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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a Days Sep 05. 2024

나의 정체성의 중추(backbone)가 된 TCK 여정

스위스와 일본에서 자라 국제회의통역사로 일하는 이기은 님

이번 인터뷰이는 공통지인을 통해 알게 된 ATCK (Adult Third Culture Kid), 이기은님이다. 기은님은 스위스와 일본에서 자라 국제회의통역사로 일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소셜미디어의 메시지를 통해 이야기를 주고받다 그녀가 국제회의통역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고, 스위스와 일본이라는 내가 궁금해하는 나라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현재 본인의 일을 하며 엄마로서의 삶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루빨리 그녀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언어적인 부분은 실제 많은 TCK들의 가지고 있는 공통적이고 대표적인 장점 중 하나이기는 하나, 그 장점을 주 업으로 삼고 일로서 펼쳐나가는 삶은 어떠할까 궁금했다. 또한 작년에 출산을 한 사람으로서, 미리 출산과 육아를 다 경험한 그녀가 체득한 TCK로서의 경험들이 육아에서 어떻게 발현이 되거나 도움이 되는지도 궁금했다.


기은님과의 인터뷰는 국제회의통역사라는 멋진 직업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된 좋은 기회였을뿐더러, 나 역시 몇 년 후의 나의 커리어와 TCK의 정체성을 녹인 엄마로서의 삶을 함께 꾸려나가는 나의 모습을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 더 하게 된 또렷(sharp)하면서도 따뜻한 시간이었다.


바쁜 와중 나의 여러 질문에 자세하고 진실되게 답변을 해주신 기은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이 인터뷰가 나에게도 그랬듯 본인의 커리어를 일궈나가는 멋진 TCK들, 그리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많은 이들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길 바란다.





1. 안녕하세요, 기은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본인을 간단하게 소개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기은이고 현재 국제회의통역사 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고 대학교에도 출강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 저희 아버지가 현직에 계실 때 주재 발령을 받아 일본 도쿄와 오사카, 그리고 스위스 취리히에서 근무를 하시다 보니 온 가족이 따라가게 되어 해외의 세 도시에서 살아볼 기회를 가졌어요.


아버지가 다니시던 회사 정책상 3~4년 근무 후 귀국해야 해서 유아기 때 도쿄에 살다가 잠시 귀국하고, 초등학교 입학 직후에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초등 4학년까지 다니다 다시 일시 귀국한 후 초등학교 6학년 때 스위스 취리히로 건너가 고등학교 1학년 과정까지 다니다 귀국해서 고등학교 1학년으로 편입 후 국내에서 대학에서 정치외교학과를 졸업, 통번역 대학원과정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 스위스와 일본, 두나라 다 저에게는 무언가 깔끔하고 편리하며 경치가 그림 같은 느낌의 장소들이에요. 물론 저는 여행자 입장으로서 느낀 단편적인 것이지만요. 두 나라에서 성장한 경험이 기은님에게는 개인적으로 어땠는지 궁금해요.


두 나라 다 여행 다니기엔 너무너무 좋죠!


제 입장에선 일본은 아무 걱정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내던 곳, 스위스는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절을 보내던 곳으로 기억해요. 일본과 스위스 각각 제가 살았을 때 한창 정점을 찍던 시기 (80년대와 90년대) 여서 그런지 당시 우리나라와는 비교 대상이 많이 되었어요.  지금은 우리나라도 많이 발전했고, 오히려 어느 분야에선 우리나라가 더 잘 갖춰졌지만 제가 살았던 당시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앞서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저의 유아기, 유년기, 청소년기는 문화 충격으로 점철되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3. 기은님이 겪으셨던 문화충격이 궁금한데요! 한 가지 예를 나눠주실 수 있으실까요?


스위스에 거주했던 90년대 초중반, 그때부터 이미 스위스에는 리사이클링 문화와 중고를 구매하는 문화가 만연했고 많은 사람들이 비닐봉지가 아닌 장바구니를 들고 다녔어요. 그 당시에도 비닐봉지는 유상으로 제공되었기에 길에서 사람들이 카트나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죠.


또한 중고 물품을 구매하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 문화였기에 역으로 “품질이 좋은 중고 제품을 저렴하게 사서 잘 쓸 수 있는데 왜 새 거를 사냐?”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물건을 쓰다 기증을 하고 그 물건을 구매에 대한 거리낌이 없으며 공병수거도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었어요. 지금 보면 자연과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앞선 문화였어요. 물건이 매립지까지 가는 것을 줄이고, 폐기물을 줄이는 것이 당연하다 여겨졌죠.


나라: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인 가방 브랜드인 프라이탁 (Freitag)이 탄생할만한 곳의 이야기네요! 저는 이제야 탄소배출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옷 구매를 줄이려고 하는데, 스위스 사람들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게 되어요.


네, 뿐만 아니라 제가 스위스에 있을 때가 학생 때라 그런지 또 크게 와닿았던 부분이 있는데요.


저는 독일어를 쓰는 지역에 있으며 첫 해에는 현지 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우며 현지 학교 시스템을 피상적으로나마 경험해 볼 기회가 있었어요. 이듬해에는 국제학교로 옮겨서 지금 생각하면 아쉽지만 영어도 배웠어야 했어서 이 정도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현지 학교 시스템에서는  학업 성적 하나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어요. 독일식 교육을 따라서 김나지움이라고 대학을 다닐 친구들끼리 따로 모아서 공부를 하고, 친구들을 학업성취나 등급제로 나누지 않는 문화였죠. 혹여나 시행착오를 겪다가 진로를 다른 걸로 돌려도, 하나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소위 말하는 ‘평균'에 끼워 맞추지 않는 문화였어요.


스위스 취리히에서 학창 시절

4. TCK의 가장 대표적인 장점인 “언어"와 관련된 직업을 본업으로 삼고 계세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직업 중 하나인데요! 어떻게 하다가 정치외교학과로 학부 졸업 후 국제회의통번역 분야로 가시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저는 조금 멀리 돌아 지금 종사하고 있는 직업에 안착한 케이스예요.


해외생활을 하던 당시엔 우리나라가 인지도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서 아시아인을 보면 일본어나 중국어로 말을 걸거나 ‘한국 (Korea)’에서 왔다 하면 시위 때문에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온 나라가 뒤덮여 있거나 전쟁 포화 속에 사는 줄 아는 친구들이 대다수였어요. 어린 마음에 우리나라를 적극적으로 알려서 나라 발전에 조금이나 보태고 싶어 고등학교 1학년 때 귀국한 이후 외교관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기 시작해서 정말 운 좋게 원하던 과에 입학했어요.


입학해서 수업을 하나씩 차근차근 들어보니 전공 분야 자체는 재미있었어요.


몰랐던 걸 알아가는 기쁨도 한껏 누리고요. 하지만 학교 다니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 보니 관심 있는 분야에 파고드는 일은 즐겨하지만 사람 대하는 일을 편치 않아 하는 성향이 있음을 알아챘어요. 거기다가 때늦은 (!) 사춘기가 와서 방황도 많이 하고요. 결국 외무고시 준비는 그만두었는데 청소년기 때부터 가지고 있던 목표를 잃어버린 데다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처음부터 다시 알아내야 하다 보니 더 많이 방황하게 되더라고요. 대학원 진학도 진지하게 고려했습니다만 때마침 취업 기회가 열려 첫 직장에서 채용이 되어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어요.


첫 직장에 입사하고 나서 계속 좌충우돌했어요. 운이 좋아 필기시험도 면제받고 면접 한 번으로 단번에 합격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한 탓에 상사와 선배들에게 혼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드물었어요. 별 일 없이 넘어간 날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달까요. 거기다 낯을 많이 가리고 ‘눈치’를 보는 문화나 ‘상명하달식' 문화가 익숙하지 않다 못해 부당하고 불합리하다 생각하는 일을 자주 마주하다 보니 상사에게 의문을 제기하거나 제 의견을 내다보니 선배들 사이에서 ‘싸가지 없는 신입'으로 소문이 나서 뒷 이야기가 들리거나 조언을 가장한 간섭을 받아서 한국 사회생활의 매운맛(!)을 제대로 맛보았죠.


너무 힘들어서 퇴사나 이직 생각도 했습니다만 못해도 1년, 최소한 3~4년은 버텨보자고 마음을 고쳐먹고 일을 하다 보니 본업인 해외마케팅 외에 영어와 일어 통번역으로 인정도 받았고, 좋은 경험도 많이 쌓았습니다. 그때 사회생활에 대해 어렵고 힘들게 익힌 덕을 지금도 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본업무의 업무량이 많은 와중에 통번역 업무까지 다 소화하려니 3년 차 즈음부터는 번아웃이 와서 퇴사 전 마지막 한 해는 업무에서 손을 놓다시피 할 정도로 몸도 마음도 지치더라고요. 그래서 잠깐 쉬어가겠다 생각해서 퇴사했는데 때마침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해 키우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경력이 아주 잠깐 경력이 단절되었어요. 본래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갈 즈음 다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볼 계획이었습니다만 조금이라도 빨리 준비할 수 있을 때 준비해 보는 게 해보라고 부모님이 격려를 해주신 덕에 반년 가량 준비해서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해 지금까지 왔습니다.


5. 국제회의통번역사는 적확하고 민첩한 언어 스킬뿐만 아니라, 상황판단력, 대처능력, 사람에 대한 이해도, 클라이언트에 대한 사전 공부 등 여러 가지 스킬을 필요로 하는 직업일 것 같아요. 직업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가장 기억에 남았던 행사나 회의 역시 궁금해요.


통역과 번역에 대해 쉽게 설명드리자면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일입니다.


다만 그 수단이 통역은 ‘말'이고 번역은 ‘글'이라는 차이가 있어요. 그리고 통역은 어느 정도 알려진 대로 상대 화자의 말을 들은 다음 통역하는 순차 통역 (consecutive interpretation)과 화자의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통역하는 동시통역 (simultaneous interpretation)으로 나뉘고요. 질문 주신대로 언어 능력은 반드시 갖춰야 하는 기본 요건인 데다 상대 화자가 하는 말을 온전히 잘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분석력과 이해력도 필수불가결합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 화자를 포함한 클라이언트에 대한 높은 이해도 뿐 아니라 클라이언트가 의뢰한 통역 업무와 연관된 주제에 대한 사전 조사와 공부도 반드시 해야 하고요. 한창 바쁠 때엔 수험생과 진배없이 지내요.


그리고 현장에선 상대 화자가 무엇을 어떻게 말을 할지 예측이 잘 안 되는 데다 통역을 요하는 청중, 주변 환경과 여건 등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너무 많다 보니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절대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줄 알 필요가 있다고 늘 느껴요. 완벽하게 준비했다 하더라도 ‘꼬마 악마'가 늘 숨어서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 장난을 치려 하기 때문이죠. 대학원 재학 시절 첫 동시통역 현장에 나갔는데 사전 리허설 할 때엔 아무 문제가 없다가 동시통역 시작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갑자기 동시통역 장비가 말썽을 일으켰어요. 질의응답 순서가 아직 한창 남아 있어서 통역이 필요한데 기술적인 문제가 생겼으니 저와 같이 들어간  파트너 통역사뿐 아니라 주최 측, 관중, 장비 담당 엔지니어 모두가 술렁였죠. 더 이상 동시통역을 할 수 없겠다고 그 순간 판단해서 장비 담당 엔지니어께 무선 마이크 하나 부탁드린 다음 부리나케 뛰어나가 연사님 옆에 앉아 순차 통역을 했었던 기억 했어요. 처음 동시통역 나가자마자 오만가지 변수를 겪어 끝날 때까지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손은 바들바들 떨렸지만 어떻게든 마치고 나니 주최 측에서도 고맙다고 인사를 받아서 그 모든 스트레스가 씻은 듯 사라졌어요. 그때 한꺼번에 많은 일을 겪다 보니 언제 어디서든 통제 불가한 변수는 일어날 수 있으니 오감을 열어둬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온갖 변수와 스트레스를 견뎌낼 정신력과 체력이 필요해요.


회의 참석자가 열 분 계시고, 각자 한 마디씩 한다고 가정해 보면 개별 참석자는 자신이 해야 할 말 한마디만 하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통역사는 앉은자리에서 참석자 열 분의 이야기를 다 듣고 이해한 다음 빠짐없이 통역해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해요. 회의 석상에서 제일 많이 집중하고 제일 많이 말을 하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심하겠죠. 회의 분위기가 화기애애 해도 지치지만 참석자 간 의견 차이가 심하거나 협상이 필요한 자리에서 통역하다 보면 참석자분들이 답답한 마음을 풀려고 통역사에게 화풀이 아닌 화풀이를 하는 경우도 있어 감정 소모도 꽤나 심하니 그걸 견디기 힘들어 그만두는 분들도 생각보다 많다고 들었어요.


동시통역사, 통역사 등으로 통칭되고 있긴 한데 사실 정식 명칭은 ‘국제회의통역사 (conference interpreter)’예요. 나라마다 교육과 인증 체계가 조금씩 다른데 국내에서는 자격증을 발급하는 공인 자격증 제도가 없어요. 대신 통번역 대학원 졸업하면 졸업장이 자격증으로서 기능해요. 졸업했다고 모든 게 다 끝나지 않고 새롭게 시작한다 생각하면 더 맞다 생각해요. 강의실에서 모든 변수가 통제된 상황에서 통역 연습을 하던 때와 달리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역을 해내야 하거든요. 그리고 끊임없이 배우면서 지식도 쌓고, 세상 돌아가는 일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하고요. 결국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이니까요. 연차가 쌓이면서 통역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더욱 실감하고 있어요. 좌절도 많이 겪고, 회의감을 느낄 때도 있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럼에도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나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통역 업무를 원활하게 진행함으로써 누군가의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내며 느끼는 보람과 성취감 때문일 겁니다.


국제회의통역사로서 일을 하는 모습


6. 일을 하시며 TCK 로서 자란 성장배경이나 TCK라는 정체성이 도움이 된 적이 있는지 궁금하고, 혹시 있다면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10년 넘게 해외 거주하다 보니 모국어 이외에 외국어를 몇 가지 더 습득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모인 친구와 교류하면서 다양한 문화, 생활 방식, 그리고 사고방식이 있을 수 있음을 경험을 통해 온몸으로 깨달았어요. 덕분에 통역 현장에서 변수가 생겨도 ‘그럴 수 있지. 어떻게든 해보자고'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수 있을 정도로 꽤나 덤덤하되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어요.


덤으로 해외 생활 하면서 다양한 발음과 억양에 노출되었다 보니 웬만한 억양과 발음에도 절대 당황하지 않고 찰떡같이(!) 알아듣는 강점도 갖췄고요.


무엇보다 TCK로 자란 성장 배경과 정체성은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외부 상황에 의연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되, 심지는 굳어 잠깐 흔들리는 일이 있더라도 휩쓸리는 대신 곧바로 중심을 잘 잡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다니는 나라마다 늘 주변부에 있던 데다 귀국해서도 귀국 학생이라는 꼬리표가 붙다 보니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 속하는지 궁금해하고 방황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런저런 경험과 굴곡을 겪은 끝에 나는 ‘나'이고,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니 주변 모든 분들이나 상황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힘이 생기더라고요.


7. TCK로서의 성장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꼼꼼함을 요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지금과 다르게 초등학교 시절에는 많이 덤벙댔어요. 시험지에 답안지는 다 잘 써놓고 이름을 안 써서 선생님께 지적을 종종 받았어요. 특히 일본에서 초등학교 다녔을 때 3학년 담임 선생님이 제일 기억나요. 재일교포 선생님이셨는데, 이름 쓰는 건 기본인데 이 기본을 지켜야 한다고 시험지를 돌려주시면서 지적을 매번 하신 기억이 나요. 들을 땐 따끔하게 지적을 해주시니 앞으로 주의해야겠다 다짐하면서도 어린 마음에 시험보다 노는 게 더 좋았으니 친구들이랑 어울려 뛰어놀면서 금세 잊어버리더라고요.


보다 못한 선생님이 다음에 또 이름 안 쓰고 내면 0점 처리하겠다고 하셨어요. 설마 하고 귓등으로 흘렸는데 다음번에 또 이름을 안 쓰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정말로 ‘0점' 처리를 해버리셨더라고요. 다 맞았는데도 말이죠. 0점 처리된 시험지 보고도 정신을 차렸지만 원칙을 중요시하는 데다 한 번 한다면 끝까지 행동으로 옮기시는 모습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네요. 지금은 은퇴하셨을 거 같은데 안녕하신지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나요.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 꼼꼼하게 뉘앙스와 의미 다 따지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걸 아시면 깜짝 놀라실 거 같아요.


오사카에서 초등학생 시절


8. 기은님께서 생각하시기에 TCK로 자란 것의 장점은 무엇이고, 반면 아쉬운 점 혹은 본인이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일찍부터 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을 먼저 꼽을 수 있겠어요. 요즘엔 웬만한 곳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긴 해도 어릴 때부터 다양한 문화와 삶의 방식을 접할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라 생각해요. 덤으로 외국어 구사 능력도 얻을 수 있고요.


다양한 문화를 일찍부터 접하다 보니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다양한 선택지가 있음을 어릴 때부터 체득하게 된다 생각해요. 그리고 그 덕분 인생에서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할 때 남들이 하는 대로 다 따라 하기보다 제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제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일 수 있는 소신과 용기를 가지는데도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TCK로서의 성장과정과 정체성은 아이를 키우는데 도움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살면서 경험한 바로는 공부나 대학 입시 이외에도 윤택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선택지가 생각보다 많고,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는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무엇보다 한두 가지 잣대로만 학생을 평가하거나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지 않고요. 일본에서는 유아기와 초등 시절을 보내다 보니 딱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지만 스위스에서 지내며 얻은 경험은 특히 제가 아이를 키울 때 많이 참고가 되고 있어요.


스위스도 지방자치제도가 많이 발달하다 보니 시스템이 주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제가 있던 취리히의 경우 위에 이야기한 것처럼 대학 진학, 기술 교육이나 직업 교육 등 적성과 흥미에 따라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교육 과정이 세분화되어 있어요. 그리고 학업 성취 못지않게 문화생활과 신체 활동 등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고요.


물가가 비싸고 세금도 많이 걷어가는 대신 저렴하게 문화, 예술, 체육을 즐길 수 있는 인프라와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내실 있게 잘 갖춰서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즐길 수 있도록 해요. 그리고 여가 시간에 공부나 학원 스케줄에 쫓기기보다 여가 시간을 잘 활용해 평소에 배워보지 못한 취미나 기술을 익히거나 새로운 경험을 해볼 기회를 탐색해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고요. 무엇보다 특정한 기준과 틀에 억지로 맞추기보다 각자의 특성과 호흡에 따라 자신의 인생길을 나아갈 수 있도록 독려하는 분위기와 문화가 자리 잡고 있어요.


가장 감수성 예민할 때 체화한 게 아이를 키울 때 빛을 발하더라고요. 제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남들 다 하는 거 따라 하기보다 아이가 어떤 성향과 기질을 타고났고,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며 싫어하는지를, 어떤 강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는지 더 가까이에서 살피고 이에 맞춰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부모의 모습에 조금씩 더 다가가는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시행착오는 수없이 겪어나가는 건 사실이지만 부모가 자식을 끌어가기보다 자식이 나아가는데 조금씩 길을 터주거나 뒤에서 밀어주는 모습을 늘 머릿속에 그리고 행동에 옮기고자 노력하고 있죠.  


그렇지만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도 있듯이 아쉬운 점도 있어요. 길어봐야 한 도시에서 4년, 짧게는 2년가량만 있다 다른 나라나 도시로 옮겨야 하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쌓을 수 있는 추억이 딱히 없어요. 그리고 언제 어떻게 변화가 생겨 옮겨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쉽게 못 열더라고요. 겉으로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웃는 얼굴로 대하긴 하는데 언제 어떻게 헤어질지 몰라 저도 모르게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는 손안에 꼽힐 정도로 한정되더라고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을 최근 들어서야 깨달았는데 제가 아쉬워했던 점을 자식에게는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좋든 싫든 지금 사는 동네에서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열심히 버티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9. 현시대의 TCK가 취업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취업 사회에서는 정성적인 요소보다 정량적인 요소를 더 많이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TCK가 가장 내세울 수 있는 건 언어 능력이겠죠. 하지만 취업 만이 능사가 아니더라고요. 취업하고 나면 그 이후 자신의 커리어를 어떻게 개발할지 방향성을 잘 잡아야 하고, 커리어 개발이 취업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봐요. 길게 놓고 보면 취업보다 더 중요할 수 있어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TCK는 어릴 때부터 다양성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자신 앞에도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 수 있음을 인지하고, 선택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 앞에 놓이거니 앞으로 놓일 기회에 열린 자세를 갖춘 거죠. 그 점이 TCK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이자 앞으로 오랫동안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10. 현재 TCK로 자라고 있는 10대들에게 주실 수 있는 조언이 있나요?


스스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라고 조언해주고 싶어요. 자신이 가장 아끼는 가족이나 친구를 대할 때보다 더 스스로에게 다정다감하고 관대했으면 좋겠어요.


시대를 막론하고 다른 나라와 문화권에서 사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아요. 그리고 귀국해서 적응하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고요. 그러다 보면 잘 해내기 위해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서 잘해도 부족하다 느끼고, 못하면 자책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쉬워요. 아쉬운 점은 늘 있습니다. 하지만 결핍도 한 인간을 더 성장하도록 이끄는 동력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있는 그대로를 더 사랑하면 좋겠어요. 몸도 마음도 건강한 모습으로 지내고 있는 지금도 너무 잘하고 있으니까요. 이대로 잘 성장하면 앞으로 더 반짝반짝 빛이 날 것이니까요!


  

11. 마지막으로 TCK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TCK는 저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일종의 ‘중추 (backbone)’ 역할을 해요.  제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속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고 힘들어했던 적이 있었지만 TCK라는 정체성이야 말로 저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강력한 키워드라는 걸 깨닫고 나니 모든 게 편해지더라고요. 그와 동시에 한국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자긍심을 더더욱 공고하게 자리 잡게 하는데도 도움이 되고요.

한 때는 핸디캡이라고까지 생각했지만 이젠 저를 정의하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이고, 저를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이에요. TCK가 얼핏 사회의 주변인으로 인식될 소지가 있긴 한데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다양한 모습과 목소리가 있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고, 우리 사회를 더 풍성하게 하는데 미약하나마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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