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화. 직장인이 유럽여행을 가려면 며칠 휴가를 내야할까

연가 2개면 충분하다!

by 회색토끼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처음부터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부실한 몸뚱이를 가진 길치에게 여행은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돈 주고 하는 무모한 도전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결국엔 여행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공간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게 색다른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나를 자꾸 여행하게 만들었다. 예기치 못한 고난을 해결해 나가면서 성장하는 나를 보는 것도 좋았다.

몸이 부서져라 다니다 보니 ‘여행체력’이라는 게 생겼다. 여행지에서는 회심의 일격처럼 갑자기 HP 게이지가 특별하게 상승한다. 몇 만보를 걸어도 쓰러지지 않는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다음날 아침 일어나면 또 일어나 진다. 그렇게 나는 한시적으로 강해졌다.


공무원이 되면 내가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을 줄 알았다. 연가(일반 회사에서는 연차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도 내 맘대로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려고 공무원한 거니까! 그것은 나의 몹시 큰 오산이었다. 직원이 단 3명뿐인 학교 행정실에서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는 건 민폐에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여기저기 여행이나 다니며 갓생을 살려는 나의 위대한 계획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렇지만 내가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왔던 잡초 같은 사람 아니던가. 여행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연가를 최소한으로 쓰면서 언제 길게 여행을 갈 수 있을까.


명절연휴!


다만 명절연휴를 끼고 여행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앞뒤로는 다른 직원들의 명절 계획과 겹칠 수 있다는 점, 명절 시작일에는 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청춘들이 여행을 위해 떠날 궁리를 한다는 점, 수요가 높으니 가격이 그냥 웃돈 수준이 아니라 2배는 올라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유럽여행을 위해선 최소한 일주일은 필요했다. 보통 명절연휴는 매년 평균적으로 3~4일 정도였다. 즉, 럽으로 떠나기 위해선 적어도 연가 2개는 까야했다. 그럼 이 2개의 연가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까.


1) 명절 시작일 기준 앞에 이틀을 배치

예를 들어, 금토일월 이렇게 4일이 명절연휴라고 친다면 나는 수목 이틀 연가를 내고 수요일에 떠나는 것이다. 내 기준 이게 제일 베스트다.


연휴 전날 떠나는 꼼수는 다들 한 번쯤은 생각해 보는 지점이기 때문에 명절 시작일보다는 비행기표값이 조금은 떨어진다. 이틀 전에 떠나는 건 좀 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명절 특수에도 비행기표값이 평소랑 거의 비슷한데 약간 높은 수준에서 형성된다. 난 그 빈틈을 정확하게 조준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비행기표값은 비싸더라도 출발 비행기표값에서 많이 절약했으므로 총합으로 보면 그래도 합리적인 값이 도출된다.


2) 명절 연휴 앞뒤로 붙여쓰기

1) 안에 비하면 출발 비행기표값이 비싸지만 명절 끝나고 그다음 날 돌아오기 때문에 도착 비행기표는 조금 저렴해진다. 명절 끝났는데 남들보다 하루 더 쉰다는 용기만이 더 필요할 뿐이다. 그래도 앞뒤로 하루정도는 상사의 마음이 얼마나 너그럽냐에 따라 조금은 눈감아주는 편이다.



나는 스윽 행정실의 분위기를 살폈다. 1안이 가능할 것인가, 2안이 가능할 것인가. 타닥타닥 키보드 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가끔 달력을 힐끔거리는 눈길이 느껴진다. 모두가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실장님은 어느덧 무거워진 공기를 알아채시곤 먼저 위압감 있게 말을 꺼냈다.


“이번 설 연휴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드디어 시작된 눈치게임. 심장이 경주마처럼 두근거렸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혓바닥으로 침을 발라보지만 금세 메말랐다. 백기린과 나는 눈알을 굴려가며 때를 살폈다. 누가 먼저 1을 말할 것인가. 먼저 말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 동시에 말하거나 조금이라도 늦으면 지는 게임. 그녀는 눈에 힘을 주다가 팍 힘을 풀었다. 그래! 바로 지금이야!


“저는 이번에 여행 가려고 하는데요...”


눈치게임에 성공한 나는 1안을 획득해 냈다. 백기린은 부러움과 짜증남 그 중간 어드메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슬며시 콧노래를 부르며 복무 탭을 클릭했다. 아뿔싸. 연가 사유를 써야 하는구나. 차마 유럽여행이라고는 적기가 망설여졌다.

방학 때 교사들은 교육공무원법 제 41조에 의거 교원 연수라는 명목 하에 쉰다. 복무만 보면 그냥 방학이라 학생 따라 쉬는 게 아닌, 수업 내용 연구를 위해 체험학습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동유럽문화체험, 서부미주문화체험... 각종 문화체험이라 써도 복무의 종류가 연수라서 그럴싸하게 보인다. 교육행정직 공무원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방학에도 우리는 변함없이 출근해야한다. 그런 와중에 따낸 소중한 이틀의 휴가다. 잘 해내야한다.

어쩌지. 나는 한참을 연가 사유 칸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투닥투닥 입력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고향 방문

그래. 이 여행은 무려 파리로 IN 하여 로마로 OUT 하는 미친 일정의 여행이었다. 나는 프랑스의 파리, 이탈리아의 베니스, 로마까지 2개국 3 도시를 4박 6일 동안 돌 예정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모두들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안 그래도 유럽여행을 일주일 코스로 도는 것도 제정신이 아닌데 2개국을 간다니. 이동만 하다가 집에 올 거라고 악담 아닌 악담을 했다. 글쎄. 그건 가봐야 아는 거지.


그런 복잡한 여행 사정을 한 줄의 연가사유로 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문득 첫 번째 도착지인 파리에 눈길이 갔다. 불문과 출신으로서 프랑스는 마음의 고향이긴 하다. 설연휴와 딱 걸맞은 연가 사유라고 생각했다.


그날 퇴근 무렵, 교장실에서 전화가 왔다.


“김토끼 쌤, 교장실로 좀 와요.”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교장실에 갔다.


“마음의 고향이 대체 어디야?”

“... 파리요.”

“... 뭐? 푸하하하하하하!”


교장선생님은 한동안 계속 웃다가 결재버튼을 눌렀다.


“명절인데, 고향 잘 다녀와. 알겠지?”


그 뒤로 한동안 마음의 고향 사건으로 놀림을 받았다. 실장님께는 결국 혼났다. 연가 사유를 장난으로 올리면 안 된다고. 장난으로 올린 게 아니었는데. 그에게 나의 깊은 뜻을 설명하기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재 취소하고 다시 올릴까 여쭤봤지만 실장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재 취소까진 하지 마. 나중에 보고 두고두고 이불킥이나 하라고.”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프랑스에서 교환학생 신분으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5년 만에 학생에서 어른이 되어 다시 프랑스로 향했다. 튈르리 정원에서 먹던 아모리노 아이스크림이 아직도 있을까, 개선문은 그대로 있을까, 화이트 에펠을 볼 수 있을까. 정말 고향집 방문하는 기분으로 설렜다.

물론, 엄청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그땐 꿈에도 몰랐다.



[Behind the Scene]

1.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새 연재북으로 돌아왔습니다. 여행기는 제가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던 분야였습니다. 한때 여행사를 꿈꿀 정도로 철저한 계획형...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유순해졌습니다. 게다가 태생적인 날씨 악마라서 각종 사건사고와 함께 여행하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더 많이 여행할 수 있었는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때를 추억하며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가 보고자 합니다.

블랙코미디는 오피스물이 아니라 여행물에서도 있다는 것을 보여드립니다.

렛츠 기릿~!

2. 이 여행기는 단순히 개인의 체험일기가 아니라 여행시 팁도 함께 드리고자 합니다. 유럽여행 계획이 있으신 분들 모두 눈 크게 뜨고 봐주세요!



화, 수,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