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그 기억들로 돌아갈 순 없지만.
花樣年華.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중경삼림, 춘광사설, 그리고 화양연화. 모두 인상 깊게 본 영화들이었다. (가장 처음은 화양연화였고 나머지 영화들은 그 이후에 따로 찾아본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 하면 바로 화양연화를 주저 없이 꼽을 수 있다. 교양 수업으로 들었던 영화 관련 수업에서 영화의 미장센을 예시로 들을 때에서야 제대로 보았다. 솔직히 왕가위 감독의 이름이야 많이 들었어도,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에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제 때에 보지 못한 탓도 있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은 대체로 감각적이고 영화 속 미장센이 화려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화양연화에서는 그야말로 내용적인 면과 더불어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의 이전 작품들을 보면 대체로 주인공들은 쿨한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은 내면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이 주로 주인공이었고, 영화의 내용적 측면에서도 한번 봐서는 쉬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내용들이었는데, 화양연화는 주인공들이 딱히 복잡한 과거사를 지니지도 않았고, 스토리상으로도 흠잡을 곳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충실히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었고, 다만 서로 부부간의 사정이 좀 있을 뿐이다.
화양연화는 불륜을 다룬 영화이다. 그렇지만 흔히 생각하는 불륜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주인공은 주모운 역의 양조위와 소려진 역의 장만옥인데, 두 사람은 홍콩과 상하이에서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에 서로 나란히 입주하게 되고 각자의 남편과 아내가 직업상의 문제로 자리를 비우는 날이 많았다. 같은 아파트 이웃이었던 둘은 마주치는 일이 많게 되고 그 사이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주모운은 자신의 아내가 소려진과 똑같은 핸드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소려진도 자신의 남편이 주모운과 똑같은 넥타이를 한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의 반려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려진은 자신의 남편이 불륜을 저지른 것을 알았어도 사랑하는 남편을 떠날 수 없고, 같은 입장에서 소려진과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주모운의 입장도 애틋하기만 하다.
그래서 저 둘이 대놓고 맞바람이라도 피게 되는 내용이었다면 이 영화는 그저 그런 삼류 막장 영화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서로의 배우자가 불륜 상대라는 것을 알았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두 사람. 그저 하는 것이라곤 서로를 만나 위로하는 것뿐. 연민은 쌓이고 쌓여서 애절한 사랑으로 발전하지만 자신들의 배우자들과 똑같아질 수 없는 두 사람의 마음이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그 어떤 유혹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 중년의 두 남녀는 그렇게 자신들의 사랑을 혼자 머금으며 속으로만 삭힌다. 서로 좋아하지만 다가갈 수 없고, 맺어지지 못할 인연. 제목인 화양연화의 뜻이 인생의 즐거웠던 한 때를 가리키는 말임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이 둘의 사랑은 참 숭고하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불륜이긴 하지만 이 둘은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사랑을 끝끝내 지켜냈다. 자신들을 더럽히지 않고, 이해하게 만들고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 이입하게 만들었다. 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지 않아서 이 영화가 더 기억에 남았다. 평생 그리움으로 간직될 사랑. 그 사랑의 크기는 절로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주모운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구멍 뚫린 벽에 무언가 속삭이는 모습은 말 그대로 이 영화의 백미. 이 영화가 왜 명작인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자신의 안타까운 사랑을 열심히 고백하고 묻어둔 채로 앙코르와트 사원을 빠져나오는 주모운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문세의 옛사랑 가사의 한 줄처럼.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버려 둔 것'일 수도 있고, 전인권의 걱정 말아요 그대의 한 줄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더라도 두 사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모르죠. 옛날엔 뭔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어떻게 했는지... 산에 가서 나무를 하나 찾아 거기에 구멍을 파고는 자기 비밀을 속삭이곤 진흙으로 봉했다 하죠. 비밀은 영원히 가슴에 묻고서.
영화의 화면은 왕가위 감독 영화답게 매우 감각적이다. 사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의 대사보다도 그냥 화면 그 자체로 보여주는 것이 참 많은 영화다. 홍콩의 거리 모습과 소려진 역의 장만옥의 화려한 의상, 화면상의 구도와 같이 그냥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는 것들. 그리고 소려진이 나올 때마다 흐르는 Yumeji's Theme이나 다른 음악인 냇 킹 콜의 Quizas, Quizas, Quizas.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절로 흥얼거리게 만드는 중독성과 함께, 이 영화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