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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을 Jan 10. 2022

갔노라, 보았노라, 이겨냈노라

파티원을 모집했다. 덩치 큰 녀석들로다가. 나 또한 녀석들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네 명의 덩치(물론 우리 기준이다)들로 이루어진 파티가 결성되었다. 공략할 곳은 용산, 목적지는 전자상가 깊숙한 곳에 있다는 한 컴퓨터 매장이었다. 미션은 친구의 컴퓨터를 구매하고 조립까지 해서 돌아오는 것. 


우리가 탄 용산행 급행 전철이 빠르게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한창 공사 중인 개찰구를 지나자 심장 박동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행여나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긴장한 상태. 바로 그 악명 높은 다리의 입구가 보였다. 주머니 속 부직포 지갑을 꽉 움켜쥐고 있는 손에서 땀이 흘렀다. 입은 바싹 말라갔다. 



철길 위에 위태롭게 선 다리가 용산역과 용산전자상가를 잇고 있었다. 이 다리는 독특하게도 천장과 벽까지 막은 튜브 형태였는데, 그 탓인지 특유의 폐쇄감이 가득했다. 양쪽에는 우리만큼이나 덩치 큰 '형'들이 비교적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서 용산역 출구이자 다리의 입구 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실점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예 의자를 들고 와 자리를 잡은 '형'들도 날카로운 눈매로 오가는 이들을 응시했다. 마치 먹잇감을 찾는 맹수들처럼. 


우리는 눈빛을 교환하며 전의를 다졌다. 이곳에서 '형'들에게 붙잡혀 패배한 동지들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우리마저도 여기에서 멈춘다면, 앞으로 동지들은 이곳에 어찌 올 수 있다는 말인가.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리라. 이 다리 위에서의 전투를 모두 이겨내고 목표를 달성하리라. 최정예로 구성한 파티인 만큼 우리의 승리는 필요했고, 간절했다. 


"어떻게 왔어? 게임 필요하니?"


'형'들은 친절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적인 무시와 거절이 계속되자, 네깟 것들이 더 들어가 봐야 소용없다는 식의 비아냥이 이어졌다. '형'들의 호객행위가 통로를 가득 메웠다. 앞을 가로막는가 하면, 팔을 잡고 늘어지는 '형'들도 있었다. 


"형이 제일 싸게 준다는데도 그러네. 둘러볼 필요도 없어. 더 안쪽으로 들어가 봐야 호구만 당한다니까."


우리도 친절하게 나갈 이유가 없었다. 필요 없다며 한껏 짜증을 부렸다. 험악한 인상을 써보기도 했다. 큰 덩치 하나만 믿고 그들에게 맞섰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학교에서 제일 덩치 큰 네 명의 중학생이 성인 남성 하나쯤은 커버할 수 있을 테니까. 수많은 공격과 회유가 곳곳에서 치고 들어왔다. 300m 길이의 다리를 무사히 지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예상한 터였다.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형'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이지 끈질겼다. 



수많은 '형'의 호객 행위를 물리치며 다리를 지났고, 드디어 용산전자상가 건물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첫 번째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그때 친구 하나가 이야기했다. 


"화장실에 가야겠어."


갑자기 그 친구가 왜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복귀가 늦어지고 있었다. 다른 친구가 데리러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 가보자. 아니나 다를까. 친구 녀석은 화장실로 들어서는 복도에서 한 무리의 ‘형’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보다는 덩치가 크지도, 인원이 많지도 않았다. 우리는 친구를 불렀고, ‘형’들은 자연스레 자리를 떴다. 삥을 뜯길 뻔했단다. 역시 우리는 함께 있어야 파워가 있고, 시너지가 있다. 


이제 목적지까지는 절반가량 남았다. 하필 그 가게는 전자상가 건물 내에서도 가장 구석에 자리했다. 안심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우린 이미 이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이번에는 서너 평 남짓 되는 가게에서 우리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던(그때는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또 다른 ‘형’들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 가끔 매장 앞에 서서 호객행위를 하는 ‘형’들의 손짓과 말투도 모두 이겨내야 할 대상이었다. 


작전을 짰다. 우리도 눈을 부릅뜨고 걸을까. 일부러 눈을 맞추는 거야. 네 명이 복도를 꽉 채우고 걷는 것은 어때. 도착할 때까지 달릴까. ‘안 사요’를 무한 시전하는 게 제일 좋지. 그냥 무시를 해. 여러 의견이 나왔지만, 괜히 우리끼리 큰 소리로 떠들면서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 작전으로 가기로 했다. 왠지 그게 제일 세 보였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복도를 꽉 채우고 걷기 시작했다. 최대한 큰 소리, 최대한 굵은 목소리로 떠들면서. 


몇 번의 고비가 찾아왔다. 내가 구하고 있었던 한정판 게임을 싸게 팔겠다고 감언이설을 보내는 사람, 어딜 가는지 알고 있지만, 자신이 더욱더 저렴하고 좋은 제품을 팔고 있다는 점성술사까지. 역시 드래곤 힐 던전에 없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우리는 안전히 목적지에 도착했고, 친구가 원하는 제품을 구매했다. 인터넷에서 명성이 자자한 사장님의 친절함 덕분에 앞서 ‘형’들이 호객했던 그 게임까지도 합리적인 가격에 구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까 만났던 ‘형’들에게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던져 보이기까지 했다. 우린 이 정글을 뚫고 무사히 목표를 달성했다며. 


우리는 승리했다. 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이겨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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