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성수 - 윤지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인터뷰
2017년 겨울, 연무장길에 재즈 바 '포지티브 제로 라운지'를 오픈하며 성수동에 재즈 씬을 만들어온 팀포지티브제로(TPZ)가 2020년 여름, 음악을 메인으로 한 새로운 공간을 오픈했다. TPZ에서 운영하는 카페포제 바로 옆에 위치하며, 오래된 건물의 외관과 구조를 살려 마치 예전부터 자연스럽게 성수동의 골목길에 존재하고 있던 느낌의 공간이다.
이름은 로스트 성수. 1층에는 PRCSM 편집샵과 LP를 판매하고 청음 할 수 있는 레코드 샵 겸 바가 있고, 2층에는 내추럴 와인바가 있는 복합 공간이다. 공간의 인테리어 구축과 개발부터 브랜딩, 디자인, 콘텐츠 큐레이션까지 TPZ에서 모두 도맡아 운영하고 있다.
로스트 성수를 만들며 TPZ가 중요하게 생각한 가치는 키워드 3개로 압축해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내추럴과 오가닉. 내추럴 와인을 판매하는 공간이지만, 전자 음에 기대지 않는 연주 음악을 칭하는 오가닉 그루브 위주의 바이닐을 틀고 판매한다. 음식 또한 셰프가 엄선한 제철 과일과 채소로 만들어지며, 라이프스타일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둘째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 건물 인테리어부터 내부를 채운 콘텐츠 구성까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한다. 특이하게도 건물의 사이드에 위치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2층의 내추럴 와인바에 들어가기까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공간의 모습이 연출된다. 건물의 기존 구조를 살려 낮은 천장이 2층까지 뚫려 높아지기도 하고, 벽 하나를 통과하면 채도가 낮은 공간에서 노란 색감이 돋보이는 공간으로 순식간에 이동하기도 한다.
셋째는 편집이다. 로스트 성수는 전문 DJ와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소믈리에, 셰프가 직접 공들여 셀렉한 레코드, 패션, 내추럴 와인과 음식으로 채워진다. 매주 목·금·토에는 실력 있는 언더그라운드 DJ들의 라이브 셋이 진행된다.
‘길을 잃다, 사라지다’는 의미를 지닌 이름 ‘로스트 LOST’에서 느껴지듯이, 공간을 돌아다니는 동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공간의 다양한 모습을 즐기며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보고, 듣고, 마시고, 먹는 즐거움의 세계를 한층 더 확장할 수 있다. TPZ의 윤지원 CD와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로스트 성수'는 어떤 공간인가요? TPZ에서 이 공간을 만든 이유는?
‘로스트 성수'는 음악과 함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음악'을 메인으로 다른 여러 콘텐츠와 결합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레코드 바지만, 바이닐도 파는 곳을 운영하고 싶었어요. 사실 LP를 꺼내서 판 꼽고 돌리는 게 번거롭잖아요. 그래도 시각적으로 보이는 아트웍도 있고, 직접 만져서 틀어야 하니 촉각적이고, 청각적이고. LP야말로 오감을 자극하기 좋은 매체라고 생각해요. 아날로그적이고 불편해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경험이 가치가 있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우선 ‘레코드 바'를 염두에 두었어요.
지금까지 TPZ는 컨템퍼러리 레스토랑 보이어, 스페셜티 커피 아러바우트, 카페 포제 등을 운영하면서 F&B로는 계속 보여준 게 있어요. 여기에 패션이란 키워드를 넣고 싶었어요. 현재는 패션 브랜드 '파라코즘PRCSM'이 들어가서 패션인데요. 사실 어떤 걸 편집해 보여줄 것인지는 정해지지 않았어요. 신진 디자이너를 소개할 수도 있고, 어떤 작가의 굿즈를 보여줄 수도 있어요. 츠타야 서점도 편집된 큐레이션을 통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곳이잖아요. 저희도 저희의 시선으로 편집된 걸 보여주고 싶어요.
또, 술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많은데, 전문적으로 음악을 큐레이션 해서 들을 수 있는 공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공간과 음악이 안 어울릴 때도 있잖아요. 반면에 험블한 고기 집에서 재즈가 나와서 분위기를 잡아줄 때도 있고요. 의외의 조합이 매력 있거든요. 로스트에서 만큼은 음악이 좋은 공간에서 내추럴 와인과 술을 마시는 경험을 주고 싶어요.
자기에게 좋은 게 무엇인지 아는 게 진짜 좋은 취향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강요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이런 게 트렌드라며 몰아가고 싶지도 않고요. 자기에게 좋은 게 무엇인지 아는 게 진짜 좋은 취향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로스트 성수'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건, “여기서 음악 듣는 게 취향이 좋은 거야"가 아니라 “이런 것도 가능해" 정도예요.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는 소비자들의 몫이죠. 하나의 방향만이 마치 옳은 방향이고 나머진 아닌 것처럼 하고 싶지 않아요.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스스로 취향을 확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런 경험을 억지스럽지 않게 주고 싶어요.
공간 인테리어를 할 때 중점을 둔 부분이 있나요?
도시 재생 느낌으로 가려고 정해둔 건 아니었어요. 성수동에 공장이 많다고 해서 그런 인테리어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코로나 전에 베를린에 다녀왔는데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느낌이 좋았어요. 공간 인테리어 해주신 비주얼 디렉터님과 시너지도 잘 났고요.
이 건물을 처음 봤을 때 천장 높이가 낮다가 갑자기 높아지는 느낌이 좋았어요. 유럽은 이런 공간이 많거든요. 중정도 있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공간도 있고. 채광이 좋아서 낮에도, 비 올 때도 느낌이 달라요. 채광이 다 들어오면 공간 내부가 오렌지빛으로 바뀝니다. 그 느낌이 좋았어요. 원래부터 있던 걸 살리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로스트의 오렌지빛, 카키 빛 컬러감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모티브를 따 왔습니다.
또 중점을 둔 건 동선이에요. 입구가 건물 앞에 있으면 유입되는 게 더 많았을 텐데 출입구가 옆에 있어요. 그 이유는 애초에 들어가는 구조부터 동선에 따라 사람의 시선이 공간을 다 경험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레코드 샵 앞에 입구가 있으면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어떤 공간이 보이지 않거든요. 조금 불편하더라도 우리가 살린 벽과 편집샵을 따라가면서 공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시선이 머무는 곳을 고려하며 의도적으로 동선을 짰어요.
놓칠 수 있는 경험을 잡아주는 것은
디테일한 기획과 의도적으로 디자인된 경험
그런 기획의 디테일이 의도적으로 디자인된 경험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경험을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놓칠 수 있는 경험을 자연스럽게 잡아주는 것이죠. 건물 안에 들어올 때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고 들어왔다가 바의 따뜻한 색감을 보면 좀 더 긴장도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로스트' 이름과 Let’s get lost!란 태그라인은 어떤 뜻을 담고 있나요?
처음 네이밍 할 때 여러 안이 있었어요. 설명적이되 공간의 정체성을 담은 이름으로 할 것인지, 고객들이 이 공간으로 와서 느꼈으면 하는 바이브를 표현할 것인지 고민했어요. 결국 '공간 최고의 인테리어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는, 사람들이 느꼈으면 하는 감정적인 워딩으로 접근하기로 했어요.
로스트는 어떤 지점에서 모든 이가 갈구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어요. 여행도 결국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사라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잖아요. 이 공간에서의 경험에 잠시나마 일상으로부터 ‘사라짐'을 겪게 하면 어떨까 했어요. 이름을 정하니 슬로건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더라고요. 우리 잠시 사라지자. Let’s get lost! 음악적인 공간이기에 쳇 베이커의 자전적 스토리를 담은 동명의 영화 <Let’s get lost>가 연상되기도 했고요. 로스트라는 이름에는 일상에 잠시나마의 도피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어요.
로스트를 소개하는 태그라인으로 내추럴 와인과 오가닉 그루브(Natural wine & organic grooves)도 있어요. 이 문장은 무슨 뜻인가요?
오가닉 그루브(Organic grooves)는 소울, 펑크, 재즈 등 전자음에 기대지 않는 연주의 음악을 통칭해요. 로스트가 내추럴 와인을 즐기는 곳이니, 음악도 오가닉한 음악을 즐길 수 있으면 했어요. 아날로그 매체인 레코드 샵도 그런 의미로 마련한 거고요. 내추럴과 오가닉은 일맥상통하면서 어울리는 워딩이잖아요. 그러니까 로스트 안에서 사람들은 내추럴 와인과 오가닉 그루브를 한 번에 즐기는 거예요. 술에는 음악이 가장 좋은 페어링이니까요.
로스트에서 어떤 경험과 큐레이션을 기대할 수 있나요?
로스트의 음악, 와인, 음식, 패션 모두 전문가들의 정성스러운 '편집'을 통해 선보이고 있어요.
레코드 샵과 바의 경우, DJ Jaezae가 음악 큐레이션을 맡고 있어요. DJ Jaezae는 세계 최대의 온라인 음악 데이터베이스 디스콕스(Discogs)의 한국 커뮤니케이션 담당이에요. 클리크 레코드(Clique Records)부터 다수 클럽, 바, 브랜드 행사 등에서 자기만의 개성과 색깔이 담긴 셋으로 주목받아 왔고요. 로스트의 큐레이션을 통해 사람들에게 더 다양한 음악을 듣게 해주고 싶어요.
내추럴 와인은 전문 소믈리에들이 셀렉하고 있습니다. 입문자부터 많이 마셔본 사람들까지 다양한 입맛을 충족시킬 수 있는 라인업이 준비되어 있어요. 음식은 강민성 셰프가 제철 야채와 과일에 우리만의 색을 입혀서 만들고 있고요. ‘내추럴과 오가닉'이 키워드인 만큼 메뉴 또한 계절에 따라 계속 바뀝니다.
1층 편집샵에서 보여주고 있는 브랜드, 파라코즘은 "퓨처리즘 2300년도의 라이프스타일"을 생각해 만드는 브랜드예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그와 어울리는 브랜드라고 볼 수 있어요.
경험을 통한 편집의 확장을 고민합니다
추가로,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주는 것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퍼포먼스’로 보여주고 싶어요. 예를 들면, 바로 옆 카페포제에서 세라믹을 전시하고 있다면, 로스트에서는 내가 고른 세라믹에 내추럴 와인을 따라 마실 수 있게 하는 거예요. 이것도 편집이거든요. 사람들은 재밌는 걸 좋아해요. 내추럴 와인을 그냥 먹는 것보다 어떻게 먹는가가 중요해요.
세라믹은 그 자체로 작품이지만, 그 잔을 사용해볼 수 있는 건 일종의 퍼포먼스가 되는 거죠. 진열되어 있을 때는 만지면 안 될 것 같고 어렵게 느껴지지만, 그 잔을 사용해볼 수 있다면 예술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문턱을 낮추면서 재미도 느끼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체험하고 경험하면서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정성 들여 셀렉한 것들로 채워진 공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개인의 관점에서 이 공간을 즐겨줬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로스트가 어떤 공간이 되기를 바라나요?
성수동과도 연결되는 질문 같아요. 로스트는 많은 트래픽을 일으켜서 사람들이 이 공간을 투어 하듯이 보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성수동이 가진 자유로운 분위기를 살리고, 공간을 만든 우리도 편하게 와서 술 마시고. 누가 와서 즐겨도 편한 공간이면 좋겠어요. 그래서 1층에 맥주를 팔고 있기도 하고요.
한 편으론 힘을 더 빼지 못한 게 아쉬워요. 힘을 더 빼려면 공간이 작았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고요. 아까 최고의 인테리어는 사람이란 얘기를 했는데요. 공간은 사람이 채우는 바이브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어요. 더 많은 사람이 와서 공간을 이용하고, 더럽혀지고 하면서 더 좋은 공간으로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지금도 로스트가 너무 ‘새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지금 모습도 험블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요. (웃음)
시간이 쌓인 공간은 공기부터 달라져요.
시간이 쌓인 공간은 공기부터 달라져요. 사람들에게 공간이 좀 더 편하게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로스트에서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기를 바랍니다.
‘팀포지티브제로(TPZ)’는 가치 있는 라이프스타일과 문화를 소개하는 매개체로서 공간을 바라보는 크리에이티브 집단입니다. 셰프, DJ, 바리스타, 미디어 아티스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기획자가 모여 성수동을 중심으로, F&B, 음악, 패션 업계의 다양한 씬을 만듭니다.
한 달에 한 번, TPZ에서 큐레이션한 라이프스타일 이야기를 보내드립니다. 영감을 주는 전시, 맛있는 요리와 술을 좋아한다면. 디깅을 통해 음악을 듣고 싶다면. Monthly TPZ의 구독자가 되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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