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어 써보는 글
오늘은 나의 아기가 태어난 지 167일째 되는 날이다.
최근 5개월에 접어든 나의 딸은, 매일 자고 일어나면 신기하게 늘어나있는 여러 표현과 더불어 (추측하건대) 심심함으로 인한 칭얼거림, 그리고 알게 된 것이 많아짐에 따라 늘어난 요구사항으로 나의 매일을 빽빽하게 채워주고 있다. 아기를 하루 종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시간이 빨리 흐를뿐더러, 나의 에너지도 정말 '쪽-' 빠져서 바닥까지 다 쓰게 된다. 정말 1분 1초 빠짐없이 너무너무 예쁜데 (그리고 자주 행복하기도 하고), 사실 종종 힘들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동안 아기에게 총 다섯 번 수유를 했고, 다섯 번 기저귀를 갈았으며, 세 번 빨래를 했고, 8.2kg에 육박한 나의 아기를 한 서너 시간 정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저녁 여섯 시 반 즈음 나는 오늘의 마지막 수유를 하며 아기를 재운 후 밀린 집안일 (빨래 널기, 개기, 쓰레기봉투 묶기, 아기 매트 소독하기 등) 중 일부를 하고 저녁을 먹고 앉았다.
어느덧 나의 삶에는 몇 주전까지만 해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제대로 잡힌 루틴과,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해진 육아퇴근, 그리고 육아와 집안일의 나름의 균형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요즘은 저녁을 먹고 자기 전까지 약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는데, 나는 그 시간 동안 시체처럼 누워 밀린 카톡을 하거나, 유튜브에서 '사랑과 전쟁'을 찾아보거나, 남편과 밀린 대화를 하며 영상물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한다. 출산을 하고 집중력이 많이 낮아져서 (뿐만 아니라 어휘력, 독해력 모두 심각한 수준이다) 무언가를 길고 진득하니 하는 게 어려워 중간에 몇 번이나 중단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며칠 전 남편은 나에게 "나라는 좋아하는 게 뭐야? 취미가 뭐야?"라고 물었다. 만난 지 삼 년 반이나 된 남편이란 사람이 이런 질문을 묻다니 싶겠지만, 내 남편이라면 정말 가능할 법한 질문인 게 그는 여전히 내가 거주했던 다섯 개의 국가와 내 몸에 있는 세 개의 타투의 의미를 모른다. (내가 설명은 두어 번 해주었던 것 같은데) 사실 남편의 그런 성격을 알기에 남편의 새삼스러운 질문의 그냥 웃겼고 답변을 하려는 찰나 "어라, 나 뭐 좋아하지"라는 당혹스러움과 더불어 약간의 불안감이 나를 휩쓸었다.
분명 나는 취향도, 취미생활도 당차고 또렷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무엇을 좋아하냐는 말에 뱉을 말이 하나 없는 무색무취의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아 당혹스러웠고, 좋아하는 것을 대보라는 말에 "무빙" 따위만 입에서 맴도는 OTT의 노예가 된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남편의 질문에 나는 더듬더듬 내가 해왔던 것들을 읊었지만 모든 것은 과거완료형의 문장이었다. 어쩜 육아를 하며 현재진행형이길 바라는 내가 욕심 사나운 것일지도 모르지.
그의 질문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생각을 했더니 나는 '기록'을 참으로 좋아했던 사람이라는 결과에 다다랐다. 몰스킨에 끄적거리는 것이든, 개인 SNS에 기록을 하는 것이든 나는 꾸준하게 기록을 해왔고 (물론 나의 과한 기록으로 나를 언팔로우 한 사람 역시 많다는 것을 안다), 어느 상황을 포착하고 그 상황에서 느낀 것을 나만의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을 참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 육아퇴근 후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조금씩 기록을 다시 해보려고 한다. 잠시 멈춤 상태가 된 나의 TCK 인터뷰 준비부터 시작해서, 사사로운 기록까지 - 거창하지 않아도 조금씩 다시 시동을 걸어보면 예전에 좋아하던 것들을 대하던 태도와 감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렇게 컴퓨터를 다시 열고 타자를 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며칠 걸렸고, 아무래도 나의 문해력이 예전에 쓰던 어휘의 반절 정도 되어버린 것 같은 마음에 글을 쓰면서도 답답하지만 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꾸준히 하면 또 나만의 기록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담이지만 과거의 나는 종종 접하는 "엄마의 서사"를 피곤하다고 생각을 했다. 꿈을 뒤로 미루고 아기를 키우는데 전념하느라 가여운 엄마의 서사, 혹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 못해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멋지게 살려고 노력하는 엄마의 서사 둘 다 나에게는 과하게 피로하다고 느껴지는 것이었다. 특히 후자는 종종 내가 불편해하는 '힘'이 과하게 실려있다고 생각을 했었다. 모든지 우아하게 하고 싶은 (Sprezzatura, 내가 좋아하는 단어다 - 힘들인 것을 티내지 않고 매우 잘 하는 것) 고상한 병(?)에 걸린 나에게 은근한 불편감을 주는 서사였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 짧은, 별 것 아닌 글을 쓰면서도 내가 피곤해하던 두 서사를 고스란히 읊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고, 스스로가 여러모로 가여운 반면 자존심은 여전히 세서 과하게 힘 역시 들어간 나를 보며 그저 과거의 내가 경솔했구나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경솔하게도 많은 것을 쉽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여하간 이렇게 나는 다시 별 것 아닌 글을 쓰기 시작하며, 나의 엄마생활을 기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