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여름
운동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건물 3층의 자판기 앞에 선 남자는 고민하고 있다. 백 원짜리인가 백 오십원 짜리인가. 맥스웰인가, 맥심인가. 그는 지금 땡전 한 푼 없지만, 꼭 커피가 먹고 싶다. 일단 자판기에 가면 누가 있을 줄 알았는데, 주변엔 아무도 없다. 어떻게 할까? 그냥 동아리방으로 가서 커피 좀 사달라고 할까? 뙤약볕을 가로질러 왔더니 목이 타서 얼음 띄운 물이나 먹어도 될 것 같았다. 돌아설까? 나중에 다시 올까? 1988년 여름, 남자는 자판기의 백 원과 백 오십원 버튼 사이에 손가락을 올려두고 고민하고 있다.
텔레비전이 올림픽과 한강의 기적으로 시끌벅적하던 그 해에 남자는 스물 다섯이 되었다. 훤칠한 키와 잘 뻗은 다리에서 어릴 때 육상 선수로 뛰었던 흔적이 엿보인다. 사람들은 홍콩 영화 붐이었을 땐 그에게 유덕화를 닮았다 말했고, 불란서 영화가 유행할 땐 알랭 들롱을 닮았다 말했다. 그의 뒷모습은 보기 좋은 외모를 갖고 살아온 사람 특유의 자신감을 망설임 없이 뿜어내고 있다.
이 남자는 잠시 이대로 두고, 시점을 조금 밖으로 돌리자. 자판기가 놓인 건물 밖에는 아직도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다. 건물로 들어오는 길엔 시들시들한 관상용 장미와 접시꽃이 피어 있고, 그 길을 두 여자가 걸어온다. 한 사람은 키가 작고 한 사람은 키가 크다. 둘이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같은 수업을 듣게 되면서 소소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되었다. 키도 크고 가슴도 큰 그 여자가 셔츠 자락을 파닥대며 건물에 들어가서 커피라도 마시자고 말한다. 키가 작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은 건물로 들어선다.
키가 큰 여자는 3층 자판기 앞에서 고민에 빠진 남자를 알고 있다. 신입생 엠티 때 처음 남자를 본 이후로 그녀는 남몰래 그를 흠모하고 있었다. 잘생기고 쾌활하면서도 나름의 매너가 있어 학과 여자애들 대다수가 그를 좋아했다. 키가 큰 여자는 건물 3층에 커피 자판기가 있었다는 걸 알았지만, 교수 겸용 휴게실이 있는 2층에는 대형 선풍기가 있었다. 그녀는 2층 휴게실 문을 열며 키가 작은 여자에게 말한다. “3층에서 커피 좀 뽑아다주면 안 돼? 내가 자리 맡아 놓을게.” 넓은 휴게실엔 드문드문 사람들이 있다. 키가 작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키가 큰 여자에게 가방을 맡기고 3층으로 올라간다. 그녀는 이제 맥심 커피를 뽑을 것이다.
맥심 커피를 뽑으러 온 키 작은 여자를 본 남자는 잠깐 놀란다. 그는 이 키 작은 여자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 그는 엠티 때 그녀를 처음 보고 나서 알게 모르게 계속 신경 쓰는 중이었다. 그녀는 매우 작은 키에 말수가 없었고, 눈에 띌 만한 미인은 아니었다. 술자리나 수다에는 관심 없이 공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그 공상에 잠긴 얼굴(나중에 그녀는 이 시기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았다 말했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을 그 얼굴)이 왠지 모르게 불란서 영화의 여주인공을 생각나게 했다. 어쨋거나 키 작은 여자는 그가 이 시골 대학에서 본 사람 중 그나마 가장 지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 들은 소문으로는 이 여자가 네 자리 수 계산도 암산으로 척척 해낸다는 데 똑똑한 게 틀림없다.
키 작은 여자는 남자에게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판기에 돈을 넣는다. 그는 맥심 커피를 기다리는 키 작은 여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본다. 남자는 모르고 있지만, 그의 젊은 마음 속에는 동기 여학생들의 목록을 둔 저울질이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키 작은 여자는 이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의 저울에 올라선다. 키는 작고, 얼굴도 별로지만 그녀는 똑똑해보인다. 그녀가 내 아이를 낳는다면 똑똑하고 잘생긴 아이가 나오겠지? 이 여자는 남자의 마음 속에서 은근한 자리하고 있던 키 큰 여자를 누르고 좀 더 높은 자리에 오른다. 키 큰 여자는 예쁘고 가슴이 크지만 좀 멍청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여자라면 꽤 괜찮겠네. 그의 2세 계획은 어렴풋했을 뿐 사실 남자도 결혼이 뭔지 모른다. 자기가 이 여자랑 결혼하게 될 거란 것도 모른다. 그는 이 여자를 보는 순간 다른 충동이 들었고, 커피는 별로 먹고 싶지도 않다. 해가 내리쬐는 자판기 앞에서 그는 커피를 들고 돌아서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천 원만 빌려줘. 꼭 갚을게.”
원래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천 원을 주고, 그는 이 일의 중요성을 모른 채로 절반은 작업을 걸기 위한 수작이었던 천 원을 받고, 레스토랑에서 그녀에게 밥을 사주고, 그녀는 자기가 이 남자의 것이라고 믿게 되고, 어쩌다보니 그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결혼식을 올린다. 나는 두 사람을 말리고 싶지만, 아무도 내 의견은 묻지 않는다. 이 순간 나는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똑똑하고 잘생긴 아들을 낳지 못해 그를 실망시킬 것이고, 그는 그녀가 원했던 다정하고 멋진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녀를 실망시킬 것이며,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상처와 거짓말과 사랑으로 점철된 세월을 지나게 될 것이다. 이젠 나도 그 세월을 피할 수 없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이미 알고 있어 내게 별로 신기하지 않다. 내 상상은 계속 자판기 앞으로 돌아간다. 미래의 키 작은 여자가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그 순간(내가 왜 천 원을 빌려줘서!)에 나는 그녀를 피신시키고, 키 큰 여자를 올려보낸다. 그녀가 커피를 뽑고, 그의 마음 속에서 고민을 불러일으켰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가 키 큰 여자를 레스토랑에 데려가, 결혼식장까지 골인했다면? 뭐, 나는 그 여자를 모르니 뭐라 할 말이 없다. 아마도 발육이 좋은 아이들을 낳았으리라. 내가 원하는 건 바톤을 그 아이들에게 넘기고 나 자신은 한 달에 한 번씩 사라졌을 난자의 일부나 되는 것이다. 모든 결혼이 그러하듯 상처와 실망으로 점철될 시간의 한 가운데에 있을 임무는 그 애들에게 넘기고 싶다. 그래서 이 키 작은 여자와 훤칠한 남자가 내게 낯설고, 특별할 것 없는 사람으로 지나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은 2021년, 기회는 놓쳐버렸다. 아무래도 지난 이야기를 되돌릴 방법은 없다. 대신 나는 다른 이야기를 쓰려 하지만, 어떻게 해도 키 작은 여자와 훤칠한 남자를 버릴 수 없다. 맥심 자판기 커피는 기이한 채무로 내 피 속을 흐르는 것 같고, 그 여자와 그 남자는 내가 쓰는 모든 글자에 스며들어가고, 나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서 내 엄마가 될 여자가 내 아빠가 될 남자에게 천 원을 빌려주었다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