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 있으면서도 때론 친구같은
한국에서 직장 생활은 해 본 적이 없었지만, 해외 생활을 하며 숱한 아르바이트와 싱가포르에서의 직장 생활로 인해 많은 상사들을 만났다. 서양에서는 상사와 사원의 관계가 수평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동양에서는 아직도 '상사'와 '직원' 이미지를 떠 올렸을 때 수직 구조의 모습이 먼저 떠 오르는 게 사실이다.
나는 레스토랑의 오프닝 멤버였다.
싱가폴에서의 첫 직장, 그리고 레스토랑의 오프닝 멤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나의 매니저도 정말 많이 바뀌었다. 레스토랑의 오프닝 멤버로 함께 일을 했던 여자 매니저 R, 그녀는 키가 컸고 늘 올림머리에 얇은 검은 뿔테 그리고 구두를 신었다. 카지노 매니저를 하다 와서 그런지 정말 카리스마가 넘쳤다. 한 번은 트레이닝 시작 전 싱가포르 친구 Imrran과 함께 이어폰을 한 짝씩 나눠 끼고 신나는 음악을 듣다 정말 된통 혼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Director에게 보고가 된 사건으로 지금 생각하면 웃음 나는 해프닝이지만 그땐 정말 무서웠다.
레스토랑이 본격적으로 오픈을 하고 밤 12시까지 남아서 혼자 리포트를 한 적도 있었고, 나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지만 몇 주 뒤 나는 오피스로 불려 갔다. 일을 잘하지 못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남들 눈에는 오피스에 오래 남아 있는다고 해서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을 제시간에 끝내지 못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불만이었던 셈이었다.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일수록 R은 함께 있으면 뭔가 불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일을 할 때만큼은 철저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우리 레스토랑은 센토사의 유명한 리조트의 소속이라 그런지 다른 레스토랑보다는 일이 조금 더 힘들었다. 독특한 콘셉트 때문에 전화와 이메일, walk-in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R은 자의에 의해서인지 타의에 의해서인지 다른 부서로 트랜스퍼되었다. 윗선에서 매니저가 큰 세일즈를 만들지 못해 다른 부서로 옮겼다는 말이 들렸다.
졸지에 매니저를 잃었다.
Y를 만나다.
급하게 다시 카지노 쪽에서 레스토랑 경험이 없는 매니저가 몇 주 동안 임시로 오게 되었다. 그렇게 한 두 명이 더 거쳐가고 매니저 Y를 만났다. 그는 우리 레스토랑처럼 Fine Dining에서 온 매니저는 아니었고, 호텔의 뷔페 레스토랑에서 오랜 경험이 있는 매니저였다. 우리 회사에서 약 7년 정도를 일했다. 그렇게 동료들과 나는 Y와 함께 본격적으로 레스토랑 오퍼레이션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성격이 참 좋았다.
누구와도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스타일이며 직원들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나에겐 그런 상사가 필요했다.
그 시절 나는 레스토랑의 리셉션에 일을 하였지만, 나의 Work permit(취업 허가증)에는 '웨이트리스'의 포지션으로 적혀 있었다. 그 이유인즉슨, 회사에서는 나를 원래 웨이트리스로 뽑은 것이었으나 취직을 하고 트레이닝을 받다 보니 이미지가 리셉셔니스트에 더 맞아서 레스토랑 오픈 이래로 나는 계속 리셉션에서 일을 해 왔다. 음식 서빙을 한 적도 없었고 누구보다도 더 많이 일을 했는데 나의 월급은 1년 동안 계속 웨이트 리스의 월급으로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른 부서의 동료들과 비교 해 보니 리셉셔니스트의 월급이 현저하게 높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매니저 R과 일을 할 때 이 부분에 대해 말을 했었다. 그녀의 답변은 '회사 측에서 웨이트리스의 포지션으로 입사를 한 것이기 때문에 임금을 높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레스토랑 오픈 일 년 뒤, 다른 리셉션 직원이 입사를 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고 우리는 Y와 상담을 했다. 그 날 이후로부터 Y는 우리의 편이 되어 윗사람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거절도 많이 당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우리는 결국 우리가 한 일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었다. 원래의 임금보다 40만 원 정도가 인상된 것이다.
그에게 참 고마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항상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바로 해결을 해 주었고, 헷갈리는 업무에 대한 질문을 하면 그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주어서 일이 절대 밀리는 법이 없었다. 직원의 입장에서는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데 상사가 답을 주지 않으면 정말 답답하고 곤란하게 되는데 그런 부분에서는 Y에게 정말 감사했다.
그는 잘 노는 상사였다.
직원들을 데리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기도 했으며, 일이 끝나면 마트에서 술을 사서 다 함께 마셨다. 강요도 없었고, 술을 마시는 그동안은 상사를 떠나 우리 모두 친구였다.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고기를 구워 먹고. 회식자리가 전혀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싱가포르에서는 상사를 'Boss'라고 부른다. 하지만, Y는 그런 호칭을 싫어했다. 우리 모두는 그를 '
Mr. Y'으로 불렀다. 때로는 우리에게 자신의 상사 혹은 회사를 험담(?) 하기도 하고, 직장 내에서의 우리의 고민을 해결 해 주기도 하고 편하게 대해 주어서 Y와 함께 일할 때는 키친 직원들(Back of the house)과 오퍼레이션을 하는 직원들(Front of the house)도 모두 사이가 좋았다.
보통 오퍼레이션이 시작되면 셰프들과 서비스 스태프들의 신경전이 날카로울 때가 많다. 헤드 셰프가 자존심이 센 경우가 있거나, 스태프들의 요구를 안 들어줄 때가 있다. 또한, 서로의 포지션이 다르기 때문에 일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 빈번히 작은 다툼도 일어나곤 하는데 Front와 Back의 관계를 원만하게 만드는 것도 매니저에 따라 달린 것 같다. 그런 면에서 Y는 최고의 상사였다.
그런 즐거운 시간들도 잠시, 나는 다시 호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여 결국 Y에게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 그는, 아마도 그와 일한 모든 사람에게 그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상사'이다. 그 시절 집보다는 회사, 가족보다는 동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던 그때. 나의 아름다운 20대 초반을 보냈던 싱가포르 그리고 3년이란 직장생활.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며, 좋은 동료들이라는 선물을 받은 곳이다.
About 헤더의 20살에 시작한 세계여행
헐리웃 배우 아담 샌들러에게 빠져 혼자 힘으로 미국을 가겠다는 생각에 20살이 되자마자 한국을 떠나 해외 생활 겸 여행 경비를 모으기 위해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그 후, 여행의 매력에 빠져 21살에는 호주에서 싱가폴로 건너가 3년간 거주하며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현재는 서호주 퍼스에서 살고 있으며, 해외 취업과 세계 여행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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