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ra Days Sep 05. 2024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게 해 준 다이내믹한 여정

독일에서 태어나 여러 나라에서 학업과 커리어를 쌓은 전정주 님

필자는 약 3년 남짓 다닌 전회사에서 전정주 님을 한국 대표로 만나 뵙게 되었다. 나에게는 한국 성함보다는 패트리샤 님이라는 영어 이름이 더 익숙한 분이기도 하다.


커리어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많이 존경하는 분인데, 당사자께 몇 차례 직접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그녀가 지니고 있는 멋진 것들, 예를 들면 직위와 경력 등을 전혀 내세우지 않는 모습, 반면 본연의 반짝거림과 호기심 등으로 세상을 탐구해 나가는 모습 등이 늘 멋진 것을 넘어 가끔은 아름답다고 생각을 했다.


그녀의 눈빛, 언어, 표현방식, 옷 등 많은 것들은 늘 나이, 성별, 문화, 우리가 응당 바운더리라고 정해놓은 사회의 지루하고 보편적인 것들을 종종 능려하고 쿨하게 넘나드는 것 같았다. 그건 정주님이 오케스트라 연주자처럼 업무를 멋지게 이끌어내는 모습에서도 많이 묻어났고, 어쩜 삶과 주변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내가 닮고 싶은 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을 할 때는 굉장히 냉철하면서도 미술작품, 영화 및 여러 예술을 계속 애정을 담아 향유하는 모습을 보며 막연하게 여러 나라에서 살았다고만 알고 있던 그녀가 살아왔던 삶의 궤적이 궁금했고, 그 경험들이 혹 그녀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알고 싶었다.


TCK인터뷰를 준비하며 꼭 언젠가는 인터뷰를 요청드리고 싶었던 인터뷰이었으나, 나의 다사다난했 임신과 출산 과정으로 시간이 조금 걸렸다. 많이 바쁘신 와중에도 (내가 아는 사람 중 아마 제일 바쁜 분일 것 같다) 정성을 다해 답을 해주신 나의 전상사이자 멋진 인터뷰이 전정주 님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 드리며, 그녀의 인터뷰 답변을 정리하며 나는 다시 한번 나의 마음가짐과 삶을 바라보는 태도 역시 재정비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이 인터뷰가 다른 이들에게도 좋은 영감이 되길 바란다.   



1. 안녕하세요, 본인을 간단하게 소개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위워크코리아 대표를 맡고 있는 전정주라고 합니다.


저는 부모님이 당시 공부 중이던 독일 뮌헨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한국으로 오게 되었어요. 한국에서 살다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동하여 일 년 동안 거주하였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학업을 이어가다 미국 코네티컷 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 대학은 뉴욕으로 진학했습니다. 대학교 졸업 후 일을 하며 도쿄에 조금 거주하다가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의 비즈니스 스쿨에서 학업을 이어갔고, 비즈니스 스쿨 졸업 후에는 뉴욕과 홍콩에서 일을 하다가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지금 돌아보니 제 인생 중 약 20년 이상을 해외에서 거주했었네요.   


1976년, 뮌헨에서
1980년 뮌헨 유치원에서 찍은 사진


2. 독일, 미국, 일본까지… 여러 나라에서 거주하셨는데 실제 몇 가지 언어가 구사 가능하신지도 궁금해요. 가장 편한 언어는 어느 언어인가요?  


저는 한국어, 영어를 하고 일본어도 조금 구사합니다. 많은 언어는 아니에요. 제 모국어이자 제일 편한 언어는 한국어지만 일을 할 때는 영어가 더 편한 편이에요.  


3. 거주하셨던 국가나 도시 중 본인에게 가장 큰 의미가 있었던 곳이 있는지, 그 이유 역시 궁금합니다.  


저는 당연히 서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서울은 우선 제가 살면서 제일 오랫동안 거주한 도시이기도 하고, 저는 80년대부터 격변해 온 이 도시와 함께 자랐어요. 제가 전 세계 어디에 있을 때든 서울은 언제나 저에게 고향 같은 곳이었고 서울을 일 년 이상 떠나본 적도 없어요. 외국에 있을 때도 꼭 서울을 들리곤 했죠.

과거에 서울은 그렇게 두드러지게 주목받는 도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늘 서울이 전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동시 콘텐츠, 음식, 패션 등에 있어 문화적으로 다양하며 최첨단의 인터넷, 의료 서비스를 지닌 곳이라고 여겨졌어요.


예를 들면, 제가 미국에 거주할 때 뉴욕을 제외한 도시에서 미국 영화가 아닌 영화를 보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일본에서도 최근 나오기 시작한 OTT 등이 있기 전까진 가장 최신 한국 영화를 보는 게 어려웠지요. 반면 한국에서는 예전에도 미국, 유럽, 일본, 중국 그리고 당연히 한국 영화를 다양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오늘날의 서울이 응당 받아야 마땅할 주목을 전 세계로부터 받고 있는 것 같아 기뻐요. 세계적인 유명인이라 할지언정 서울에서 사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글로벌 도시에 비해 아직까지 서울이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취업의 기회인 것 같아요. 저에게는 서울에서 거주하는 것을 선택했던 것이 커리어적으로는 많은 잠재적인 기회들을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선택하라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아요. 물론 그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제 가족이 여기 있다는 것이겠지요?    


 4. 저 역시 서울을 정말 좋아해서 주신 답변에 매우 공감해요. 그럼 여러 선택지 중 대학을 위한 행선지로 ‘뉴욕’을 고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미국의 코네티컷 주에 위치한 사립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서울에 비해서는 굉장히 시골스러운 곳이었어요. 제 학교는 뉴밀포드라는 작은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데, 뉴욕시에서는 약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었지요. 모든 상점들은 오후 4-5시면 닫았고, 저와 친구들과 밤에 기숙사를 탈출해 마을로 가도 열려있는 곳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바쁜 도시에 있는 대학교로 꼭 진학을 가겠다고 다짐을 했고, “잠들지 않는 도시”로 유명한 뉴욕이 가장 저에게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미국에서는 뉴욕이 가장 아시아랑 비슷한 곳이 아닐까 싶어요.   


1993년, UCLA에서 고등학생들을 위한 여름학기 수강 중 놀러 간 디즈니랜드에서 만난 윌스미스와


5. 뉴욕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신 후 애널리스트로 첫 커리어를 시작하셨어요. 어떻게 첫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대학교 재학 시절 다양한 인턴쉽을 했습니다.


두 번의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KBS 방송국과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보냈어요. 저는 늘 콘텐츠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김앤장 법률사무소보다 KBS에서의 인턴쉽이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실제 경험을 해보니 일을 하며 저는 변호사분들로부터 더 영감을 받았죠. 나중에 또 알게 된 사실인데 미국 소재의 대형 필름 스튜디오들의 임원진들 중 다수가 변호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로스쿨에 가서 변호사가 된 후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로스쿨에 가고 싶었으나 제 LSAT (미국 로스쿨에 가기 위해 보는 시험) 시험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에 일 년 동안 일을 하며 다시 한번 시험에 응시했어요. 당시 한국에서 구직을 할 때 한국에서는 IMF 사태가 발발했고, 저는 불황을 타지 않는 직업을 찾아야만 했어요. 운이 좋게도 당시 한국은행에서 해외에서 공부를 한 학생들을 채용을 하고 있었고, 저는 첫 커리어를 한국은행의 국제협력실에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갖게 된 첫 커리어인데, 제가 일 년 남짓 일을 하고 당시 생경했던 개념인 주식 리서치 (Equity Research) 분야로 커리어를 옮긴다 하였을 때 모두가 놀라는 눈치였지요.  


6. 전공을 저널리즘과 동아시학으로 선택한 후, 여러 커리어를 거치고 MBA 학위도 따신 다음 계속 멋진 커리어를 이어오셨어요. TCK로서의 경험이 이런 선택들에 어떤 영향들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TCK로 자란 것이 제게 영향을 주었다면 그건 바로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는 것에 있어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인 것 같아요. 저는 한때 영화제작자가 되기를 갈망했었지만 저널리즘 공부로 제 진로를 틀었고, 그다음에 로스쿨을 가려고 했었어요. 1998년 경영 위기로 인해 은행 업계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고, LSAT을 세 번 응시한 후 경영대학원으로 진학을 했죠. 저는 중앙은행원, 주식 리서치 애널리스트, 인베스트먼트 뱅커, 장난감 회사의 해외 판매, 라이센싱 및 애니메이션 사업을 담당하는 최고운영책임자, 테크 회사의 전략총괄을 거쳐 현재 위워크코리아의 총괄 책임자를 하고 있어요.

저는 TCK로서의 경험이 분명 제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기쁨을 알게 하고, 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고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것에서 배우게끔 영향을 준 것 같아요.  


2009년, 인베스트먼트 뱅커로 재직 중이던 홍콩에


7. 현재 계시는 회사 역시 미국에서 시작한 글로벌 회사인데, TCK로서의 경험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업무적으로 여러 국가의 다양한 분들과 소통을 하시고 계시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게 정주 님께서 실제 오프라인으로 만나보지 못한 해외에 있는 동료분과 주말에 통화도 하시고 우정을 쌓으신 것이었어요. 이러한 경험들 역시, 단순 언어의 장벽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TCK로서의 경험이 영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조금 더 알려주실 수 있나요?


위워크코리아에는 저뿐만이 아니라 정말 많은 TCK분들이 재직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여태까지 일했던 회사 중 가장 많을 거예요.


제가 일을 하며 회사에서 만난 어린 TCK분들을 보았을 때, 대부분의 분들이 본인들의 백그라운드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소위 말하는 외국물을 먹은 티를 잘 내지 않아서) 그분들이 TCK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저는 알기가 어려웠어요. 아마 그러한 섬세한 처신은 문화 간의 차이에 대해 더 깊은 이해가 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해요.


한국지사뿐만 아니라 해외 위워크에도 굉장히 다양한 TCK분들이 재직 중이고, 특히 인터내셔널 본사가 위치한 런던에 많아요. 아마 TCK가 아닌 사람을 찾기 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관계를 쌓는 것 역시 상대적으로 쉬웠던 것 같습니다.  


2022 런던에서 위워크 International Leadership 팀과


8. 정주님이 생각하셨을 때 TCK로 자란 것의 장점은 무엇이고, 반면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기질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양한 곳에서 자란 것은 분명 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데 도움을 주었지요.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쉽게 호기심을 잃는 부분이 있어 저는 이러한 기질에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해요.


또한,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에 있어서 다양한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것 역시 TCK로 자란 것의 장점인 것 같아요.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것들이 존재하는 것에 있어서 늘 겸허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반면 아쉬운 점은 제 고향 혹은 정서적인 집 (Home)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에요. 저는 제가 굉장히 한국인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정체성 혼란을 크게 겪지는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 (Coming Home)은 종종 ‘집’으로 돌아오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또한 저는 종종 제가 오해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는 굳이 보편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게 제가 아웃사이더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저는 그냥 저 자체이고, 제가 속한 커뮤니티와는 늘 다를 거예요. 그 다른 점이 각각의 사람을 특별하고 자기답게 만드는 것이겠지요.   


9. TCK가 취업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건 아마 보이는 것보다 더 복잡한 질문인 것 같아요.


TCK분들은 확실히 언어적인 특혜, 그리고 문화적 유연성 (Cultural Flexibility)도 대체적으로 지니고 있어요. 아마 커리어를 시작할 때 주목을 받거나 적응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거기에 너무 취해있거나,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는 것은 각자의 몫인 것 같아요. 외교관처럼 문화적 유연성이 직무에 있어 중심적인 부분이 아니라면, 커리어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각자 가지고 있는 능력적인 부분이라고 생각을 해요.


저는 종종 TCK분들이 여러 문화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단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럼 저는 “본인은 그 문화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을 하는지” 역으로 질문을 해요. 정말 그들이 삶에서 추구하는 게 그 가운데 있는 것인지가 궁금해요. 가끔 어떤 TCK분들은 그들의 경험이 그들 자체라고 생각을 하거나, 그들이 되어야 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종교와 비슷한 것 같은데, 누군가의 경험은 그 사람 자체로 설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또한 TCK라는데 안주하지 않으면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큰 장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0. 현재 TCK로 자라고 있는 10대들에게 주실 수 있는 조언이 있으신가요?

  

TCK로 자란다는 것은 여러 경험을 할 수 있기에 굉장히 운이 좋은 것을 알고 그걸 최대한 즐겼으면 좋겠어요. 물론 청소년으로서 소속감이 결여된 다는 것은 때때로 힘든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고통을 이겨내면 더욱더 강해진다는 것을 배웠고, 분명 그럴 것이라 말해주고 싶습니다. 또 하나 더 말해주고 싶은 것은, 누군가가 TCK가 아니라고 해도 TCK만큼 문화적으로 유연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감사하게 여기되, 다른 사람들의 경험들을 평가절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11. TCK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TCK로 살면서 굵직하게 나누자면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는 것 같아요. TCK라는 점을 의식하며 새로운 문화와 커뮤니티에 적응할 때마다 많은 힘을 쏟을 수도 있는 반면 그냥 변화에 무심하게 대응하고 본인 스타일대로 살 수도 있지요. 저는 제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아닌 척 모방하며 사는 게 어려웠기에 후자의 삶을 살았어요.

TCK로서의 경험은 저 자신에게 집중하게 해 주었고, 다수를 쫓는 것 대신 저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아닌 저 스스로의 렌즈를 통해 나 자신에 대해 배울 수 있게 해 주었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