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충돌> / 새뮤얼 헌팅턴
※ 세계적 석학인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위대한 지식이 담긴 지정학책입니다. 국가의 주요 정책을 입안하는 국가공무원들이 반드시 읽었으면 할 정도로 훌륭한 책입니다.
평화와 문명의 미래는 세계의 주요 문명들을 이끄는 정치인, 종교인, 지식인들이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문명의 충돌에서 유럽과 미국은 단결하든가 갈라설 것이다. 더 거대한 충돌, 곧 범지구적으로 벌어지는 문명과 야만성의 진짜 충돌에서 종교, 예술, 문학, 철학, 과학, 기술, 윤리, 인간애를 풍요하게 발전시킨 세계의 거대한 문명들 역시 단결하거나 갈라설 것이다. 다가오는 세계에서 문명과 문명의 충돌은 세계평화에 가장 큰 위협이며, 문명에 바탕을 둔 국제질서만이 세계대전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어 수단이 될 것이다.
- 새뮤얼 헌팅턴(저자)
정치학 분야에 혁명적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미래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틀을 마련해 온 세계적 석학. 군사정치학과 비교정치학 분야에서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올리고 이론정치와 현실정치를 두루 체험한 정치학자로 평가받는다. 1927년 뉴욕에서 태어나 1946년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뒤 시카고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하버드대학교에서 23세의 젊은 나이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50년부터 1959년까지 하버드대학교,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컬럼비아대학교 정치학 교수로 있었고, 하버드대 국제관계연구소 소장과 존올린 전략연구소 소장, 미국정치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문화가 중요하다>, <제3의 물결>, <정치발전론>,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문명의 충돌과 21세기 일본의 선택>, <미국정치론>, <군과 국가>, <문명의 충돌> 등이 있다.
참 오래 걸렸다. 이번에 읽은 책은 장장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갖고 있는 어마어마한 벽돌책이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다. 이 책의 저자인 새뮤얼 헌팅턴은 책 <변화하는 세계질서>를 펴낸 레이달리오, 책 <시빌라이제이션>의 저자인 니얼퍼거슨 등 전문 투자자나 경제학자를 비롯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단 한 번이라도 인용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선구자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인데, 앞서 언급한 두 책의 논리적 구조와 전개 양상이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과 아주 유사한 것을 볼 때 레이달리오나 니얼퍼거슨 역시 새뮤얼 헌팅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책 <문명의 충돌>은 말 그대로 지구라는 단위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문명들의 충돌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세계질서의 변화 양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에 앞서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일이다. 문명이란 뭘까?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국의 황하 문명, 이집트의 이집트 문명, 그리스 문명 등 국가 단위로 또는 발생지역으로 구분하는 집단 인류의 시초를 문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명의 지역적 구분에 더해 문명의 경계를 더욱 확실하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동일한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즉, 같은 지역에 살더라도 그리스정교를 믿는 사람과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같은 문명의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들은 서로 다른 형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한 지역에 두 가지 문명이 공존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물론 문명을 정의하고 구분할 수 있는 요소들은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부분 정체성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이란 집단 인류의 최초 발생지를 대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문명은 어떤 것이 있을까? 첫 번째는 '중화'다. 최소 기원전 1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에는 황하문명이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문명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본인이 제시한 정체성에 초점을 맞춰 이를 '유교문명'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유교는 중국문명과 주변의 여러 아시아 국가를 이루는 중요한 성분이 맞지만, 중국문명은 유교를 넘어서 그 이외의 것으로도 중국 주변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중화'라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본'이다. 같은 동아시아 지역에 있는 중국과 일본은 서로 같은 문명이라고도 볼 수도 있지만, 엄연히 따졌을 때 중국과 일본은 매우 다르다. 특히 문화와 정치에서 둘은 차이가 심한데, 이 두 가지의 차이만으로도 중국과 일본은 별개의 문명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주류의견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세 번째는 '힌두'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전부터 인도에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문명이 존재했다. 인도문명이냐 힌두문명이냐를 두고 최근에는 힌두가 선호된다고 한다. 힌두교는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인도 대륙에서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종교나 제도적 차원을 넘어서 힌두는 인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이슬람'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문명이자, 앞으로 세계에서 벌어질 문명 충돌의 대부분을 담당할 아주 중요한 문명이다. 저자에 따르면 학자들 중 이슬람 문명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 집단이라고 한다. 기원 후 7세기 경 중동의 아라비아반도에서 출현한 이슬람교는 여러 가지 문명사이에서 가장 특이하고 정체성이 강한 종교이자 제도이자 정치다. 다섯 번째는 '정교'다. 출원지를 고려하여 그리스 정교라고도 불리는 정교문명은 독자적인 문명을 구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교는 비잔틴에서 갈라져 나와 몽골의 지배, 관료 독재주의 등을 경험하고 르네상스, 종교개혁, 계몽주의 시대 등을 거치며 그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여섯 번째는 이 책의 주인공이자 현재 세계를 패권하고 있는 핵심 문명인 '서구'다. 서구는 미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보아 유럽, 북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를 포함하는 문명이다. 북아메리카의 기원이 유럽인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곱 번째는 '라틴아메리카'다. 비록 라틴아메리카는 서구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유럽과 북아메리카와는 다른 경로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문명으로 구분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특히 라틴아메리카는 서구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토착 아메리카 문명의 요소들을 잘 융합시키며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서구와는 다른 모습의 문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아프리카'다. 아프리카를 문명으로 인정하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가 아프리카를 문명으로 인정한 이유는 라틴아메리카처럼 아프리카가 이슬람의 영향이든 서구의 영향이든 외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적, 문화적 선전이 그의 판단에 힘을 실었다.
정리하자면 저자는 중화, 일본, 힌두, 이슬람, 정교, 서구,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총 8개 문명을 현존하는 문명으로 선정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8가지 문명 사이의 충돌을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할 차례다. 1997년 첫 출간된 이 책을 아우르는 주된 내용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탈냉전시대의 세계질서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다. 그러니까 즉, 소비에트연방과 미국이 대립했던 냉전시기가 끝난 1990년대의 상황이 작가가 글을 쓰는 시대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저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분리독립 과정에서 빚어진 사건들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상세히 묘사하고 있으며, 그가 인용하는 통계자료는 대부분 1994년도의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과 시대적 배경을 알았다면 이제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할 준비는 마쳤다. 대체 그는 문명의 충돌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그에 따라 세계의 질서는 어떻게 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을까?
세계의 역사를 큰 맥락에서 봤을 때 근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단연코 세계대전과 냉전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주요 역사에 있어서 주역은 잘 알다시피 미국이다. 그들이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미국은 성공적으로 세계대전을 종식시켰고 소련과의 냉전을 끝냈다. 그리고는 세계의 경제와 정치를 주도하는 패권국이 되었다. 그런데 냉전을 끝으로 무려 100년 간의 전쟁을 마친 세계는 더 이상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가 아닌 다른 형태로의 경제적, 정치적 전환이 필요했다. 전쟁을 치르며 연합국이 되었던 각 국은 더 이상 연합국 소속으로 남아있을 명분이 사라져 버렸고,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생긴 또 다른 형태의 사건들에 의해서 세계의 질서는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역설적인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세계는 분명 평화와 안정을 되찾았는데, 다시금 세계에는 새로운 형태의 갈등이 생기고 또 다른 전투를 암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아직은 비록 작은 물결이지만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가장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은 바로 이슬람이다. 문명을 정의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이것은 비단 중동이라는 지역적인 것뿐만 아니라 종교, 생활양식, 가치관 등 이슬람 정체성을 총괄하는 의미에서의 이슬람이다.
요약하자면 이슬람은 정체성이 매우 짙으며 집단친화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또한 아이를 많이 낳는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슬람 세력은 시아파 대 수니파의 대결처럼 내부적으로 분열된 것처럼 보여도 외부의 공통된 적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서로를 돕는 습성이 있다. 이것은 구 소련이었던 러시아와 미국이 중동을 상대로 여러 작전을 펼칠 때 이슬람 국가들이 보여준 행동으로부터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다. 이슬람 법전인 코란에 모든 행동양식을 의존하는 이슬람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종교가 없는 이들을 극도로 경계하는데, 법전에 적힌 문장을 자기 네식으로 곡해하는 바람에 그런 인간들은 기꺼이 살생해도 된다고 믿으며 그것을 명분 삼아 무차별한 살생을 벌이기도 한다. 여러 뉴스를 통해 접한 사건들로만 봐도 그들이 매우 과격한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이슬람은 아주 적극적으로 아이를 낳는다. 그것은 무함마드가 시킨 일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무함마드의 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이슬람의 습성이 인구증가와 연결되어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슬람의 규율을 충실히 따르는 자들은 아이를 계속해서 많이 낳게 될 것이고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인구 증가가 다수결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여러 지역사회 시스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인구증가의 여파로 젊은 이슬람 세력이 많아져 사회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면 그 사회는 더욱 급진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으로 변할 것이기에 이슬람의 인구증가는 단순 숫자놀음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문제가 있다.
한편, 세계 패권국으로서 미국에 가장 위협이 될만한 문명은 역시나 중화문명이다. 영국에게 아편으로 기만당하던 시기를 지나고 덩샤오핑이 중국을 세계에 개방하자 중국은 과거의 위상을 되찾으려는 듯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성장률이 두 자릿수를 내려오는 일이 한 동안 없을 정도로 중국은 아주 가파른 속도로 미국을 따라잡고 있다. 물론 지금은 미국에 철퇴를 맞고 주춤한 상황이긴 하다. 사실 오래된 역사에서 중국은 미국 이전의 패권국가였다. 그들이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갈 때는 사실상 미국은 없었으니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구문명보다 앞서'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이러한 중국의 면모를 보일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정화의 대원정'이다. 정화의 대원정은 명나라 시절 환관 정화가 대규모의 함선을 이끌고 아프리카 대륙까지 무려 7차례나 항해를 떠났던 사건이다. 이 사건이 주로 언급되는 이유는 정화의 항해가 그 어떠한 정치적, 군사적 목적 없이 오직 명나라의 위세를 떨치기 위해 항해를 했다는 점에서 그 당시 중국의 위상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전란과 정치적 사건들이 엮이며 중국은 더 이상 원정을 떠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서구에서는 항로를 빼앗긴 이베리아 반도를 주축으로 신항로 개척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과학혁명이 서구를 휩쓸면서 그들이 가진 지식과 문화가 꽃을 피웠고, 결국 산업혁명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맺게 되면서 서구문명은 주춤해 있던 중국을 앞서게 된다.
산업혁명으로부터 20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다시금 미국의 패권 자리를 노리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이슬람을 설명하면서 종교적인 것에 초점을 둔 것과 달리 중화문명에 대해서는 지역적 특성에 주된 논점을 둔다. 이슬람을 종교와 함께 설명해야 하는 것은 서구와 이슬람이 오래전부터 종교적으로 갈등을 이어오던 앙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에 있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 종교적인 분쟁은 사실상 없다. 두 국가 사이의 영향은 문화적 동질성을 갖고 있는 동북아시아와 태평양 건너편 북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비롯된다. 지역적으로 중국은 이미 동북아시아, 더 크게는 동아시아의 패권국이다. 그런데 아시아에는 아시아의 호랑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뿐만 아니라 독보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일본이 있다. 여기서 저자의 의문이 시작된다.
서구 대 이슬람이 아니라, 서구 대 동아시아라면 세계질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동아시아에 서구라는 공동의 적이 등장하게 된다면 주변 국가들은 지리적인 영향과 문화적 동질성으로 인해 중국의 손을 들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화적 동질성은 차치하고서라도 홍콩은 이미 중국에 반환된 지 오래고 대만은 분리독립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중국과 같은 핏줄로 이어진 같은 민족이다. 예로부터 중국과 공생하며 살아왔던 한국은 말할 것도 없다. 남은 것은 싱가포르와 일본인데, 화교 세력이 경제와 정치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싱가포르도 결국에는 중국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가장 애매한 일본도 서구 대 동아시아 구도에 있어서는 지리적 영향에 의해 중국과 연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2024년 현재 미국과 중국, 동아시아의 관계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과연 1997년 저자가 예상한 대로 세계는 흘러갔을까?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홍콩은 중국에 완전히 삼켜질 위기다. 중국 본토인이 홍콩으로 대거 이주하기도 했고, 친중성향이 아니면 국가 선거에 참여할 수 없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특히 2020년, 중국의 홍콩 지배 야욕을 강하게 드러낸 홍콩보안법이 시행되면서 중국 정부는 홍콩 장악을 목전에 두고 있다. 싱가포르는 어떨까? 싱가포르의 국부이자 세계 정치의 대부인 리콴유의 국가답게 싱가포르는 중국과의 관계에 매우 신중한 모습이다. 기본적으로 싱가포르는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중국의 영향이 동남아시아로 펼쳐지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행보에 따르면 양측은 서로의 관계를 '전방위적인 고품질의 전향적 동반자 관계'로 칭할 정도로 친중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가당착'에 빠졌다. 입으로는 반중정서를 내비치지만 경제적으로는 절대 중국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나마 덜한데,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처참하다. 미국을 추앙하는 극단적인 세력과 정치가 결부되면서 중국을 향해 자극적인 언사를 내뱉질 않나,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과 행동을 보이며 외교관계가 거의 마비된 수준이다. 덕분에 중국에 진출했던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이 철수하고 대중 수출이 줄어들면서 성장세가 한풀 꺾였다. 중국에게 필요한 건 명분이라 약간의 입발린 말을 하더라도 국익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얻어오는 편이 더 실리적일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작금의 현실이다.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있다면 단연코 중국과 대만의 관계일 것이다. 중국은 일국양제에서 하나의 중국으로 정치노선을 변경하면서 대만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지만 대만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미국 역시 혹시 모를 흡수 통일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언제라도 군사를 개입할 수 있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을 취해야만 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태평양으로의 영향력 확대다. 대만을 끼고 주변 바다에 항모를 전진배치하고 있는 미국의 견제 때문에 사실상 중국은 앞바다에 대한 주권을 잃은 상태다. 대만 해협이 갖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다. 미국을 철수시키면서 태평양권역을 영향력 하에 두는 것, 그리고 그에 따라 동남아시아를 압박할 수 있게 되면서 남중국해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다. 미국을 바로 앞바다에 두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이 대만을 탐내는 두 번째 이유는 반도체 기술이다. 근래에 들어 중국이 가장 고심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반도체다. 반도체 굴기를 앞세울 정도로 정부의 우선 정책과제로 밀어붙이고는 있지만, 성과는 아직인 모양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도의 집약된 기술이 필요한 반도체 산업은 단순히 돈만 투자한다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만에는 잘 알다시피 TSMC라는 세계 최고 반도체 생산기술을 가진 기업이 있다. 중국이 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국의 부족한 기술력을 사실상 같은 뿌리와도 같은 국가인 대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운명의 장난일지는 몰라도 엄청난 기회인 것은 사실이다. 중국은 명분만 확실하다면 당장에라도 대만을 집어삼키려 할 것이다.
저자의 예상과 달리 친중 행보를 보이고 있는 싱가포르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미국 아래 규합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처럼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우리나라가 소외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만과 일본은 대놓고 미국이 돕고 있다. 일본과 대만의 관계 역시 각종 법률이나 제도의 변화는 물론, TSMC 반도체 공장을 일본 본토에 짓겠다는 정책적 결론을 놓고 볼 때 양국은 작금의 세계질서에 발맞추어 대응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무엇을 하고 있나? 변화하는 세계질서 어디에 발을 맞추고 있는 것인가? 정치는 엉망이 되고, 세대갈등과 남녀갈등이 폭발하고, 최저 출산율을 매년 경신하고 있지 않은가. 믿고 있던 반도체 산업마저 미국, 대만, 일본의 3자 구도의 협공에 따라 잡힐 위기다. 지도를 펼쳐 놓고 선을 그어보자. 일본에 TSMC 공장이 만들어지고 인텔 공장이 만들어졌을 때, 우리나라는 과연 미국이 긋는 선에 포함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처럼 어려운 현실에도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방위산업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우리나라 경제의 최대 호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휘말릴 것을 대비하기 위해 폴란드와 체결한 현대로템의 K2 전차 구매계약건이다. 무려 한화로 약 15조 원에 달하는 거대계약이다. 중동에서는 이슬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난민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가 만연해지고 있는 유럽에서는 이슬람과의 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 한복판으로 번질 것에 대비해 경쟁적으로 군비를 확대하고 무기를 비롯한 각종 군사 물자를 구매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아울러 동북아시아에서도 중국과 대만,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에서는 조만간 전쟁이라도 치를 듯이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에서 우리나라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평화를 우선시해야겠지만, 어찌 됐든 전쟁에 휩싸일 세계의 흐름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1945년 미국에 원자폭탄을 맞고 나락으로 떨어진 일본이 경제적 재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군수물자를 제공하면서 쏠쏠하게 한몫 챙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 우리나라가 해야 할 일은 방산기술을 확보하고 생산기지를 늘려 필요한 국가와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이다. 방위산업을 성장시키는 것은 수출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도움이 된다. 대외적으로는 세계정세를 고려한 수출지향 경제활성화를 추구하면서도 군사력 확보라는 내부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를 멍하니 지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짧은 글을 작성하고자 미국과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를 위주로 언급하다 보니 글이 약간 편협해졌다. 하지만 책 <문명의 질서>는 결코 편협한 책이 아니다. 문명을 만들어내는 여러 특징적인 요소들부터 현대 문명에 대한 상세한 설명, 그리고 작가가 글을 쓰는 시점에서 가장 최근에 발생했던 유고슬라비아 분리독립사건과 가까운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중요하지 않은 문장이 없을 정도로 밀도와 깊이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이 가진 유일한 단점은 기본적인 역사적 지식이나 이해력 없이는 쉽게 읽기 어려운 책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이 1993년 미국의 최대 군사 잡지인 '포린 어페어스'에 게재된 논문 <문명의 충돌?>을 더 심화시켜서 만든 책이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이 결코 사회과학서가 아니라, 냉전 이후의 세계정세의 변화를 해석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 정답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의도는 책에 아주 훌륭하게 담겨있다. 비록 출판한 지 20년 가까이 된 책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냉전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고, 세계질서는 변해가고 있음을 고려했을 때 2024년에 이 책을 읽는 것은 아직 충분히 시기적절하다고 보인다. 서쪽으로는 중화, 북쪽으로는 러시아, 동쪽으로는 일본과 미국, 4개의 서로 다른 문명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는 여러모로 보나 변화하는 세계질서에 매우 취약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그만큼 우리나라의 앞으로의 처신이 더욱 중요하다. 남과 북,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져 있을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잘 통합된 대한민국으로서 세계의 흐름에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럼에도 방법이 없어 보이지는 않으니, 우리는 충분히 이 현실을 잘 헤쳐나갈 것이라 믿는다. 중요한 정책을 입안하는 국가 공무원들이 반드시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새뮤얼 헌팅턴의 책 <문명의 충돌>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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