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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 바람처럼 Mar 28. 2024

저, 악수하기 싫은데요?,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저, 악수하기 싫은데요?,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남자의 손은 축축했다. 방금 피우고 들어왔는지 몸에선 담배냄새와 음식냄새가 섞여 났다. 일어나 반가운 듯 땀이 밴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얼마 전 새로 온 부서는 대민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라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하루에도 수없이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봐주길 원한다. 특히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직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 이름을 붙여 인사해 줘야한다. 정치인도 아닌 나는 하루 종일 악수를 한다. 억지로 술을 마셔야 할 때도 있다. 남자들은 만나면 술 한 잔 하자는 말이 인사다. 꼭 해야 하는 약속부터 그냥 지나는 인사로 하는 말까지 술 못 마시는 사람은 인간관계는 포기해야 하는 사회다. 

 

나는 원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다. 제일 싫은 게 붐비는 거리다. 출근길 사람들 수백 명이 인도를 빼곡히 채우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갈 때 앞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가면 끝까지 연기를 참고 맡아야한다. 차에서 뿜는 매연들, 사람들 몸에서 나는 냄새, 특히 후각이 발달한 나는 사람들이 붙어 있는 게 더 싫었다. 학교 다닐 때도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구내식당이나 분식집으로 혼자 밥을 먹으러 가는 나를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개인주의 기질이 있었던 거다.

 

그런 내게 이 책은 폭포처럼 다가왔다. 표지 날개에 적힌 저자의 속내는 바로 내 마음이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그가 먼저 하고 있었다. 읽어갈수록 막힌 곳이 뚫리고 가슴 속이 시원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이렇게 답답할 때 이런 책을 만나다니 정말 행운 같았다. 저자의 말 한마디마다 짜릿한 쾌감과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저자의 말 중에 인간 본성이 그리 선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니 의외였다. 얼마 전 본 영화 「스토닝」이 생각났다. 중동 이란에서 남편이 아내를 간통죄로 몰아 투석형에 처하는 내용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잔인함의 극치를 봤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이런 폭력이 난무한다. 이를 보고 인간이 선한 종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악하고 폭력적인 본성을 견제할 장치를 정교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현실감 있게 와 닿았다. 제도나 구조가 그렇지 못한데 한 개인의 양심과 인격에 모든 책임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곳곳의 현상을 진단하며 수많은 사건을 통해 인간본성의 민낯을 봐온 판사의 시선으로 나름의 제안을 한다. 총체적 난국인 우리 사회에서 대안 모델을 어디서 찾아야할지 마음이 무거웠다. 읽고 나니 오히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자의 말처럼 정답은 없다. 보고 베낄 모범답안은 전 세계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다름을 인정하는 ‘톨레랑스’와 같은 시민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미개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문명화된 성숙한 인간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집단주의는 가부장제 유교문화의 잔재다. 나보다는 집안과 가문을 중시하고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공동체 사회에서 개인 보다는 집단이 우선이었다. 근대화를 거치며 서구 민주주의나 개인주의를 기초로 하는 자유주의가 뿌리내리기도 전에 일제의 지배를 받았고 해방 후 군사독재로 이어졌다. 유교사회에서 일제의 관료주의, 군사문화로 이어지는 동안 개인에 대한 그 어떤 관심도 둘 새가 없었다. 개인의 가치도 주목받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런 개인의 각기 다른 다양성을 존중하기까지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는지 모르겠다. 저자의 말처럼 문제를 구석구석 진단해서 그것에 맞는 해결 방법을 하나씩이라도 찾아 개선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이 행복한 사회를 위해 그 많은 모순에도 공통의 가치를 도출해내고 끊임없는 대화와 타협 속에 개선점을 찾아야 한다. 책을 읽어갈 수록 나도 내 목소리를 내고 싶어졌다. 자꾸 할 말이 쏟아져 나왔다.

 

저자도 행복나라의 전제조건을 높은 세율도 그 혜택이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온다는 사회적 신뢰 구축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저자는 많은 이가 공감하는 북유럽 사회의 모델을 보며 개인과 다름이 존중받는 사회도 이상 국가에서만 가능한 건 아닐 거라는 희망을 얘기한다. 전에 읽은 책,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가 생각났다. 그때도 절대 공감했던 촛점은 우리 사회에서 왜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불행한 사회가 되었는가 였다. 덴마크의 사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그 소득 재분배에 대한 사회적 신뢰였다. 국민 행복지수가 높았던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형성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불행한 이 시점, 가장 큰 원인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해서다. 그러니 일단 되고 보고 성공하고 보자는 식, 결과가 중요하지 과정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회다. 나도 널 못 믿고 너도 날 못 믿는 사회, 그러니 세금을 정직하게 내는 건 바보로 취급된다. 분배에 대한 신뢰와 지도층의 정책에 대한 확신과 그를 믿고 따르는 국민들의 합의가 바탕이 될 때 고율의 세 부담을 기꺼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그 세원이 결국 나와 내가족의 삶의 복지를 위해 쓰일 것을 믿고 국가는 그대로 실행해주는 나라가 될 때 가능하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똑같이 내고 있고 내가 낸 세금이 나의 실업과 의료, 노후는 물론 내 자녀의 교육을 위해 쓰인다는 것을 믿을 때 50퍼센트에 육박하는 세금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그 믿음이 없는 한 복지국가는 실현 불가능하고 국민은 지금의 우리처럼 영원히 불행하다. 

 

지극히 소심한 개인주의자인 나는 어떻게 집단주의 사회에서 나 개인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 그리고 사회와의 합일점을 찾아야 하는지 사실 책에서 답을 얻고 싶었다. 저자는 집단주의에 촛점을 맞춰 사회의 문제현상을 짚어내며 개인주의자로서 겪는 사회 속에서의 어려움과 갈등을 기술한다. 후반부로 가면서는 법조인 특히 판사로서 일선 사건에서 접했던 사례들을 이야기했다. 각각 의미있는 일화들이지만 앞부분에서 말한 개인주의 성향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찾기 어려웠다. 같은 개인주의자로서 집단주의 사회 곳곳에서 어떻게 접점을 찾아야 하는지 현실적인 고민이 아쉽다. 

 

신뢰는 개인의 삶에서도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사랑, 우정, 존경 등 인간관계의 감정도 신뢰에서부터 싹트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 차원이나 사회 속에서나 모순과 갈등의 원인은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불신으로 가득 차 허울과 체면, 위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우리 사회, 그 속에서 나도 사회적 가면을 쓴다. 

 

내가 가진 내향성이 나를 개인주의자로 정의한다고 보진 않는다. 내향성은 개인주의가 가진 속성의 일부이다. 다만 외모가 다르듯이 사람의 내면도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요즘은 외모도 표준화되어 간다. 이상적인 형태를 정해놓고 모두들 그 틀에 맞춰 깍고 세우고 만든다. 외모도 표준화하는 데 통일된 내면의 요구는 자연스러운 강요인지 모르겠다. 

 

살아오면서 내면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 확신이 있었다. 각자에게는 유일무이한 고유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돌이킬 수 없는 단 한 번의 위대한 실험, 그것이 삶’(「고독의 즐거움」에서) 아니겠는가. 각자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고 자기만족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변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한 사람은 각자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 개인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 타고난 개별성과 존재의 가치를 존중할 때 개체의 존엄성은 확보된다.

 

책을 읽으며 느낀 공감에서 용기가 생겼다. 어쩌면 삶에 있어 진실은 용기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눈 속으로 내딛는 단 한 발자국도 산을 뒤흔들기엔 충분’(「예상밖의 전복의 서」에서)하지 않겠는가. 

오늘부터 소심한 개인주의자의 작은 반란을 꿈꾼다.

 

“저, 악수하기 싫은 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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