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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Jan 18. 2024

<나의 트랜지션 일기> 46장: 모자라더라도

괜찮다

[46장: 모자라더라도]



그 학대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오랫동안 ‘좀 모자란 사람’ 이라는 정체성을 갖고있었다. 이제는 내 경험을 학대라고 해석할 수 있고 나를 좀 더 객관적이고 너그럽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예전에는 그것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얌전하고, 책을 좋아하고, 공부도 곧잘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모범생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거나 나에게 호감을 가질 때마다 늘상 마음 한 켠이 찝찝했다. 사람들이 나의 ‘모자란’ 실체를 알면 실망할 것 같아서이다.      

나는 아무것도 잘하는게 없고,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거 같고, 나 자신이 남들보다 훨씬 뒤떨어지고 하찮게 느껴졌다. 부친의 말에 대해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미 지독히도 내재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감각은 나에게 지독한 우울감과 자기혐오로 다가왔고,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학업 스트레스까지 더해져서 정신적으로 감당하게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일상생활도 무너진 나는 엄마한테 말해서 정신과를 같이 갔다. 그 와중에 처음 찾아갔던 병원 의사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여자애같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두 번째로 찾아간 병원에서 검사를 했더니 심각한 우울증 상태라고 진단이 나왔다. 학교는 출석만 겨우하고 몇 달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내가 그 정도로 힘들어하자 부친은 더 이상 나를 건들지 않았다.           


그렇게 우울증은 치료받게 되었지만 내 내면의 문제까지 해결되지는 못했다. 

성인이 되어서 겪는 알바나 군생활 등의 위계적인 상황에서 나의 트리거는 계속 자극되었고,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하다가 내가 정말 남들과 다르고 남들보다 뒤떨어지는게 맞다면 아예 장애판정을 받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내가 이 사회에서 조금 더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졸업 후 새롭게 시작한 심리상담에서, 나는 첫 회기부터 장애판정을 받고싶다는 말을 했다.

상담선생님이 나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그것을 원하는지를 묻고 나는 나의 가정사를 상담선생님에게 줄줄 풀어내게 되었다. 그 때 꽤나 마음이 먹먹하고 괴로웠던거로 기억한다.  

그렇게 나는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내면에 깊게 자리하고 있던 상처를 직시하고,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결국 나는 부친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제는 나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존재의 부정을 당한다는건 이런 무게를 갖는다.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기 이전에, 어렸을 때의 나의 존재는 이런식으로 부정당해왔다. 그래도 그 때문인지 나는 어렸을때부터 소수자에 대해 가깝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으로 분류되지 않았다고 해서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구나 부족한 점이 있고 그렇기에 서로 어울려 도우며 살아가야 하지 않나하고 생각했고, 내가 어렸을때부터 전전긍긍했던 그 낙인의 시선을 이미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연대감을 느꼈다.  

그래서 장애인인권운동에 동참하며 장애인의 권리와 장애인의 자립생활에 대해 많은 고민과 활동을 해왔다. 사람들은 시혜와 동정을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나쁜 장애인’들을 불편해하지만,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 즉 아무도 배제되지 않고 아무도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비장애인들이 더 불편해져야 한다. 


비장애인들의 출근길은 5분만 지연되어도 큰일나는거로 여겨지지만, 장애인들의 권리는 수백 년간 지연되어왔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라는 드라마가 굉장히 대히트를 쳤다. 물론 누군가한테는 판타지스러운 얘기라 불편할 수 있고, 비판받을 지점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유의미한 질문을 던져줬다는 점에서는 나는 좋게 생각한다. ‘이상한’ 존재로서 우영우가 받는, ‘정상’인지 아닌지 집요하게 검열하려고 하는 시선들. 바로 내가 받아왔던 시선들이다. 우영우를 보면서 만약 ‘이상한 여자 ooo’ 이라는 제목의 트랜스여성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면 트랜스여성을 재현함에 있어서 현실성을 상당히 포기해야 되겠지만.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있고 아름답습니다.”


감명깊었던 화가 많았지만 특히 마지막화의 우영우의 이 대사를 듣고 펑펑 울었다. 이 사회에서 ‘이상한’ 존재로서 살아가는 내 삶도 역시 그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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