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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석 Jun 28. 2016

행운과 불운은 동시에 존재한다

시대에 적응하는 우리의 방식

장영실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GE를 설립한 에디슨과 비견될 만큼 발명에 일가견이 있었던 천재죠. 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물시계,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어 낸 조선의 학자입니다. 물이 흐르는 원리를 이용하여 종을 울리도록 만들어진 자격루는 이전과는 달리 모든 과정이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시계를 만든 그의 재능에 깊이 감복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관가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였습니다. 신분의 벽이 엄격했던 조선사회에서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무언가를 만들려 열심히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공을 빼앗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죠. 게다가 수도인 한양과는 멀리 떨어진 동래(현재의 부산)에 위치한 장영실의 재능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랬던 그가 세종의 눈에 띌 수 있었던 계기는 전국적으로 발생한 자연재해였습니다. 동래현에 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릴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장영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로를 파고 물을 끌어올 수 있는 수차(오늘날의 양수기)를 만들었습니다. 가뭄은 곧 해결되었고 이 소식이 세종의 귀에 들어가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양으로 온 장영실에게 세종이 지원한 내용은 파격적이었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히 쓰겠다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장영실은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익히기 위해 2차례나 중국 유학을 다녀오고, 종 3품 대호군에까지 오릅니다. 감이 잘 안 오시는 분들을 위해 좀 풀어보자면 오늘날에 장관에 해당하는 판서가 종 2품입니다. 그가 노비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는 어마어마한 성공이었습니다.


장영실은 세종의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뛰어난 발명품을 연이어 쏟아냅니다. 천체관측 기구인 혼천의와 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공공장소 설치용 해시계인 양부일구, 스스로 울리는 물시계인 자격루, 비의 양을 계산하는 측우기 등이 그 결과물입니다. 그의 발명품은 농업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자연의 규칙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안내자 역할을 했습니다. 


이 사례를 보면 지음(知音)이라는 고사로 유명한 거문고의 달인 백아(伯牙)와 그의 친구 종자기(鐘子期)가 떠오릅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느꼈던 감정을 알아준 이는 천하에 종자기가 유일했습니다. 아마 장영실과 세종의 관계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요?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을 알아준 세종의 인품이라면 능히 이들과 비교할만합니다.


만약 그가 20년 일찍 세상에 태어났더라도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요? 아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세종의 아버지는 2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살아남은 태종 이방원. 지옥과 같은 전장을 헤쳐온 인물이니 당연히 세종과는 생각이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장영실은 자신이 살았던 마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관가의 노예로 평생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가 세종을 만난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노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건 가마 파손 사건입니다. 1442년 봄에 세종이 타고 있던 가마가 부서지며 왕이 땅바닥에 구르는 수모를 당합니다. 이후 가마의 제작자를 추궁하고 벌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제기됩니다. 공교롭게도 총괄 책임자는 장영실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관직을 빼앗기고 곤장을 맞은 뒤 지방으로 유배됩니다. 


그런데 좀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해임 사유입니다. 물론 왕이 가마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구르도록 만든 건 그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중죄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이 많은 장영실이 파직되고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또한 장영실을 그토록 아꼈던 세종이 가마 하나가 부서진 사건을 빌미 삼아 그의 관직을 삭탈했다는 것도 의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도 여러 가지로 나뉩니다.


이 중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장영실이 이룩한 과학적 업적이 그 당시의 강대국인 명(明) 나라의 심기를 거슬렀고 이 때문에 그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입니다. 그 당시 천문학, 즉 역법은 황제만이 다스릴 수 있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천문학은 좀 거칠게 말하면 하늘의 규칙을 읽는 공부입니다. 만약 조선의 누군가가 그 이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명(明) 황제의 정통성이 약해지기 때문에 그들은 이 문제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장영실이 발명한 것은 다 이 분야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세종은 자연스럽게 명 황제의 시기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가마 사건은 이런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하나의 계기였던 셈이죠.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이후에는 없는 관계로 그가 말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파악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방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을 수도 있고, 관직을 빼앗긴 것에 절망하여 폐인처럼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연구와 조사가 병행된다면 그의 마지막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의 업적이 이렇게 저평가된 부분에 대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세상을 바꾸는 법칙이나 발명품을 만들어 내는 일은 신성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만약 그 당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회가 있었다면 장영실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도 있었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장영실의 인생에는 행운과 불운이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세종을 만나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반면에 중국의 기에 눌려 성과를 내고도 인정을 받지 못한 점은 안타까운 부분이죠.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있다면 ‘행운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진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기회의 신은 앞머리가 무성하고 뒤는 대머리인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잡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대를 읽으며 현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고민해야 하죠. 


머릿속으로 ‘방향을 설정하지 않고 표류하는 작은 조각배’를 떠올려 봅시다. 소용돌이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조각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도와 나침반을 갖고 움직이는 범선이라면 그 장소를 쉽게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인생에 필요한 나침반과 지도를 갖도록 노력합시다. 현재 상황을 분석하는 눈과 미래를 준비하는 태도가 이에 비견될만합니다. 없다면 지금부터 만들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생각보다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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