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인형의 집 Part 2>, LG아트센터 (4/13)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공연이 시작한다.
유모 앤 마리가 나와 문을 열면 노라가 천천히 집으로 들어온다. 무대 위에는 주인공들의 이름이 크게 쓰여있는데,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름에 번쩍이며 불이 들어온다. 그 순서는 노라-토르발트-앤-에미-노라&토르발트 순이다.
최근 본 연극 중에서 대화의 미학을 가장 잘 보여줬다. 노라는 갑자기 나타나서 유모 앤 마리에게 자기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술술 털어놓는다. 이렇게 자기 자랑을 할 거면 뭐하러 돌아왔나 싶은 생각이 든다. 정확히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앤 마리가 묻는다.
'그러면 뭐하러 돌아왔어요?'
노라는 자신이 왜 돌아왔는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대화가 늘어질 틈이 없다. 노라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면 토르발트가 '당신은 이기적이야!'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답답해질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상대방이 주도권을 넘겨받는다. 인물들이 통통 튀듯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관계성이 드러나고 깊어진다.
연극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감정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주인공들은 조곤조곤 말한다. 한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면 상대방은 차분하게 응답한다. 다들 사과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할 말을 한다. 꿈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이상적인 대화다. 갈등을 언어로 풀어가는 방식이 너무 바람직해서 보다 보면 내 가슴이 다 따땃해진다.
사람들은 대개 분수를 모르고 집 나가는 여자는 비참하게 망가질 거라 냉소적으로 기대하지만, 노라는 얄밉게도 자기 인생을 사는 데 성공한다. 작가로 유명해지고 경제적으로 풍족하다. 한 판사가 그녀의 평판을 망가트리겠다며 협박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계속 그렇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성사되지 않은) 이혼 문제로 토르발트를 찾아온 노라는 자신이 두고 온 사람들을 다시 마주한다. 이제는 두고 가는 게 아니라 그들을 설득해서 자신의 삶을 살게 도와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인형의 집’의 페미니즘이 여성이 종속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갈 권리를 주장했다면, 인형의 집 Part 2는 그 이후를 다룬다. 여성이 홀로 주체적이어서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한 흔적이 역력하다.
입센이 개인은 어떤 방식으로든 억압받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만든 인물이 ‘노라’다. 그래서 그녀가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으로 희곡은 끝난다. 입센이 옹호하는 자유는 거기까지다. 그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다고 종용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책임이나 결과에는 침묵했기에 뒷일을 상상하는 건 후대의 몫이다. 노라를 여전히 사회적 메시지로 환원하면 그녀의 미래는 암울하고(세상이 녹록지 않으므로), 노라가 행복하길 바라면 이야기는 신파로 변질된다.
인형의 집 Part 2는 페미니즘을 통속적인 드라마로 만들어냈다. 드라마는 인물 간의 관계성과 갈등/화해에 중심을 두면서 정치적 이슈는 주변으로 밀려난다. 인형의 집 Part 2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것이다. 토르발트가 노라에게 여전히 순정을 고백하면서 이야기의 방향이 이상한 중년 로맨스로 빠진다. 노라와 토르발트의 싸움은 희극적인 부부싸움이고, (부부싸움의 레퍼토리를 그대로 차용한다) 토르발트는 그녀를 억압하는 남성이 아니라 한 때 평생을 약속했던 반려자이다.
‘당신이 나와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했다면, 상황은 이렇게까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어.’ ‘우린 대화가 필요했어’ ‘우리 사이에 나만 잘못한 건 아니야’ 등등 토르발트의 변명은 갑자기 이혼 서류를 맞닥뜨린 지금 남성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문제는 작품에서 토르발트는 섬세하지 못할 뿐 선하고 마음속으로는 노라를 사랑한 남자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는 흠은 있어도 미워할 수 없는 ‘착한 남자’다. 이 남성상이 지금 페미니즘 이슈 앞에 선 남성들이 기대는 나르시시즘적 자아로 보이는 건 왜일까?
남성들은 토르발트에 이입할 테고 왜 그런 남자와 사는 여자가 서서히 말라죽는지는 겪어본 여성들만이 이해할 것이다.
극작가의 의도가 뭐였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루카스 네이스)는 왜 노라를 15년이나 지나 집에 돌아오게 했을까? 노라가 버리고 간 것들과 화해하기를 바라서?
대화는 소통이고 노라는 너무 성급하게 떠난 것 같아서일까? 집으로 돌아온 노라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달래고 얼러서 자신과 대화하게 만들어야 한다. 노라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감정 노동을 수행한 것이다. 그렇게 이뤄진 대화는 효과적이고, 갈등은 해소된 것 같다. 토르발트와 노라는 서로 화해하고, 평생 피해왔던 딸 에미와도 재회했으며 앤 마리도 다시 노라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건 대화가 아니다. 집 안에서 대화는 화살처럼 일방적으로 노라를 찌른다. 그녀가 매정하고 이기적이었으며 차가운 사람이라는 비난이 힘을 얻는 건 가정 안에서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여자가 매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러겠는가? 말할 권리가 있는 건 남편이고, 버려진 아이고, 그녀의 책임을 넘겨받은 유모다.
대화와 소통이 갈등의 해결법이라는 믿음은 환상이다. 대화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인형의 집 Part 2가 해결되는 건 토르발트가 결국에는 관청에 이혼 서류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라는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 말하면 말할수록 자신만 지친다는 걸. 그녀는 딸 에미를 설득할 수도 없고, 앤 마리가 ‘깨어나기’를 강요할 수도 없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대화를 해도 토르발트는 언제나 그녀가 알던 그 토르발트일 것이다.
마지막에 노라는 세상에 거짓말하지 않겠다며 토르발트의 이혼 서류를 거절한다.
‘고맙지만, 됐어요 토르발트. 나는 이 곳에 와서 많은 걸 깨달았어요. 나는 용기를 얻었어요. 더 이상은 두렵지 않아요!’
그녀는 뭘 두려워했으며, 어떤 점에서 용기를 얻어간 것일까? 그녀가 평생 아이들을 그리워하면서도 연락하지 않은 것처럼, 노라는 자신으로 인해 아이들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떳떳하지 못한 응어리가 여전히 그녀 안에 남아 있다면, 진정 자유로운 여성 주체로 사는 일은 아직 완성된 게 아니다. 가족이 노라의 약점이라면 그녀는 마주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노라를 주눅 들게 한다면 다시 돌아가 자기는 이미 ‘못된 여자’가 되어 버렸다는 걸 알아야 한다. 대화는 소통이고 내가 상대방의 입장을 안다고 해서 그 입장을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후회와 잘못이 반복되는지.
그러나 애초에 상처를 가지고 잘잘못을 따졌다가는 온갖 사람들의 목소리로 인해 지구가 폭발하고 말 것이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집을 나가는 선택은 얼핏 극단적으로 보인다. 만약 토르발트가 좀 더 그녀를 인정하고, 노라에게 자기 직업이 있었다면, 서로가 좀 더 터놓고 대화했다면 저렇게 파국으로 끝나지는 않지 않았을까?
그녀의 선택을 의심하고 다른 방법이(더 ‘온건한’ 해결책) 있지 않았을까 따져보는 일은 ‘아, 헬메르.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죽어 버리는 거예요’라고 말하던 노라의 절박함에 대한 모욕이다.
노라는 이 ‘안전한’ 가능을 실험하기 위해 다시 한번 집으로 불려 왔다. 다행히 그녀는 똑똑하고 주체적인 여성이라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이 잘 만든 함정에서 가장 빛나는 건 누구인가. 간교한 설득의 논리를 간파하고 품위 있게 떠나는 사람은 누굴까. 이 연극이 유쾌하고 긍정적 분위기로 노라를 다시 ‘익숙한 공동체의 문법’에 포섭하려 할 때, 그녀는 굴하지 않고 다시 문을 나선다.
아주 강인하게 돌아온 듯한 노라의 어깨를 지탱하는 건 무엇인가. 그녀에게 필요한 건 애정이나 이해가 아니라, 회유나 겁박에 넘어가지 않을 의지다. 집을 떠날 용기, 다시 돌아올 용기, 다시 떠날 용기. 나는 노라가 자신의 반항을 마지막까지 홀로 껴안고 떠난 것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깝다.
딸 에미에게 노라가 말한 것처럼 ‘내가 너에게 주려고 한 세상’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면, 행복하기 위해 여전히 개인의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라면, 우리는 서로의 건투를 응원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