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세하게 묘사하기

2강) 그리듯이 쓰기 연습 - 1시간 타임어택

by 회색토끼

한 여자가 핑크색 티셔츠에 흰 바지를 입고 서 있었다. 긴 머리에 밀짚모자까지 알뜰하게 챙긴 것으로 보아 그녀는 이 곳에 단순히 방문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여행하겠다고 다짐한 눈치였다. 손에 들린 하얀 재킷은 흰 바지와 맞춘 것처럼 새하얬다. 평소 칙칙한 사무실로 출근하는 길이었다면 절대 고르지 않을 조합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묘미일지도. 나의 일상에서 벗어나, 내가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을 해도 모든 것이 의미가 맞아 떨어지는 낯선 공간과 분위기. 하지만 굳이 손에 하얀 재킷을 들고 있고 입지 않았다는 것은 현재 날씨가 너무도 화창하여 재킷을 입기에는 덥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녀는 사각형 꼴의 미로 같은 화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 중앙에는 고대 유물과 흡사해 보이는, 둥근 원형의 화분이 놓여있었다. 그 위에는 잔디처럼 짤다란 풀 사이사이 또 알록달록 조그마한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미로 모양의 화단에도 비슷한 색상의 꽃들이 옹기종기 피어있었다. 마치 꽃 속에 또 꽃이 있어서 이 미로는 꽃이 꽃인지 꽃이 나인지 자아와 물성이 하나되는 느낌이 든다. 여자는 당차게 한 걸음 내딛으려고 하지만 프레임 안에 담기기 위해 나머지 한 발을 미처 옮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앞서나가고 싶은 의지를 찰나의 동작으로 담았다. 미로의 정 반대편에는 이를 구경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왔다갔다 지나다니고 있었다. 정 반대편에서보는 미로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그 쪽에서는 사람의 키보다 훨씬 더 큰 푸르른 녹음의 나무가 보인다. 단순한 한나무는 아니고 그 끝에는 장미처럼 보이는 오색빛깔 꽃들이 듬성듬성 매달려 있었다. 가지에 매달린 나뭇잎들은 그 무게를 견디기 쉽지 않은 듯 아래를 향하여 뻗어내려간다. 어쩌면 여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오묘한 모양의 화단이 아니라 그 가느다란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작은 꽃봉오리일지도 모른다. 그 꽃봉오리 중 일부는 샛노랗고 일부는 붉은 빛을 띠어 각양각색이었다. 무엇보다 그냥 나무겠거니싶었던 식물이 실은 꽃이었다면 그쪽으로 시선이 끌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화단 저 너머에는 고대 그리스 성전 같은 기둥이 일정하게 세워져있다. 어쩌면 수녀들이 이 복도를 걷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별다른 인테리어가 아님에도 베이지색의 빛바랜 대리석 벽은 그 웅장함에 심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또 갈색 둥근 화분이 일정한 가격으로 놓여있었다. 화분에는 하늘로 불만을 표하는 듯 뾰족뾰족한 나뭇잎들로 구성된 이름모를 식물이 심겨있었다. 야자수의 나뭇잎 모양 같기도 했다. 손을 뻗어 그 나뭇잎의 끝에 손가락을 갖다댄다면 퍽 따가울 상이다. 그건 그러나 여자만의 상상이 아닌 듯했다. 마침 그 화분을 발견한 또 다른 여자가 검지손가락을 펴고 용기있게 그 끝의 날카로움을 향해 겨누었다. 연보랏빛 셔츠에 베이지색 하늘하늘한 바지를 입은 그 여자 또한 이 곳을 처음 방문하는 여행객일 것이다. 생각보다 따가운 햇살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 반대편에 서 있는 여자는 어쩌면 아래로 흘러내리는 꽃봉오리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에 선글라스 낀 여자를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는 햇빛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밀짚모자가 있지만 밀짚모자를 쓰는 바람에 앞머리가 망가지는 수모를 겪어야하지만 저 여자처럼 산뜻한 선글라스 하나를 챙긴다면 머리스타일도 챙기고 얼굴 표정도 신경쓰지 않아도 충분히 예쁜 사진을 건질 수 있는 '여행객 룩'을 충분히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자가 크로스로 매고 있는 코랄색 가방이 또 눈에 띄었다. 연보랏빛 셔츠와의 매칭은 나쁘지 않았지만 둘 다 파스텔 톤이었기 때문에 어딘가 팍 주인공처럼 꽂히는 부분이 없다. 밀짚모자를 쓴 여자는 평소에 코랄색을 좋아했기 때문에 크로스로 간편하게 맬 수 있는 저 가방은 어디서 살 수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지만 그럴 용기는 차마 없다. 그녀가 미처 떼지 못한 나머지 한 걸음은 아마도 그 망설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여자의 뒤로 똑같이 선글라스를 낀 중년의 남성이 뒤따르고 있다. 둘 사이의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 거리는 그들이 왠지 부부일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의외로 부부는 연인과는 다르게 손을 꼭 잡고 걷기 보다는 오히려 한 걸음 떨어져서 각자의 독립성을 존중해주는 편이다. 남자의 손에는 파란색 브로셔가 둘둘 말려져있었다. 그 모습에 이미 파악될 대로 파악되어 버린 이 장소에 대한 정보가 이제는 귀찮았으나 버리기엔 아깝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을 떠나지 못한 약소한 짐짝이 되어버린 형국이다. 그는 앞선 여자와 마찬가지로 크로스 백을 매고 있었으나 남자답게 무채색의 검은색을 골랐다. 크로스백을 멨는데도 불구하고 한 쪽 어깨에 흰 에코백을 또 다시 메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자의 짐을 최소화해주고 싶은 그의 삼삼한 한배려가 느껴진다. 어쩌면 짐은 남자가 좀 더 들어야한다는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자의 선글라스는 여자의 선글라스보다 그 알이 좀 더 크고 촌스럽다. 햇빛에 반사되어 가장자리의 일부분이 반짝인다. 남자의 선글라스는 그리하여 수경인지 지선글라스인지 헷갈릴 정도로 애매한 디자인으로 되어 있다. 젊은 남성이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을 디자인이었다. 그는 짙은 베이지색 바지에 연하늘색 바람막이를 대충 껴입고 있었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얇은 바람막이를 뚫고 보이는 뱃살 따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거나 살이 잘 찌지 않는 예민한 체질일지도 모른다. 그의 바람막이는 만지면 곧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이 남자와 여자의 한 이백미터쯤 앞에 또 다른 여자가 서 있다. 그 여자는 어깨까지 닿지도 않는 똑 단발에 새하얀 크로스백을 크로스로 매지 않고 팔에 대충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여기에 더불어 조금 더 짙은 하늘색 겉옷을 같이 들고 있었는데 밀짚 모자를 쓴 여자와 마찬가지로 예상외로 더운 날씨에 그 겉옷 또한 불필요한 짐으로 전락해버린 게 분명하다. 여자의 앞에 심어져 있는 팬지 꽃은 어떤 규칙성은 없어보였다. 개나리보다 조금 더 짙은 노란색 꽃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꽃잎은 만져보았을 때 너무나 여리고 반질반질하여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사삭 찢겨나갈 것처럼 연약해보였다. 중년의 부부의 한참 뒤로는 어린 여자애와 그 여자애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일렬로 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금발에 빨간 뿔테 안경을 쓴 여자애는 이 모든 환경이 신기하고 재밌어보이는 듯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놓인 뾰족하고, 커다란 나뭇잎 형 식물에 주홍빛 꽃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꽃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손을 가져다 대며 그 꽃을 자세히 보고 싶어했다. 라일락처럼 강한 향기는 아니겠지만 어떤 독특한 향이 느껴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꽃잎은 미로형 화단에 심어져 있는 팬지 꽃처럼 유약하고 얇아보였다. 어린 여자애는 조금 더 진한 하늘색 반팔 티에 꽃무늬 핑크 치마를 입어 한층 더 나이대에 맞게 발랄해 보였다. 반묶음으로 질끈 묶은 중단발 머리로 보아 그녀는 하나로 묶자니 길이가 짧고 묶지 않고 있자니 시야를 방해하는 애매한 머리카락이 퍽 귀찮았을 것이다. 그럴 때 반묶음머리만큼 손쉬운 해결책은 없다. 그녀는 엄마보다 한 두세발자국 더 앞서서 걷고 있었는데 엄마보다도 이 공간에 대한 탐구욕과 흥미가 더 높아보였다. 흰 티셔츠에 가장자리가 길게 튿어진 긴 치마를 입은 엄마는 혹여나 아이가 다칠까봐 빠른 속도로 뒤쫓아가보지만 그녀의 에너지를 따라잡기에는 쉽지 않다. 그녀는 크로스로 가죽재질의 검은 가방을 매고 있었다. 중년 부분의 크로스백과는 달리 여행용 가방이라기보다는 좀 더 격식 있는 중저가 모델처럼 보였다. 웅장한 건물을 지지하고 있는 아치형 지붕에 뻗어있는 기둥에는 꽃처럼 보이는 는 애매하고도 난해한 문양이 이새겨져 있었다. 건물 내부에는 건물 벽과 같은 재질의 벽돌로 만든 조각물이 암모나이트 화석처럼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건물의 이층에는 군데군데 색이 벗겨진 연하늘 색 철제 창문이 열려있었다. 아마도 환기를 위해, 아니면 원래부터 열려져 있었기 때문에 왠지 안에서는 닫을 수 없을 만큼 창문이 고정된 된 채로 낡아가고 있었다. 창문의 양 옆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또 다른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겉에서 보았을 때 그 문은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건물 인테리어의 일부인지 알 수 없었다. 칠이 벗겨진 창문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옆에 있는 창문 또한 똑같이 열린 상태로 낡아가고 마모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는데 열려있는 게 그냥 이 건물의 원형으로 보는 게 맞아보였다. 문득 저 2층 창문으로 바라보는 화단의 모습은 어떨까 상상하고 싶어졌다. 큰 정사각형 안에 또 그보다 작은 정사각형이, 그 안에 또 작은 정사각형이 마트료시카처럼 쌓여 기하학적 무늬처럼 보일 것 같았다. 여기까지 정말 잘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혀버렸다. 더 무엇인가 쓰고 싶지만 여기서 더 쓴다면 그건 묘사가 아니라 그 장소에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버릴 것 같지만 그래도 끝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써보려고 한다. 건물 저 너머로 언뜻 하늘이 일부 보인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이 눈이 부시게 그저 새파랗다. 깊은 동해 바다를 그대로 하늘로 끌어온다면 아마 저런 색으로 보일 것이다. 하늘은 때론 군데군데 하얀 구름이 있는 것이 더 눈길이 갈 때도 있지만 아무것도 없이 온통 새파랗기만 하늘은 그 나름대로의 희소성 때문에 한 번더 올려다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렇게 게 썼는데 또 막혀버렸다. 아, 마지막으로 화단 밑에 바닥이 눈에 띈다. 바닥은 흙바닥에 나뭇잎이나 꽃잎이 화석처럼 쌓여있었다. 아 괴로워 그만 쓰고 싶다. 미로를 걷다가 막히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화단에 대해 마저 이야기하자면 화단은 덤불을 깎아 미로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잘린 덤불은 그 안에 핀 꽃들을 지켜주듯 강인하면서도 단단하다. ...난 이만 여기서 글과 함께 눈을 감는다. 꽥.



https://brunch.co.kr/@without258000/234

의 과제 일환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소설 기초 쓰기 숙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