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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Jan 22. 2024

<나의 트랜지션 일기> 47장: 나의 신앙고백

용납받는다는 것

[47장: 나의 신앙고백]



사람이 무언가에 대한 의미를 탐구하게 되는건 바로 그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을때다.  

나는 ‘용납받는다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며 살았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용납받지 못하며 살아왔다는 뜻이다. 부친의 표현대로 ‘잘못되고’ ‘덜떨어져서’ 온전히 내 모습 그대로 용납받고 사랑받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낮은 자존감과 자기혐오로 인하여 울적해하고 괴로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완전한 무언가를 갈망했던 것 같다.     

‘나는 왜 태어났고, 내가 사는 이유는 뭘까. 내가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라는 문제가 나에게는 항상 제일 중요한 고민이었다. 탐구적인 성향이 강한 나는 철학 등을 포함한 인문학 책들을 탐독하려 애썼지만 속 시원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친구나 지인, 선배, 선생님 등의 주변인들을 통해서도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은 다들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다들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와 조건 속에서 제한적으로 생각하거나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모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자식을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고 하지만 부모들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자식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에 실패하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낳고 기른 부모조차 그러할진대, 하물며 혈연관계가 아니며 한 지붕을 공유하지도 않았던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결국 사람으로부터 온전히 이해받고 용납받는건 힘들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에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군대에서 온갖 인간 군상을 접하고 온갖 험한 일을 당하며 마음밭이 쑥대밭이 된 채로 전역을 했던 시기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지인의 끈덕진 권유로 성경을 읽어보게 된 나는, 논리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 –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 –을 강하게 받게 되었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성경에서 내가 크게 감화되었던 부분은 4복음서였다. 모든 인간을 만든 전지전능한 신이 직접 인간이 되어, 인간들 손에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속했다는 이야기는 내 삶에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 나를 만들었고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예수의 제자로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살고싶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렇게 찾아헤맸던, 내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완전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예수로부터는 내가 나로서 온전히 용납받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내 삶을 긍정하기 위해 나를 부인해야 한다는 그 역설에서 기독교 신앙의 정수(精髓)가 있었다.     

전역 후 대학에 복학한 나는 기독교동아리에 들어갔다. 성경과 신앙서적을 탐독하고, 각종 예배와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고학년 시절에는 리더까지 맡아가며 신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 운동’ 이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가 흐르는 세상일까, 그 세상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밤낮으로 고민했다.     


그랬던 나의 신앙은 대학교 졸업 후, 성별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사실 그때까지의 내 신앙관은 굳이 따지자면 강경한 복음주의 쪽에 속했기 때문에 성서무오설(성경은 단 한 글자도 틀릴 수 없다는 관점)을 지지하는 등 굉장히 보수적인 편이었다.

하느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고 강하게 믿고있던 사람이 자신이 ‘남성’임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 것이니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혼란스러움에 더해,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한국 기독교계의 현실 때문에 내가 설 자리는 더욱 없어지게 되었다. 같이 신앙생활하던 기독교동아리와 교회 사람들과는 전부 연락이 끊어졌고, 새롭게 다닐만한 교회도 마땅치가 않았다. 진보적이라고 자부하는 교회에서조차 트랜스젠더인 나는 동등한 이웃이나 지체가 아닌 호기심과 낯설음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 사회에서 가는 곳마다 혐오와 배척을 당해야 하는 내가 적어도 교회에서만큼은 수용받고 싶다는게 욕심이었던걸까. 상처는 계속하여 늘어만 갔고, 아무 걱정없이 신앙에 열정을 불태우던 대학 시절이 그리워졌다.     


하지만 그렇게 상처받은 이후에는 기독교인 중에서도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포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기독교인들에 비하면 숫자가 적어보일수는 있겠지만, 성소수자를 동등한 이웃으로 존중하며, 기독교계 안에서 온갖 부당한 모욕과 공격을 감내하면서까지 성소수자 권리옹호의 목소리를 내셨던 분들도 많다. 초록나무 故임보라 목사님이나 감리교단에서 재판받고 있는 이동환 목사님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이분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참 많았다. 무엇이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고 무엇이 진정한 예수의 사랑인지를 늘 고민하고 실천하며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낙인을 같이 감당해가는 모든 기독교인 앨라이 분들에게 감사와 지지의 말씀을 드린다.     



존재 자체로 죄인 사람은 없다.


성소수자가 기독교인일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단연코 ‘그렇다’ 이다. 그렇게 혼란과 상처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기독교를 믿는다.

이 땅의 모든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예수가 왔다고 나는 믿는다. 나의 상처, 나의 트라우마, 나의 디스포리아, 나의 약한 면과 위태로웠던 순간들, 그리고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기로 한 결심 모두, 그 분의 완전한 섭리와 사랑의 일부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아직도 나 자신과 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모르는게 많다. 하지만 나는 모든걸 알아서 믿는게 아니라 알고 싶기 때문에 믿는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의미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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