠다.
띠링-
사장님 퇴근 완료. 이제 퇴근 가능합니다. 과별로 10명씩 눈치껏 1층으로 내려가세요.
무슨 미션지 같은 공지였다.
김토끼: 공지 떴다. 사장님 퇴근 완료라는데?
이사슴: 이제 능력껏 흐름 타서 퇴근 잘해봐 ㅂㅇ
김토끼: 언니는 퇴근 안 해?
이사슴: 본좌는 할 일이 태산인데 뭔 퇴근이냐. 퇴근은 너 같은 한량이나 하는 거지
김토끼: 나도 바쁘거든?
이사슴: 난 네가 6시 이후에 남아 있는 걸 본 적이 없도다~ 본청에 그런 개꿀 자리가 있는지도 몰랐도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이곳에서는 정말 늦게까지 할 만한 일이 딱히 없었다. 요구자료를 ‘불시에 지금 당장’ 내라는 게 유일한 흠이었다. 근무 시간 내에 오는 모든 것들은 다 쳐냈기 때문에 나는 늦게까지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최노루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퇴근하겠다고 알렸다. 노루는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나는 우리 과 퇴근 무리에 조심스럽게 합류했다. 정말로 각 과별로 한…10명 정도씩 건물 뒤편 개구멍으로 안내받았다.
단체로 마치 은행금고털이범처럼 엉금엉금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른 속도로, 말없이 움직였다. 겉보기엔 1층 ‘비상 정비실’이었지만 그곳에 탈출구가 있었다.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문처럼 생긴, 그 문을 여니 바로 바깥세상이 보였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나는 눈치게임에 성공하여 가장 빠른 퇴근 무리에 합류하여 퇴근했다. 과 단톡에는 괴로운 아우성이 이어졌다.
ㅇㅇ: 이럴 수가… 개구멍 다시 닫혔대!
ㅇㅇ: 다음 타임을 기다려야지 뭐
“퇴근길도 티켓팅하듯 해야 하다니. 이게 무슨 직장이람….”
그날따라 퇴근 길 밤공기가 서늘했다.
다음날.
나는 유연 근무자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일찍 출근한다. 본청의 수문장처럼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에 혼자 앉아 일을 하는 것은 꽤 여유롭고 낭만적이었다. 눈치 볼 일도 없고 유일하게 내가 숨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업무는 이 시간에 해결이 가능했다.
“아침엔, 라테지. 보고 싶다, 주무님.”
본청에 일하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칠 수 없었던 주무님. 나는 그녀를 추억하며 매일 아침 똑같이 라테 한 잔을 들이켰다.
“오늘은… 진짜 가볼까……?”
나는 지원청 담당자들에게 보낼 단체 공지 문자를 작성하면서 딴생각을 했다.
이별이란 아프고 괴로운 것이고, 낯선 것도 아니었지만 독수리와의 이별은 이상했다. 이별은 내게 익숙한 것이었는데 아파도 너무 아팠다. 그 공허함이 차원이 달랐다. 그런 데다가 나의 연애에 일평생 관심이 없던 할머니조차도 갑자기 전화를 거시더니 으름장으로 놓았다.
“너……그 녀석 잡아서 데려오지 않으면 다시는 너 안 볼 거야! 네 짝은 그 녀석이야!”
“아니, 이미 헤어졌다니까요.”
“어떻게든 다시 합쳐! 끊어!”
오늘 조퇴를 할 수 있는지 일정을 살폈다. 꼭 송금해야 할 지원금도 없었고, 들어온 요구자료는 이미 다 작성해서 결재 상신을 해놓은 상태다. 회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회 일정이 있지도 않았다. 업무 중에 갑자기 뭔가 들이닥치지 않는다면 조퇴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조화로운 하루였다.
나는 주변을 휘휘 한 번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조퇴 복무를 올렸다. 병원을 핑계 삼아. 그리고 박수달을 포함하여 주변인들에게 괜히 더 아픈 척을 했다. 쿨한 팀장님은 조퇴 결재를 해주었고, 요구자료도 더 오지 않았다.
“수달쌤, 저 아파서 오늘 조퇴해요. 혹시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줘요.”
“알겠어요, 쌤. 몸조리 잘해요!”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어깨를 토닥여줬다. 역시 우리 팀에서 내 편은 그녀뿐이다.
나는 후닥닥 차에 몸을 싣고 독수리네 집 근처로 향했다. 조퇴 카드를 썼음에도 퇴근길 교통체증과 맞물리며 그의 집까지 가는데 차로 약 3시간 정도가 걸렸다. 운전 중에 나는 그에게 의미심장한 톡을 하나 보냈다.
김토끼: 지금 어디야?
인터넷에서 본 ‘회심의 재회 방법’의 1단계였다. 잘 지내 어쩌고 하지 말고 다짜고짜 어디냐고 하면 상대방이 설렐 거라고 했다.
만약 독수리가 날 차단했거나 답장하지 않는다면 그의 집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려볼 셈이었다. 어쨌든 노력이라는 걸 해보자는 의미에서. 그런데, 마치 내 연락을 기다렸다는 듯 그는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독수리: 회산데, 왜? 무슨 일이야?
“뭐야…. 왜 이렇게 아직도 다정해?”
나는 짤막하게 또 ‘회심의 재회 방법’ 대로 다음 단계 답신을 보냈다.
김토끼: 할 말 있는데, 퇴근하고 집 앞 카페에서 잠깐 만나.
그는 또다시 칼같이 답장을 했다.
독수리: 알았어.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안고 주차장처럼 움직이지 않는 도로 위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내가… 살면서 별 짓을 다해보네.”
나는 그 와중에 또 혹시나 박수달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웬일인지 오늘따라 그녀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요구자료 어택이 없는 모양이다. 곧 하반기 일정의 꽃인 국정감사와 행정감사가 코앞인데 참으로 이상한 날이었다.
카페 안.
독수리는 오늘따라 칼퇴를 한 것인지 헐레벌떡 늦지 않게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한 멘트를 날렸다.
“그… 일전에는 내가 미안했어.”
“…응?”
“나만 생각하고 내 맘대로 행동했어. 나 이제는… 달라져볼게. 우리 다시… 시작하면 어떨까?”
독수리는 한참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재회하면… 꼭 똑같은 이유로 헤어진다는데.”
“나도 알아. 그럴 거였으면 내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이 또한 독수리라면 할 만한 반박이라고 생각하여 난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그러자 독수리도 뭔가 생각이 바뀌었는지 냉큼 내 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으며 안겼다.
“나도 미안해. 사실 내가 먼저 잡으러 가려고 했었어.”
그 말에 나는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리며 가만 안겨있었다. 카페에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마 개꿀잼 팝콘각 모먼트였겠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었던 그였지만, 그가 내 인생에 다시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비로소 내가 완전해졌음을 느꼈다.
나는 이제 일도, 사랑도 다 잡았기 때문에 내 인생에 고난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기회가 닿자 탕비실에서 박수달을 만났을 때 그녀에게 마치 비밀이야기처럼 조심스레 나의 기쁜 소식을 정했다.
“쌤……저 남친이랑 재회했어요!”
“어…? 정말요……? 축하해요!”
순간 그녀의 손에 들린 머그컵이 덜컥 흔들렸다. 축하의 미소를 짓긴 했지만, 기쁨의 반달 눈동자가 반 박자 늦게 따라왔다.
나는 그 미묘한 틈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저,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헤헤.”
“진짜 진짜, 축하해요 쌤.”
사랑을 되찾은 대신, 직장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메말라갔다.
-To be continued-
[Behind the Scene]
1. 제 인생에 가장 후회되는 일을 꼽자면 1) 본청에 가겠다고 한 것 2) 독수리를 잡으러 간 것
제가 왜 그랬을까요? 왜 독수리를 잡으러 그 먼 길을 떠나서 그 고생을 해가면서 그랬을까요? 지금 그놈의 독수리는 '우리가 언제 헤어진 적이 있었어? 벅벅'을 시전하고 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척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없는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요....
2. 최상위기관에 온 김토끼의 직장생활을 기대하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삼삼한 죄송한 말씀을 전합니다. 사실... 정말로 업무자체로만 봤을 때는 제 취향이었고, 업무분장도 확실하고 저랑 잘 맞았습니다. 업무 내용은...크게 재밌지도 드라마틱하지도 않아요. 사람들만 괜찮았다면 유예하고 좀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너무 지쳤었고, 이제 제가 많이 아파지는 내용도 나옵니다. 지금도 저는 우울증을 앓고 있어요. 물론... 산후우울증이라고는 진단받곤 있지만, 그동안 쌓아온 게 터졌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