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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다음 중국이 될 수 있을까?

<두 개의 인도> / 아쇼카 모디

by 세자책봉
인도 문제의 책임을 인도의 혐오스러운 카스트 제도에 돌리는 것은 쉽지만 잘못된 일이다. 인도가 딜레마에 빠진 것은 부패, 범죄자와 정치인 사이의 모호한 경계, 사회적 폭력이라는 보편적인 도덕적 실패의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 본문 중에서

네루부터 모디 총리까지 한 권으로 집대성한 독립 인도의 모든 것
인도, G3로 가는가 여기서 멈추는가

<두 개의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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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부 가짜 사회주의, 1947-1964

2부 폭력, 1964-1984

3부 약속, 1985-2004

4부 교만, 2005년부터 현재까지


저자 소개

작가 아쇼카 모디

인도계 미국인, 경제학자. 프린스턴 대학교 국제경제정책학과 교수. 개발경제학, 국제 금융, 거시경제 정책을 연구한다. 이 책에서 인도의 경제 정책과 산업 발전 과정을 강력히 비판하고 인도 경제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유럽국 부국장을 지냈으며 세계은행, AT&T 벨 연구소, 트리반드룸 개발 연구센터에서 일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교수로 재직했고, 프랑크푸르트 금융연구센터의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인도 공과대학교 마드라스 캠퍼스를 졸업하고 보스턴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유로의 비극>이 있다.





가수 이찬혁의 “힙합은 더 이상 멋지지 않다”는 노랫말처럼, 어느 순간부터 인도가 중국을 추월할 것이란 전망도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삼성과 현대차 같은 우리나라의 대표 기업들 역시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인도에 생산시설을 세우고 가동하고 있지만, 실제 경제적 수익을 따져보면 기대했던 만큼 시장이 활성화되지는 못하고 있다.


2025년 현재 약 14억 6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인도는 중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되었다. 단순히 인구만 보면, 인도 역시 중국 못지않은 성장 잠재력을 가졌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세계의 저명한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의 기대와는 달리, 인도는 아직 중국을 넘어서는 경제대국으로 도약하지 못했다. 경제신흥국답게 성장 속도는 빠르지만, 경제 규모, 개발 수준, 1인당 소득 등 핵심 지표에서는 여전히 중국에 크게 뒤처져 있다. 중국은 막대한 산업 기반과 국가 역량을 바탕으로 여전히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도는 세계 경제에서 존재감을 빠르게 키워가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한 현재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인도가 지닌 잠재력은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잠재력이 좀처럼 현실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프린스턴대학교 교수 아쇼카 모디는 『두 개의 인도』에서 바로 그 지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 책은 1947년 인도가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하던 순간에서 시작되며, 과거를 통해 오늘의 인도를 진단하는 역사서다. 작가는 역대 지도자들의 시선을 따라 인도 현대사를 조망하며, 이야기의 중심에는 사회 규범의 지속적인 침식과 정치적 책임 의식의 붕괴가 있다고 ‘서문’에서 밝힌다. 제목 ‘두 개의 인도’는 바로 이 경제적·제도적 실패로 인해 갈라진 양극화된 인도의 현실을 상징한다.


오늘날 인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은 다섯 명이다. 독립 이후 인도의 방향을 설계한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 인도 민주주의에 깊은 상처를 남긴 그의 딸 인디라 간디, 비행기 조종사 출신으로 어머니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라지브 간디, 힌두 민족주의 정치의 문을 연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그리고 2025년 현재 인도를 이끌고 있는 나렌드라 모디가 그들이다.


인도 독립 직후 초대 총리를 맡은 자와할랄 네루는 계획경제와 국영 산업 중심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국가 주도의 중공업화, 강력한 관료체제 구축, 중앙집권적 통제에 집중하면서, 서구식 자본주의와는 다른 인도식 발전 모델을 구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인도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과학과 기술에 매료된 네루는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종사하던 농업을 소홀히 한 채, 중공업 중심 개발에 몰두했다. 하지만 고도의 교육과 기술을 요구하는 중공업은 인구 증가에 따른 일자리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엘리트 중심의 불평등 구조를 더욱 공고히 했다. 또한 그는 사회복지, 교육, 보건 등 공공재에 대한 투자에 소극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독립 이후에도 많은 인도인들이 기초 사회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머물러야 했다. 네루는 독립 인도의 이념적 상징이었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토대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성장 모델을 설계했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66년, 네루 사망 이후 정치적 공백 속에서 총리에 오른 인디라 간디는 인도 민주주의를 훼손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아버지의 계획경제 노선을 계승했지만, 정치적 입지가 약하다는 인식을 극복하기 위해 포퓰리즘에 의존했다. 은행 국유화, 보조금 지급, 가격 통제 등의 정책은 빈곤층의 지지를 얻기 위한 단기적 수단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경제 구조 개혁에는 미흡했다. 특히 1975년, 대법원이 자신의 선거 당선을 무효로 판결하자 비상사태를 선포한 사건은 인도 민주주의를 근본부터 뒤흔든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 언론의 자유는 통제되었고, 반대파 정치인은 대규모로 구금되었으며, 시민의 기본권은 사실상 정지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최악의 지도자로 평가받는 결정적 이유는 강제 불임 시술 정책에 있다. 인구 억제를 명분으로 수백만 명의 인도인, 특히 빈곤층을 대상으로 한 강제적인 불임 시술이 시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현재까지도 이 정책의 전면적 실행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아쇼카 모디는 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처럼 인디라 간디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억압했고, 결과적으로 인도의 정치·사회 시스템에 깊은 상처를 남긴 독재적 통치자였다.


또한 인디라 간디는 인도 정치에 폭력과 부패를 만연시킨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인도의 사회 질서가 무력해진 근본 원인 역시 상당 부분 이 시기로부터 비롯된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69년 5월, 의회가 기업의 정당 기부를 금지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정치에서 기업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실제로는 기부가 지하로 숨어들게 만든 계기였다. 기업들은 세무 당국을 피해 ‘검은돈’을 통해 정치 자금을 제공했고, 이로 인해 ‘검은돈’이 정치의 핵심 통화가 되었다. 범죄자들이 정치에 개입할 여지 또한 커졌다.


동시에 또 다른 형태의 부패도 빠르게 확산됐다. 인디라 간디 휘하의 관료들은 허가권과 산업 규제 권한을 앞세워 기업들로부터 각종 뇌물을 갈취하기 시작했다. 1970년 6월 제정된 ‘독점 및 제한적 거래관행법’은 이러한 부패를 제도적으로 가능케 한 대표적 사례였다. 이 법은 관료들에게 산업 진입 면허를 지연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이는 곧 ‘서류가방 정치’(면허 한 건당 일정한 액수의 현금이 든 가방을 요구하는 구조)의 시작이 되었다. 이 같은 관료-정치 결탁의 부패 구조는 오늘날 인도에 진출하는 외국 기업들이 겪는 대표적인 장애물이 되었다. 인도 내 일자리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고, 공공재를 포함한 사회복지 제도도 여전히 낙후된 채였다. 인디라 간디 시기의 정치적 부패는 단순한 일탈이 아닌, 이후 수십 년간 인도 사회를 지배한 구조적 병폐의 뿌리가 되었다.


비행기 조종사 출신인 라지브 간디는, ‘블루 스타 작전’으로 시크교도에 대한 무리한 진압이 이뤄진 후 암살당한 어머니 인디라 간디의 뒤를 이어 총리에 올랐다. 그의 취임 초기 행보는 순조로웠다. 젊고 기술에 밝았던 그는, 컴퓨터와 통신 기술이 급부상하던 시대 흐름에 발맞춰 첨단산업 육성에 힘을 쏟았다. 또한 개인과 법인세를 인하하며 세계 경제와 보조를 맞추려 했고, 이를 통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자 했다. 그 결과,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가 인도 남부 도시 방갈로르에 연구 센터를 설립했고, 이를 계기로 인도는 글로벌 아웃소싱의 중심지로 떠오르며 소프트웨어 기술과 저비용 인력을 무기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라지브 간디의 ‘신세대 인도’는 불필요한 규제 완화와 대외 개방 확대를 통해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이미지로 비쳐졌다. 기술 산업을 중심으로 한 그의 비전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인도를 미래 지향적 국가로 탈바꿈시키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전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촌 빈곤층과 저소득 계층의 삶은 별다른 개선 없이 방치되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고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 쉬운 기술 산업에만 집중했고, 그로 인한 성장의 열매는 도시, 중산층, 기술 인력에 국한되었다. 절대다수의 인도인들은 여전히 정치적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라지브 간디 역시 선출 당시 기대와 달리, 뿌리 깊은 정치의 폭력성과 부패를 개혁하지 못했다. ‘미스터 클린’이라는 청렴한 이미지로 출발했지만, 점차 구시대적 정경유착 구조로 회귀했다. 인디라 간디 정부 시절부터 특혜를 받아온 기업가 디루바이와의 관계가 다시 이어졌고, 라지브는 처음엔 그와 거리를 두려 했지만, 결국 어머니의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이처럼 규범의 붕괴와 책임의 실종은 인도 정치의 고질병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게다가 스웨덴 방산업체 보포르스(Bofors)와의 무기 계약에서 발생한 거액의 리베이트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라지브는 ‘미스터 클린’의 명성을 잃고 말았다. 정권 하에서도 재정 적자는 확대되었고, 빈곤과 실업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기술 산업 중심의 엘리트 주도 성장 전략은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고, 인도 사회를 양극화된 ‘두 개의 인도’로 고착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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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인민당(BJP) 소속의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는 힌두 민족주의 정치의 토대를 굳건히 다진 지도자였다. 1991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경제개혁의 흐름을 이어받아 집권한 그는, IT 산업의 세계적 경쟁력을 강화하고, 국영 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했으며,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각종 개혁 정책을 시행해 인도를 고성장 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또한 전국에 국도를 정비하고 교육의 질 향상에 투자하며 경제 현대화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인도 전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 혜택은 도시, 중산층, 그리고 특정 계층에 집중되었고,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는 농촌과 빈곤층은 여전히 정책의 사각지대에 머물렀다. 결과적으로 바지파이 정부는 외형적인 경제 성장을 이뤄냈지만, 사회 전반의 포용적 성장은 이루지 못했고, 인도 내부의 불평등 구조, 즉 ‘두 개의 인도’라는 양극화된 현실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가 인도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는, 오늘날 절정기에 접어든 힌두 민족주의 정당 BJP의 장기적인 정치 기반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힌두 민족주의는 라지브 간디 시절 이후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그 배경에는 일자리 부족과 환경오염 심화 등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던 젊은 세대의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한 감정을 정치적으로 포섭한 것은 바로 힌두 민족주의 정치 세력이었다. 그들은 공동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우리’라는 정체성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결속력을 강화해 갔다. 이는 과거 독일제국이 유대인을 적으로 삼아 결속을 다졌던 방식과 유사하다. 인도의 경우, 무슬림과 시크교도 등 힌두교 이외의 종교 집단이 그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힌두트바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들불처럼 퍼졌고, 바지파이는 그 흐름을 정당의 정치적 기반으로 조직화해 낸 인물이었다.


바지파이 집권기에는 힌두트바의 민낯이 강하게 드러난 상징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9년 카길 전쟁이다. 핵무기 개발과 군사적 긴장이 이어지던 가운데, 파키스탄 군대가 카슈미르의 카길 지역을 무력 점령하자 인도 군이 이를 진압하면서 바지파이 정권의 지지율은 급상승했다. 이 승전은 힌두 민족주의를 정치적으로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바지파이는 이를 발판 삼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또 하나의 사건은 2002년 구자라트 폭동이다. 당시 구자라트 주 수상이었던 나렌드라 모디(현 총리)의 방관 아래 힌두 폭도들이 무슬림 지역을 공격해 1,000명 이상이 사망한 비극이 벌어졌다. 이는 힌두트바의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바지파이 총리는 모디에게 책임을 묻고 해임하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결국 정치적 계산에 따라 그를 유임시켰다. 그는 오히려 “무슬림들은 타 종교인들과 공존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힌두 민족주의 세력의 입장에 사실상 동조했다. 이처럼 바지파이 정권 시절 벌어진 사건들은 힌두트바가 인도의 국가 정체성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오늘날 나렌드라 모디를 중심으로 힌두 민족주의가 장악한 인도의 기초가 그 시기에 닦였다.


인도의 14대 총리 나렌드라 모디는 2014년 총선에서 인도국민당(BJP)의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며 정권을 잡았다. 그는 2001년부터 2014년까지 구자라트 주 수상을 역임하며 강경한 힌두 민족주의 성향으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기업 친화적 정책과 감세 기조를 바탕으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달성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특히 2002년 구자라트 폭동 당시 무슬림 학살을 방조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도한 경제 성장이 강한 리더십 이미지와 결합되면서 전국적 지지로 이어졌다.


총리로 집권한 이후에도 그는 구자라트 시절의 성장 전략을 그대로 인도 전역에 적용했다. 작은 정부, 민영화, 감세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접근은 일시적인 성장세를 만들어냈지만, 복지와 교육 예산 축소로 인한 사회 안전망의 약화는 중장기적으로 취약계층을 더욱 소외시켰다. 결국 2018년부터 경기 침체의 조짐이 나타났고,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도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안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경제는 반등해 2024년 기준 6.5%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성장은 포용적이라기보다는 특정 계층과 지역에 집중된 양상을 띠고 있다.


하지만 인도는 높은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빈곤율과 빈부격차에서 뚜렷한 개선을 보이지 못했다. 경제 성장의 과실은 도시와 중산층에 집중되었고, 이는 오히려 사회적 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했다. 모디 정권은 소득 재분배 정책을 거의 시행하지 않았으며, 독립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농촌과 빈곤층을 위한 실질적인 구제 정책은 부재한 상황이다. 일자리 부족 문제는 특히 청년층에 타격을 주었고, 이는 젊은 세대를 더욱 극단적인 이념으로 내모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이러한 경제적 소외는 힌두 극단주의의 폭력성과 결합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분위기를 강화시켰고, 여성의 교육 기회와 사회 진출은 심각하게 제약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도는 오늘날 세계 최악 수준의 여성 인권 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인도는 만성적인 지하수 고갈, 심각한 대기오염과 수질오염 등 환경 문제에도 여전히 취약하다. 공기, 물, 교육, 인프라, 보건, 복지 등 필수 공공재의 접근성과 질이 민주주의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라면, 인도의 민주주의는 형식만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매우 취약한 상태다. 여기에 더해 개인주의가 심화되면서 시민의식과 공동체적 책임감도 점차 약화되고 있어, 국가 전체의 사회적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모디 정권은 인도 경제의 외형을 키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포용성 없는 성장 전략은 ‘두 개의 인도’를 더욱 선명하게 갈라놓았다. 이제 이 둘은 마치 서로 다른 나라처럼 보일 정도다. 예컨대 릴라이언스 회장 디루바이는 뭄바이에 27층짜리 초호화 저택을 세운 반면, 빚에 시달린 농부들은 생계를 비관하며 자살을 택했다. 2014년 기준, 인도인의 약 45%는 기후 위기에 직접 노출된 농업 부문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공정성을 고려한 경제 정책보다는, 빈곤을 도덕적 결핍으로 바라보는 엘리트주의적 시선에 갇혀 가난한 이들을 외면했다.


공공재는 여전히 낙후된 상태였고, 일자리 증가는 지지부진했다. 제조업 기반이 취약한 인도는 개발 경쟁에서 점차 뒤처지기 시작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추진한 'Make In India(인도산)' 정책도 이상적인 구호에 머물렀다. 경공업 분야는 여성 인권과 교육에 집중해 여성 취업률을 끌어올린 베트남과 방글라데시에 밀렸고, 한때 견줄 만한 존재였던 중국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산 제품의 수입 증가는 인도 국내 제조업에 더 큰 부담을 안겼고, 경쟁력 약화를 가속화시켰다. 2000년대 초반, 저렴하면서도 기술적으로 우수한 소프트웨어와 의약품 수출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그 인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아쇼카 모디가 『두 개의 인도』를 통해 냉철하게 묘사한, 오늘날 인도의 모습이다.


책 『두 개의 인도』는 인도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카스트 제도라는 기존의 편견을 깨뜨린다. 오늘날 세계는 더 이상 고정된 신분 질서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며, 인도 역시 그 틀을 넘어선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인도는 경제력 기준 세계 4위에 해당하는 국가로 부상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인도의 미래를 어둡게 비추는 이유는, 인도의 성장 잠재력이나 긍정적 측면보다도 구조적인 문제들(빈부격차, 사회적 불평등, 제도적 실패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이 실제로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문제를 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인도의 미래에는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시사한다. 진정한 위기는 문제 그 자체보다,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데 있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곧 해결 가능성을 동반한다. 그런 점에서 《India is broken》이라는 강렬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인도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너진 인도’를 보여줌으로써, 어떻게 고쳐야 할지에 대한 현실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인도는 여전히 매력적인 국가로 남아 있다.


앞으로 인도가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점이다. 세계 최대 인구, 젊은 노동력, 빠르게 성장하는 내수시장, 기술 역량 등을 고려하면 미국과 중국을 잇는 G3로 부상할 잠재력은 충분하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보면, 그 가능성이 실현되기까지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인프라, 교육, 복지, 법치, 환경 등 거의 모든 기초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겉만 성장한 인도의 구조는 투자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 면에서 아직 불안한 요소가 많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한 현실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인재들이 인도에 기여하기보다는 미국을 비롯한 해외 기업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의 구조가 그들을 품지 못한 채 외부로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인도에 투자할 것인가?’보다는 ‘인도가 스스로를 어떻게 고쳐나갈 것인가?’를 먼저 지켜볼 시점이다. 단기 수익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나라, 그게 지금의 인도다.


인도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아쇼카 모디의 『두 개의 인도』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인도의 빛과 그림자,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조망해 주는 이 책은, 인도를 낙관도 비관도 아닌, '정확하게' 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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