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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지선 Sep 23. 2020

자전거 못 타고 수영도 못 하는 여행작가로서 살아남기

<웰컴 투 삽질여행>  영어듣기와 자전거와 수영

<웰컴 투 삽질여행>

영어듣기와 자전거와 수영




“영어듣기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학창 시절, 나는 전형적인 한국인 학생이었다. 영어를 글로만 배워서 도저히 귀가 뚫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들린다는 애들, 영어듣기 시험이 제일 쉽다는 애들은 대체 무엇인가 싶었다. 저렇게 발음을 굴려대는데 저게 들린다고? 영어듣기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꾸준히 찾아보았는데, 영어 마스터들은 대개 이렇게 대답했다.

“영어듣기는 자전거와 같아요. 안 되는 것 같다가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되거든요.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굴러가지 않다가, 균형 잡는 법을 익히는 순간 자전거가 굴러가는 것처럼요.”

“저 자전거 못 타는데요?”

“음, 그럼 수영은 어때요? 영어듣기는 수영과도 같거든요.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해져서 물길을 가르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거죠.”

“…….”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조언이었다. 그렇다. 나는 영어 듣는 귀도 뚫린 적이 없고, 자전거 페달도 밟을 줄 모르며, 수영은커녕 물에 뜰 줄도 모르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내가 영어듣기를 왜 못했는지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풀렸다. 일단은 어순이 완전히 다른 언어를 한국어로 해석하며 배운 공부법이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이고(이것은 내 탓이 아니다. 그렇게 가르쳐준 선생님들 탓이다….), 또 하나는 그냥 내가 흘리는 발음을 알아먹는 데 유난히 약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훗날 내가 한국어도 발음을 흘리면 남들보다 유난히 말을 못 알아먹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타깝게도 발음이 안 좋은 친구와는 대화를 오래 이어나갈 수가 없다. 아빠 발음도 종종 못 알아먹어서 엄마한테 통역을 부탁한다. 진짜다.) 영어듣기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풀렸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자전거를 못 타고 수영도 못한다. 



“자전거를 못 탄다고?”

“응.”

“어떻게 자전거를 못 탈 수가 있지?”

누구나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자전거를 타는 일본인들과 자전거 이야기를 하게 되면 항상 이 패턴이다.

“한국에는 자전거 못 타는 애들도 종종 있어. 경사진 곳이 많고 도로가 좁아서 자전거를 쉽게 탈 만한 환경도 아니고 대중교통도 저렴하니까. 자전거는 이동수단보단 취미의 영역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아.”

어릴 적 나는 유난히 움직이는 것을 싫어했고, 자전거 학습 또한 거부했다. 별로 타고 싶지도 않았고, 굳이 탈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자전거 학습 시기를 놓친 나는 그대로 자전거 못 타는 어른이 되고 말았다.

“친구한테 자전거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한 번 배운 적이 있긴 하거든. 그런데 못 타겠더라. 겁이 너무 많아졌어. 그리고 동네 할아버지가 자꾸 자전거 그렇게 타면 안 된다고 간섭해서 짜증나서 접어버렸어.”

자전거를 못 타서 딱히 서러울 일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외국만 나가면 그렇게 서러워진다. 자전거가 보편화된 몇몇 문화권이나, 대중교통은 열악해도 자전거만 대여하면 쉽게 돌아볼 수 있다거나 하는 곳에 방문했을 때 유독 그렇다. 한번은 오키나와의 무료 자전거 렌트 이벤트에 당첨된 적도 있는데, 써보지도 못하고 포기했다. 무섭다, 귀찮다, 요즘은 날씨가 안 좋다 등의 핑계로 여전히 자전거 배우기를 미뤄두고 있지만, 언젠간 여행을 위해서라도 자전거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언제 배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미 자전거를 못 배우는 몸이 되어버렸으면 어떡하지?)     



“수영할 줄 모른다고요? 걱정 마요. 나 수영 못한다는 애들 다 수영 가르쳐줬어.”

하이난에 함께 갔던 동행인이 리조트의 풀장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그는 열과 성을 다해 나에게 호흡법을 가르쳐주었지만, 결국 나를 포기했다.

“호흡 못 해도 수영은 할 수 있어요.”

“어떻게요?”

그는 나에게 새로운 수영법을 알려주었다. 수영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수영과 비슷한 기분을 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그가 건네준 스노클링 마스크를 꼈다. 호흡과 상관없이 수영을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럼 일단 물에 뜨는 연습부터 합시다. 겁을 먹으면 몸에 힘이 들어가서 가라앉을 수밖에 없어요.”

나는 풀장 끝을 잡고 파닥파닥거리며 몸을 띄우는 연습을 했다. 어느 정도 몸이 뜨자 언니는 대뜸 풀장 가운데로 나를 이끌었다. 몸을 띄운다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간다 생각하면 된단다. 여러 번 허우적거리며 가라앉길 반복했다. 가라앉았을 때 착지하는 법까지 터득하고 나니 그렇게까지 겁이 나진 않았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나는 내 발로 파닥파닥 수영하는 데 성공했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짜릿함이었다. 물론 호흡도 못 하고 폼도 안 나는 야매 수영이었지만, 이게 어디람!

“금방 지쳐서 안 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물속에서 오래 잘 노네요.”

수영은 못해도 물속에서 지치지 않고 오래 놀 수 있는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 나는 물놀이 할 수 있는 곳에 갈 때면 스노클링 마스크를 항상 들고 갔고, 이것은 여전히 내가 수영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이다. 

밤이 되고 별이 반짝였다. 언니가 물 위에 눕는 법까지 가르쳐주겠다고 했지만, 이날의 학습 할당량이 모두 끝났는지 물에는 뜨지 못했다. 그는 나의 등을 받쳐줄 테니 누워서 별이나 보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해봤는데 무서워서 별을 본 기억은 없고, 그대로 가라앉아 물 먹은 기억만 있다. 물에 뜨는 스킬은 훗날 몰타에서 만난 친구에게 배웠다. 파도조차 잠잠한 지중해 위에 누워 햇빛을 받는 기분은 그 어떤 수영보다 짜릿했다. 하지만 여전히 여기까지다. 지금도 수영다운 수영은 못 한다.     

“수영을 못한다고?”

“응….”

어릴 때부터 물개같이 놀아온 휴양 친화적인 유럽 친구들을 보면 항상 기가 죽었다. 다들 어찌나 바다에서 잘 노는지, 해양생물인가 싶었다. 다이빙한 뒤에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모습이 기가 막히게 신기했다. 발이 지면에 닿지 않는 곳에선 물놀이조차 할 수 없는 내 입장에서 그들의 발재간은 인류의 발재간이 아니었다.

하루는 밤새 지중해를 떠도는 몰타의 파티보트에 올랐을 때였다.

“다이빙할래?”

프랑스인 친구 아나이스가 대뜸 말을 걸었다.

“뭐, 미쳤어? 난 못해. 여기서 다이빙하면 난 죽을 거야.”

당연히 안 하겠다고 손사래 쳤지만, 하나둘씩 보트에서 바다 위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니 부러움에 젖어 들었다. 아니, 깊이도 모르는 새까만 바다에 어떻게 맨몸으로 뛰어들고서 다시 퐁퐁 올라올 수 있는 거지? 안 무서운가?

“뛰어들면 본능적으로 다시 떠오른대. 나도 수영 못하는데 다이빙할 거야.”

나를 설득하는 그 목소리가 무서웠다. 아니, 아는데. 뜬다는 것까진 알아…. 하지만 나는 결국 가라앉아 죽을 거라고.

남들이 호기롭게 뛰어드는 모습만을 실컷 구경하고 있던 그때, 수영을 전혀 못 한다고 했던 한국인 하우스메이트가 물에 쫄딱 젖은 채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아니, 뛰었어요?”  

“네. 뛰어들었다가 왔어요.”

“수영 못한다면서요.”

“네. 수영 못해요. 발을 파닥파닥하니까 어떻게 뜨긴 뜨던데 완전 죽을 뻔했어요. 같이 뛰자고 했던 애가 잡아줘서 겨우 살았어요.”

‘뜨긴 뜨던데’라는 말에 잠시 혹했다. 뜰까? 진짜? 나도 뛰어내릴까? 하지만 목숨을 걸고 실험을 하기엔 내 목숨은 단 하나뿐이었다. 쟤는 살아 돌아왔어도, 나는 진짜 가라앉아 죽을 것 같단 말이지. 하지만 계속 저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구명조끼… 없어?”

결국 나는 수백 명이나 되는 보트 인파 중에 유일하게 구명조끼를 입고 다이빙대에 올라섰다. 쪽팔렸다. 혼자서 구명조끼를 입은 아시안 여자애, 심지어 혼자 원피스 수영복을 입었어. 와, 세상에서 제일 주목받는 기분이야.

“괜찮아, 제스! 할 수 있어!”

옆에서 나를 부추기며 응원하던 프랑스 친구는 먼저 바다로 점프하더니, 물개처럼 바다 위를 돌아다녔다.

“아니, 뭐야. 너 수영 잘하잖아.”

“하하, 맞아. 사실 수영 잘해! 그러니까 내가 너 구해줄 수 있으니 뛰어내려!”

그리고 나는 용기를 내서 다이빙을! 못하고 계단으로 슬금슬금 내려가 물속에 들어갔다. 나는 이 보트에서 가장 튀는 사람이자 최고 겁쟁이인 셈이었다. (무서워서 다이빙도 못 하고 계단으로 슬금슬금 내려간 이도 내가 유일했다.)

새카만 지중해 바다 위에 동동 떠올랐다. 그러다 점점 뭔가 이상해져 감을 눈치 챘다. 구명조끼 덕에 당연히 물에 떠오르긴 했는데 전혀 내 의지대로 방향을 조절할 수 없는 것이다!

‘뭐야, 좀 이상한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파닥여서라도 이동하고 싶었는데, 나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점점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지중해의 새카만 밤, 떠내려가면 답도 없다. 얼른 눈을 돌려 친구를 찾았다. 물개처럼 신난 아나이스는 아주 저 멀리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안 돼! 나는 이대로 바다 위를 표류하다 저체온증으로 죽을 것이다. 이대로 떠내려가서 죽을 수는 없었다.

“아나이스, 나 좀 구해줘!!!! 아나이스! 아나이스!”

아나이스의 이름을 수차례 외치면서,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안 돼. 이렇게 허무하게 실종될 수는 없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는 인생이란 말이다. 엉엉. 점점 멀어져가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공포를 느꼈다.

“제스! 내가 왔어! 내가 구해준다고 했잖아.”

떠내려가는 나를 발견한 아나이스가 물개처럼 헤엄쳐 와 나를 잡아주었다.

“엉엉.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죽는 줄 알았잖아. 나 다시 보트 위로 올려줘.”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보트의 계단 위로 올라섰다. 나 자신이 이렇게 하찮아 보인 적은 처음이다. 구명조끼를 빠르게 반납한 후,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숨어들었다.

“나 진짜 떠내려가서 죽는 줄 알았어.”

아마 조금 더 패기를 부렸으면 구명조끼 없이 다이빙했다가 그대로 지중해 바닥으로 가라앉아 죽었을 것이다. 아무리 궁금해도 목숨을 걸고 불확실한 실험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수영이든 자전거든 언젠간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들 즐겁게 누리는 여행의 방식을, 나만 못 누리고 죽으면 내 삶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 이 글은 <웰컴 투 삽질여행>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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