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숲속 아지트 #1
충남의 한 시골 구석에는 배경 음악으로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깔린 나만의 아지트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우리 아빠는 고향 땅에 있는 산에 당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은 잉어가 헤엄치는 연못, 봄이면 활짝 핀 꽃들, 겨울의 설경, 작은 텃밭에 자라나는 씨앗들.
처음 아지트를 구상하던 아빠의 상상 속에 자리 잡았던 그것들은 3년이 지난 지금, 전부 현실이 되었다.
사실 이 아지트를 만들기까지 아빠의 엄청난 노력과 돈, 시간이 들었다.
3일에 한 번씩 그곳을 찾아 바위를 나르고, 땅을 파고.
수십 번씩 산을 오르내리며 꼬박 3년을 투자했다.
점점 살은 없고 근육과 뼈만 남아 가는 아빠를 보면서 '그놈의 산을 3일에 한 번씩 가서 일하니까 살이 빠지지'라며 뱉지도 못하는 말로 타박하던 내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다.
'아, 우리 아빠는 아무래도 목수를 했어야 했다.'
한 번씩 찾아갈 때마다 휙휙 바뀌어있는 모습에 놀라길 몇 번.
꽤 그럴듯한 연못과 산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소리, 내 머리 위를 나는 새,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무 소리까지.
어딘가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던 예전의 그 산이 아니었다.
저 멀리 나무에는 다람쥐가 도토리를 가지고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그걸 보니 '아, 이 좋은 곳을 아빠 혼자 왔던 거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게다가 점심으로 먹는 김밥과 라면까지!
그곳은 이미 내 아지트로 자리 잡고 있었다.
산속에서 먹는 김밥과 라면의 맛에 푹 빠져 새벽 일찍부터 눈을 떠 아빠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가서 하는 일이라고는 정자에 누워 나무 소리 듣기, 점심때쯤 아빠 옆을 어슬렁거리며 밥 먹자고 재촉하기, 살짝 더워지면 손에 든 선풍기로 아빠 땀 식혀주기, 누울 자리를 찾아 내 옆에 다가온 벌레를 보고 아빠 부르기 정도였다.
사실은 코로나가 만들어준 아지트
사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산속 아지트에 홀딱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2020년 3월부터 내 계획대로라면 제주도에 있었어야 했으니까.
온 세상이 정체모를 바이러스에 멈춰버리고, 답답한 마스크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이미 휴학은 해버렸고, 가려고 했던 여행은 취소되고, 알바를 하던 키즈카페는 휴업을 하고.
결국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집'밖에 없었다.
여행이 좋아 돌아올 날을 정하지 않고 떠나려던 제주도는 기약 없이 멀어졌고.
엄청난 무력감과 슬픔은 코로나 블루를 넘어 코로나 레드까지 나를 이끌었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아빠 한 번 따라갈까? 도시락 싸서 먹고 얼마나 잘 꾸며놨나 구경해보자. 피크닉 간다고 생각하고."라며 우울에 빠진 딸에게 손을 내밀었다.
외로이 서있는 노란 수선화는 지난 3월, 마치 방황하던 내 모습을 닮아 있었다.
흙바닥에 혼자 우뚝 서있는 모습이 어딘가 쓸쓸해 보이기도 했지만, 가장 빛을 잘 받는 양달에서 혼자 햇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코로나는 나에게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안겼지만, 내가 모르고 지나갈 뻔했던 것을 볼 수 있게 해 줬다.
만약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제주도에서 바다를 보며 자유를 꿈꾸었겠지만, 나는 아지트 마른땅 위에 홀로 서 있는 수선화를 보며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
아빠가 아지트에 가장 먼저 만든 건 바로 연못이었다.
산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깨진 항아리를 거쳐 연못으로 흐르게끔 만들어놓은 아빠의 그림은 제법 예쁜 자연을 담고 있었다.
시작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나무를 통과하고 깨진 항아리를 지나 연못까지 흐르는 물은 제법 눈을 즐겁게 한다. 어쩌면 연못을 가장 먼저 만든 이유가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언제, 어떻게 완성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당신의 상상에 의존해 주변의 우려에도 계속해나가기 위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그 상상 속 그림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시원하게 흐르는 물줄기는 아빠에게 계속해도 좋다는 용기와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숲속 아지트가 있다.
그리고 그 아지트는 55세, 우리 아빠의 오랜 염원이 담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