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로 땅을 단단히 딛는 독립생활자를 꿈꾸다
큰 회사에 다니고 있다. 처음 부모에게 합격 소식을 전하던 날, 전화기 너머 울먹이는 엄마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팍팍한 삶에서 부모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딸이었다. 그만두고 싶다는 간절함이 어디선가 솟구칠 때면 엄마의 자랑스러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우리 딸이, OO에 다니잖아~" 아, 이제 시엄마의 목소리까지 추가되었다. "우리 며느리가 OO에 다니잖아."
하지만 그게 전부다. 어제 존경하는 나의 상사는 "하늘에서 50억이 떨어지면 회사에 그만둘 거니?"라고 물었다. 나는 소심하게 대답했다. "음, 회사는 그만둬도 어떤 형태로든 일은 할 것 같아요" 상사는 대체 일을 왜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5초간 응시했다. 나도 잘 모르겠다. 돈 때문에 다니는 회사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내가 무척 초라해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회사와 일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아마 회사와 일 그리고 심지어 나라는 존재까지 삼위일체였던 상사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거대 조직에 기대고 싶지 않다. 이곳은 무척 편하다. 한국사회에서 명함 한 장으로 긴 설명을 대신할 수 있다. 동시에 서서히 데워지는 물에서 죽어가는 개구리 같다. 코끼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대기업에서 10년 정도 근무한 사무직 직원이 그곳을 벗어나면 마치 발가벗은 임금님이 된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최근 회사가 휘청거리는 몇 년간 그렇게 발가벗겨진 사람들을 목격했다. 5년 뒤, 아니 빠르면 3년 뒤 내 모습일 수도 있다.
작가는 자본주의의 실체를 걱정한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성장의 나선형이다. 더 많은 사람이 돈을 쓰고, 그래야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한다. 동시에 불균형이 커진다. 관성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더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과거보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고, 우리는 더욱 피곤해진다. '포트폴리오' 직업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가질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길 기대했지만, 작가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년 전 영국 기업의 모습은 지금의 한국과 똑 닮아 신기하지만 서글프고, 작가의 예측이 하나씩 맞아가는 걸 지켜보는 일이 즐겁지만 두렵다.
불확실이 모든 곳에 만연한 사회에서 나는 언제든 코끼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나는 때가 되면 코끼리에서 내려오기를 갈망한다. 두 다리가 튼튼한 독립생활자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내 인생을 응원해 본다.
일은 생활의 수단을 마련할 목적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일중독에 시달린다. 과연 인간은 직면한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성공적인 자본주의는 결국 커다란 환멸로 끝나버리고 말 것인가?
바로 이것이 성공한 자본주의의 또 다른 문제다. 동일한 장소에 머물려면 전보다 두 배나 더 빨리 헤엄쳐야 하는 것이다.
싱가포르 예시가 나온다. 아버지 세대보다 훨씬 더 바쁘게 일하지만, 가난한 아들. 아버지가 살았던 단칸방에서는 지낼 수 없고, 외식도 하고, 공연도 봐야 한다. 그것이 이미 기준이 높아진 나의 삶을 즐겁게 해주니까. 그래서 일을 해야 하고 계속 바빠진다.
오늘날의 충성심은 첫째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에 관한 것이고, 둘째가 자기 팀과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이 회사에 관한 것이다.
회사는 이 사실을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이를 최대한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의 많은 회사들에서는 그 충성에 국가까지 끌어들인다. 훌륭한 직원들을 오래 회사에 잡아두고 싶다면, 그들에게 과한 충성을 요구하지 않으면 된다.
사람들은 정규 직장의 생활이 끝난 후에도 일을 계속해야 하는데 그것은 정규 직장의 연속이 아니라 이런 일, 저런 일을 그러모아 만든 '포트폴리오' 일이 될 것이다.
작가의 부친은 연금생활자로 딱 두 달을 살았다. 하지만 우리는 은퇴 후 지금껏 살았던 것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할 수도 있다. 50살에 은퇴하고 100살까지 산다면, 직장은 과연 어떤 의미가 될까? 긴 인생에서 내다봤을 때는 아마 제2의 대학 정도가 아닐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은 많은 것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주지만, 그런 물질적 욕구가 충족된 이후의 삶의 목적까지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좋아, 그런대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삶은 단 한 번 뿐이므로 그저 근근이 견뎌나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인생의 목적은 결국 무엇인가? 이 질문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는 화두다.
50억이라는 상사의 질문에 내가 그렇게 대답했던 것은 삶의 목적 때문이었다.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중국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행복은 할 일이 있는 것, 바라볼 희망이 있는 것,
사랑할 사람이 있는 것 이 세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