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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도 Jun 16. 2022

아웃도어 퀴어 수난기 1부

이성애자들 사이에서 텐트를 치다

도쿄의 게이클럽에서 고고보이로서 관객 앞에서 실오라기만 입고 스테이지에 올라가기로 한 날 나는 결과적으로 출연을 사양하고 대신 멀리 산속에서 열린 음악 페스티벌에서 텐트를 치고 새벽까지 혼자 춤을 추었다. 대학교 후배인 디제이가 니쵸메에서 게이 서킷 파티를 기획을 맡아 몸이 우락부락하게 크면서 뉴페이스 고고보이를 찾고 있는데 1년 선배인 나도 파티에서 춤을 췄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무명의 고고보이로서 이미 데뷔를 한 적이 있는 필자로서 나는 내심 이 경쾌한 하극상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며칠 후 발표된 파티 포스터에는 내 이름과 사진이 실려있지 않았다. 평일에는 회사원 그리고 주말에는 디제이로서 활동하는 후배분이 일에 치어서 그러려니 넘기려고 했지만 내 이름이 누락된 파티에서 다른 고고보이와 함께 부끄럼 없이 옷을 벗고 춤을 추기에는 차마 잡지 편집장인 나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기에 결국 나는 공손하게 출연을 거절했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서 핸드폰을 보니 어느 친구가 혹시 나가노현의 산속에서 열리는 <FFKT>라는 음악 페스티벌에 가는지 물어봤다. 마침 내가 존경하는 다른 친구 디제이 DJ Hibi Bliss가 2년 전 첫 공연을 하기로 했으나 코로나로 연기되어 드디어 열리는 페스티벌이기에 나는 흔쾌히 간다고 했고 바로 티켓을 얻었다. 일찍이 야훼에게 버림받은 대도시의 퀴어라면 누구나 주말마다 클럽에서 섬기는 디제이가 있기 마련이다. 티켓은 구했으나 문제는 첩첩산중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서 야밤을 보낼 수 있는 텐트와 캠핑 장비이었다.


2년 전 현해탄의 반대편에서 이태원의 커뮤니티가 핀셋으로 이를 잡듯이 추적되어 도려내고 격리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앞으로 나를 포함한 “아제”의 나이에 도달하는 게이들은 도심의 이목에서 벗어나 산과 바다에서 모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했다. 이를 테면 설마 학교의 조기축구와 회사의 등산회에 치를 떤 게이들이 자발적으로 주말 아침마다 운동화 대신 등산화를 신고 산에 올라가는 날이 올까 하며 말이다. 하지만 이는 나의 좁은 편견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잘 살펴보니 주위 게이와 퀴어들도 같은 평등한 인간으로서 아웃도어를 즐기는 분들은 의외로 많았다. 특히 인테리어에 관심이 지대한 퀴어라면 높은 확률로 캠핑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지난 2  나는 도쿄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가지면서 집에서 식사를 하면 컴퓨터를 켜고 유튜브를 즐겨 보았다. 넷플릭스를 켜면 사람들이 맞고 죽거나 좀비에게 물리거나 섹스를 하기 때문에 식사 시간에는 가능하면 자극이 덜한 콘텐츠가 좋았다. 이에 도시를 떠나 자연을 찾아가서 캠핑을 하는 캠퍼들의 동영상이 적절했다. 특히 여성 백패커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높은 산이나 고립된 섬에서 텐트를 치고 비화식으로 식사를 하며 자연에 최소한의 흔적을 남기는 모습은 마치 자객이면서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허우샤오센 감독의 “자객 섭은낭 서기처럼 우아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낮에 비해 밤이 빛나는 게이들의 주말은 자연 섭리에 얼마나 떨어져 괴리되고 있으며 동시에 얼마나 환경에 부담을 끼치고 있는지 문득 반성하게 되었다. 그러다 캠퍼들의 일상과 양태를 관찰한 결과 자연스럽게 텐트 하나에 150 원이나 하는 힐데베르그를 구입하고 무려 거위털로 만든 발란드레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자는 최소한의 장비로 꾸리는 백팩킹에 동경을 가지게 되었다.


20대를 신주쿠에서 시작해 맨해튼과 이태원을 거쳐 을지로에서 마무리를 지은 게이 남성으로서 자연 속에서 캠핑을 하는 것은 꿈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동차 운전도 마찬가지인데 면허는 어머니의 등쌀에 밀려 대학원을 졸업하고 땄지만 난 아직도 액셀을 밟으면 나아가는 기계 덩어리 자체를 신뢰하지 못한다. 고유가 시대라는 경제적 현상에 일상에 영향이 있을지 몰라도 정작 난 주유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자동차에 관심이 없고 가질 필요도 없는 환경에서 자란 나에게 캠핑이란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그러다 30대가 넘어가니 클럽문화의 육체적 한계를 느끼고 백화점에서 아웃도어 매장을 들리기 시작하더니 주변에 열리는 데모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대신 파타고니아를 입으면서 나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행했다. 고인이 된 칼 레거펠트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트레이닝 바지는 패배를 의미한다. 자신의 인생이 통제가 안 되는 것이니 트레이닝 복을 입는 것 (Sweatpants are a sign of defeat. You lost control of your life, so you bought some sweatpants)." 그러나 코로나 시대에 자기 인생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던가? 나도 중년의 초입에 이르러 신주쿠에서 꼬박 월세를 내는 신분이 되면서 트레이닝 바지는 물론 가볍고 빨래도 쉬운 아웃도어 옷에 손이 가기 시작했다.


니쵸메에서 고고보이로 데뷔하거나 드랙퀸으로 기갈을 부리거나 어둠 속에서 춤을 추듯이 사랑을 찾거나 아니면 새벽에 프라다 재킷을 입고 하라주쿠의 체육관으로 가서 에어팟 프로를 쓰고 운동을 하는 고독한 근육 공주가 되거나... 이러다 난 그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영원히 주어진 인생의 이해는 커녕 발전도 하지 못한다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듣기로는 이성애자들은 자녀 영어 공부와 부동산 학군의 저주에 빠졌는데 나는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놀아도 되는 걸까라고 난데없는 책임감은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한편 나는 자연을 가까이하면 퀴어로서의 삶의 섭리를 이해하지 않을까라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착각을 품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음악도 음악이었지만 사실 이번 페스티벌을 통해 캠핑을 시작할 구실점이 되지 않을까 기대를 했다. 그러나 2부에 이어 기술하겠지만 사실 산속의 캠핑장에는 검소함도 겸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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