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제나 바람처럼 Mar 28. 2024

얼굴에 그리는 그림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를 읽고

얼굴에 그리는 그림,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를 읽고


 

토요일 오후, 늦잠을 자고 일어난 딸애가 외출준비에 한창이다. 아이는 여고 1학년이다. 전학 간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고 꽃단장에 열심이다. 사실 몇 달 전 아이의 공부를 포기했다. 포기했다는 말이 맞다, 처음에는. 

 

몇 년 전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책을 읽었다. 그때 덴마크에서 국민 행복지수 1위 복지국가 모델을 보며 우리 사회가 왜 불행한지 알게 됐다. 덴마크 국민의 높은 행복지수는 사회적 신뢰구축이 기반이라는 사실이 의미있게 와 닿았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똑같이 세금을 내고 내가 낸 세금이 나의 실업, 의료, 노후는 물론 내 아이의 교육에 쓰인다는 사실을 믿을 때 고율의 세금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소득재분배에 대한 사회적 신뢰의 부재로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일은 바보로 취급되는 우리 사회를 생각했다. 그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 차원에서도 나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신뢰’라는 것을 확인했다. 사랑, 우정, 존경과 같은 인간관계의 모든 감정도 신뢰에서부터 싹트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 속에서나 개인의 삶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치는 신뢰이며 신뢰가 전제돼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책은 당시 내게 많은 부분 생각을 다시하게 했다. 하지만 사실 책 내용이 옳다고 해도 내 삶에 직접 적용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의 공부에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나 개인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 그리고 사회와의 합일점을 찾아야 하는지 답을 얻고 싶었다. 한 개인으로서 사회 곳곳에서 어떻게 접점을 찾아야 하는지 현실적인 고민에 부닥쳤다. 

 

아이는 미술을 잘했다. 전국 고교실기대회에서 특선을 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영어, 수학 공부를 놓을 수는 없었다. 미대 입시마저 실기가 아닌 수능성적으로 뽑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과외교사가 돼서 참고서로 선행학습을 시켰다. 워낙 기초가 없던 아이는 수학 제곱근 편에서 나와의 끈질긴 사투 끝에 코피를 쏟기도 했다. 온 전력을 다해 아이 공부에 매달리다보니 직장인인 나도 너무도 힘들었다. 다행히 아이의 점수는 올랐지만 어느 순간 참고 따라와 줬던 아이가 백기를 들었다. 시험기간 내내 잠만 자는 아이를 보며 모든 걸 내려놓게 됐다. 한편 아이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공부를 포기한 삶이 어떨지 절망감이 앞섰다. 

 

책에서 이야기하듯이 아이들의 미래에 많은 선택지가 있다면 공부 아닌 다른 길에서도 잘 살 수 있다면 택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교육 과정에서 공부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반에서 10퍼센트 아이들만 공부에 관심 있고 나머지 90퍼센트는 책가방만 들고 오가는 들러리라고 생각했다. 내 아이들이 들러리인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랐다. 어느 집단이건 그 속에서 주도적 인물, 리더가 되기를 바랐다. 그때 까지는 공부를 놓아버린 아이를 패배자라고 내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책을 읽은 후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의 편견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자의 체험을 통해 덴마크에서 보고 받은 감동이 마음의 불신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읽기 전과 후 나는 조금씩 달라지는 중이었다. 

 

모처럼 주말 저녁 기숙사에 있던 큰 아이까지 와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식탁 한 쪽에 앉아 이야기를 줄곧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아이들 말에 공감이 됐다. 생각해보면 이 아이들이 몇 년 후 졸업해 사회 구성원이 된다. 사회 속에는 학창시절 공부 잘하는 10퍼센트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90퍼센트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못한 우리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이고 그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움직인다는 생각에 미쳤다. 이들의 취향에 따라 유행이 생기고, 사라지고 이들이 좋아하는 것이 인기를 끈다. 이들이 먹는 음식이 많이 팔리고 이들이 듣는 음악, 영화, 패션, 게임이 뜬다. 결국 이들의 코드를 예측해 읽어내는 일에 기업가들은 사활을 건다. 

 

그날 밤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내가 만든 편견에 스스로 갇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에 매달려 서로를 불행하게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사회 속에 리더만 있는 것은 아닌데 리더만 가치 있고 그 삶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비로소 귀에 들어왔다. 삶 속에서 무수한 경험을 통해 형성된 나의 왜곡된 관념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것이 참다운 가치인지, 삶의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조금씩 보였다. 책에서 받았던 메시지가 이제야 내 현실 속에서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내면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 확신 하나가 있었다. 각자에게는 유일무이한 고유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고 자기만족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 자식에게만 예외였는지 나를 돌아봤다. 나는 용기를 냈고 나와 아이는 공부에서 해방됐다. 공부는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감옥이었던 것이다. 공부를 내려 놓으며 아이와 나 둘 다 행복해졌다. 아이가 화장하는 것도 청소년 비행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말렸을까, 내 기준으로 모든 걸 결정하려고 했을까. 화장은 얼굴에 그린 그림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을 믿어줄 때 아이는 스스로의 삶을 경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이의 꿈은 디자이너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책이 개인적 차원의 삶의 가치 찾기였다면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 는 우리, 이웃, 사회, 국민 차원의 가치 찾기다. 행복의 근원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른 사람에게로 확장한다. 더불어 행복할 수 있으려면 나 뿐 아니라 이웃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내 행복은 다른 사람도 행복해야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는 나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 속에 형성되어 온 것이다. 나의 행복의 토대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개인은 사회와의 관계망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삶과 이웃,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이 바뀌었다.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주어진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우리 안에는 이미 많은 ‘덴마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꿈은 발견하는 게 아니라 찾아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행복나라라는 꿈도 실천 속에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잃어버렸던 ‘덴마크’ 정신을 찾아서 참다운 가치를 향해 실천해 나갈 때 우리도 나도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말이 현실감 있게 와 닿았다. 우리 국민의 모이기 좋아하는 성향, 배우는 데 탁월한 능력, 그런 것들 때문에 오히려 올바른 철학과 방향만 설정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공동체, 행복나라 건설도 산업화의 기적처럼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 덴마크의 사례는 내 마음에 남아있던 불안의 불씨를 완전히 꺼트려버렸다. 

 

삶에 있어 진실은 용기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나 개인은 사회의 일부다. 내가 변할 때 사회는 이미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첫발을 떼었으니 ‘스스로, 더불어, 즐겁게’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눈 속으로 내딛는 단 한 발자국도 산을 뒤흔들기엔 충분’(「예상 밖의 전복의 서」 에서) 하지 않겠는가.

 

아이의 능숙한 아이섀도 붓터치를 넋 나간 듯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입술에 틴트를 톡톡 바르더니 입술을 모아 위아래로 두어 번 붙였다 떼면서 말한다.

“일찍 들어올게요, 걱정 마요.”

아이는 내 마음을 읽고 있었나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저, 악수하기 싫은데요?,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