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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을 Jan 09. 2022

그 겨울, 마포대교

주머니 속에서 이어폰을 꺼낸다. 또다시 엉켜 버린 줄을 붙잡고 이리저리 풀어내려고 애를 쓴다. 수백, 수천 번을 풀었던 줄인데도 어지간히 능숙해지지 않는다.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주머니에 넣었을 터인데. 속으로 투덜거리며 풀어낸 이어폰을 MP3플레이어에 꽂고는 재생 버튼을 누른다. 귓속으로 파고드는 발라드. 늘 듣던 노래다.


뇌리에 한 번 꽂힌 노래는 몇 달이고 계속 듣는 습관이 있었다. 장르보다는 곡의 분위기, 처음 접했을 때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감성 등이 선정 기준이었다. 물론 만일에 대비해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잔뜩 넣어두기는 했지만, 대개 곡 하나를 반복 재생하는 것을 즐겼다. 컴퓨터에 설치해 둔 아이튠즈(MP3플레이어 제어 프로그램)에는 재생 횟수가 1만 단위를 넘어간 곡이 꽤 있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이 노래를 들을 기분이 아니다. 재생목록을 뒤져 빠른 비트의 힙합 음악을 찾아 재생한다. 이어폰 너머로 자동차 엔진 소리, 바퀴 구르는 소리가 쉴 새 없이 파고든다. 볼륨을 최대치로 올린다. 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큰 소리가 이어폰의 얇은 선을 타고 들어오다가, 이내 적응이라도 된 듯이 괜찮아진다. 주머니에 MP3플레이어와 손을 함께 넣는다. 


여의도공원을 걷고 또 걷는다. 산책하는 이들과 데이트하는 연인들,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돌거나 천천히 달리는 사람들 사이로 걷는다. 우리가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이 길을 걷기 시작했던 듯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기로 했지만, 그래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저 걸을 뿐. 


"가끔 보러 갈게."

"그래. 기다릴게. 편지도 써서 보내주고."


너는 내게 츠지 히토나리가 쓴 <냉정과 열정 사이: Blu>를 건네고는 떠났다.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 Rosso>도 꼭 읽어보라는 말과 함께. 우리의 스무 살은 정말이지 이 책의 주인공과도 닮았다. 결말도 비슷할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우리는 나름대로 서로에 충실했다. 현실이 이러니, 저러니 하는 말도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갓 스무 살이 된 풋내기의 사랑이야 다 그런 거니까. 


우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가끔 보러 가겠다는 약속도, 편지를 써서 보내주겠다는 약속도 조금씩 희미해져만 갔다. 한동안 심장이 터질 듯이 아팠다. 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느낌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숨을 쉬기 어려웠다. 상투적인 표현이어도 다들 그렇게 말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의 한강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심장이 저려올 때면 어김없이 여의도행 버스에 올랐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마포대교. 늘 걷는 길이다. 난간에는 희망과 위로를 준답시고 이러저러한 글귀가 쓰여 있다.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대신 다리 한가운데 서서 난간에 몸을 기대어 본다. 난간 너머로 펼쳐지는 늦은 오후의 서울 풍경이, 용케도 얼지 않고 찰랑거리는 한강이 건네는 위로가 더 와닿는다. 찬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마음이 한결 괜찮아진다. 머리를, 마음을 짓눌렀던 기분이 나아지고 있다. 조금 더 빠르게 걸어볼까. 이어폰을 타고 귀를 때려대는 비트에 맞춰서 보폭이 커진다. 어깨가 들썩인다. 이참에 숨도 한 번 크게 내쉬어 본다. 빈틈을 노리고 찬 공기가 온몸을 파고든다. 괜찮다. 응어리를 털어내는 중이니까. 



강변북로 아래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지나, 원효대교에 들어선다. 이제야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초연, 해탈, 포기...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마음이 괜찮아지는 거다. 문제의 원인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뭐 어쩌겠나. 한동안 괜찮을 날들을 위해 이 정도는 투자할 수 있지. 앞으로 며칠은 잘 살아낼 거다. 혹은 몇 달, 몇 년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점점 희석하고, 점점 희미하게 만드는 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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