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렇게 결국 아버지가 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살면서 한 번은 들어봤을 이 말, 가족이란 것은 그 의미가 확립되기 전부터 당연하게도 혈연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시되어왔다. 굳이 국어사전적 의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가족이라 함은 부모 자식 간의 피(DNA)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건 설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란 존재는 무엇일까, 그리고 아버지란 존재가 되었을 때, 가족의 의미라는 것은 또 무엇일까.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그 의미에 대해 묻는 영화다. 영화는 6년간 키워온 자신의 아이가 사실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뒤바뀐 아이였다는 것을 남자 주인공인 료타가 알게 된 후부터 본격적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자식을 찾아 나서게 되는 부분부터 이 영화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 결을 섬세하고도 조용하며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결코 유난스럽거나 감정이 과하지 않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두 가족이 만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실제로도 그럴법한 과정처럼 그려진다.
영화 속 아버지의 상으로 나오는 료타와 유다이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들이다. 성공한 건축가의 인생을 살며 출세가도의 길을 달렸던 료타와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순 없지만 그 누구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린 유다이. 당연히 그 교육방식부터 모든 것부터가 다르다. 영화는 둘 중에 누가 더 나은지에 대해서 비교하려 하진 않는다. 다만 둘 사이에 중간 지점을 말해준다. 누가 더 낫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둘 모두를 합해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두 가족은 4번의 만남 끝에 주말만이라도 서로의 아이와 지내보기로 했고 자신이 보기에 유다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료타는 두 아이 모두 자신이 거두려 했으나 계획은 실패하게 되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아이들은 결국 각자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강제로 선택받게 된다. 료타는 자신의 방식대로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원래 친자식이었어야 할 류세이를 가르친다. 자신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이 정도는 따라올 것이라면서. 괜찮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선천적인 요인 못지않게 후천적인 요인(자라온 환경) 또한 아이에게 있어서 중요하다는 걸 료타는 알지 못했다. 자존심이 강하며 매사에 철두철미,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그는, 아이를 이해하려 들기보다는 자신의 방식대로 가르치는데 익숙한 사람이다. 매일 영어 공부를 할 것, 지금부터 본인을 아버지라 부를 것. 게임은 하루에 30분만 할 것 등을 정하지만 류세이는 왜?라는 대답만 줄곧 할 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무언가를 새로 가르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관람객도 알고 있고 감독도 알고 있는 것을 료타만은 모르고 있다. 왜?라는 대답에 그냥.이라는 지극히 어른의 방식으로 대답하는 료타의 모습에서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모두 어떤 것의 처음이 된다. 처음 아이가 되기도 하고 처음 어른이 되기도 하며, 마찬가지로 처음 부모와 자식이 되기도 한다. 인생이란 시작부터 끝까지 ‘처음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실수와 후회의 반복으로 가득 차 있다. 료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크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료타는 처음 해 보는 아버지라서 아이가 어떤 마음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갈등이 고조된 끝에 류세이는 원래 있던 자기 집으로 가출을 시도한다. 그리고 료타는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류세이를 이해하며 조금씩 바뀌어 나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류세이가 살아온 방식을 존중해주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그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처음인 사이다.
그리고 류세이와 함께 지내며 자신이 메몰 차게 내쳤던 아이에 대한 미안함 역시 고개를 든다. 낳은 정이 먼저냐 기른 정이 먼저냐의 문제는 아니다. 그저 모두 다 같은 부모이자 자식일 뿐이다. 극 중 료타는 카메라를 많이 만지는데, 그가 6년 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케이타(바뀐 자식)는 그런 그를 닮아서인지 카메라를 곧잘 다루곤 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카메라를 들고 가족들 사진을 찍던 그는 우연히 케이타가 찍은 사진을 보게 된다. 온통 자신으로 가득한 사진들. 대부분은 자고 있는 사진들 뿐이었다. 자기 딴에는 아이에게 신경 쓴다고 했으나 아이가 자신을 바라볼 때 료타는 그저 잠을 자고 있었다. 그제야 료타는 자신이 케이타에게 얼마나 나쁜 아버지였는지 깨닫게 된다.
사실 료타는 평범하지 않은 가정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 아버지와 살고 있는 어머니는 자신의 친어머니가 아닌 계모이다. 그리고 료타는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형을 살뜰하게 챙겼다. 어린 료타는 류세이와 마찬가지로 친모를 찾아 집을 가출한 적이 있었다. 핏줄을 중시하며 어떻게든 될 것이라 한 아버지의 말을 듣고 과감하게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자신의 친자식이 아님에도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그를 후회하고 달라지게 만든다.
영화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부성애는 아이를 가리는 것은 아니다. 내 손으로 낳은 아이도 내 아이고 내 손으로 기른 아이도 내 아이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료타는 그 사실을 깨닫는다. 처음부터 완벽한 아버지는 없다. 우리 모두는 결국 그렇게 스스로 부딪히고 상처 입고 또다시 회복하며 결국 그래서, 그렇게 아버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