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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금미 Nov 08. 2020

성공 없이 빛나는 삶

부와 명예보다 더 위엄 있는 슈가맨을 찾아서

학창 시절 가난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현재를 비관할 때면 주문처럼 실패 이후에 성공한 위인들의 삶을 찾아보곤 했다.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혼 이후 생활고에 시달린 롤링이 어린 자식을 옆에 앉혀두고 해리포터를 집필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에서는 매년 생활고, 성폭행 등을 겪은 오프라 윈프리가 역경을 딛고 세계 최고의 토크쇼 진행자가 되었다는 내용의 영상을 보여줬는데 반복되는 영상에 질려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한결같이 울컥하고 위로받았다. 아, 나도 언젠가 성공할 수 있구나. 언젠가 빛날 수 있겠구나. 


어렸을 땐 학교만 졸업하면 내 몫을 제대로 해내며 돈을 벌 줄 알았다. 그 믿음이 산산이 조각난 시점부터 나의 깊은 우울과 불안이 시작되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성공한 이들의 고생담에 집착했다. 당장 눈 앞엔 어떠한 빛 한 줄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 대신 그들이 찾은 빛에 기대어 의지했다. 번듯한 직업을 갖고, 제 몫의 돈을 벌고,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까마득한 '언젠가'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그런데 최근 몇 개월 전부터 마법처럼 작동했던 그들의 성공 신화가 오히려 내 기운을 뺏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과 반대로 따라주지 않는 의욕 때문에 지쳐 있을 때였다. 거기에 몇 번의 실패 경험으로 자신감까지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자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끔찍한 그림이 눈에 그려졌다. 내가 글로써 성공하지 못하는 미래였다. 


내게 고생 담을 들려주었던 그들도 선택받은 일부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현실에는 똑같이 고생했으면서도 여전히 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그들의 역경은 성공한 현재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값지다고 포장된 것이었다. 그러자 내가 받은 위로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롤링도 아니고 윈프리도 아닌데, 성공할 언젠가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사실 난 잠재력 따위 없는 범재일지도 모르는데 그동안 헛된 꿈만 품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대로 성공하지 않고 삶이 끝날 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날로 심해져갔다. 그때 해가 저무는 청계천에서 읽은 한 편의 에세이는 나의 요동치는 감정을 순식간에 잠재워주었다. 


한 달에 한 번 참석하는 영화모임이 있다. 퍼플레이의 영화를 바탕으로 영화 책방 35mm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책방에서 모임을 진행하는 와중 한편에 꽂힌 예쁜 표지의 책이 자꾸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모임이 다 끝난 뒤에야 모임장님이 직접 쓰신 책이라는 것을 알고 곧바로 구매까지 결정해버렸다. 


 이상과 다른 현실에 매일 부딪혀 고민하던 나는 그로부터 며칠 뒤 산책 친구로 충동적으로 구매한 에세이 한 권을 들고 갔다. 잠깐 읽다 말 줄 알았는데 그날 하루 만에 다리 밑에서, 카페에서, 계단에서 장소를 바꿔가며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책에 담긴 영화와 관련된 경험과 성찰이 내 삶과 연결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손에서 책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벌새>,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 <레볼루셔너리 로드>, <레이디 버드> 등 책을 장식하는 나의 인생 영화들 하나하나가 다 반갑고 인상 깊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서칭 포 슈가맨>을 다룬 '망할 수 있는 권리' 챕터였다. 



<서칭 포 슈가맨>은 미국에서 두 장의 앨범을 내고 음악산업에서 완전히 사라진 아티스트 로드리게즈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음반 실패 이후 평범한 노동자의 삶을 살던 그는 사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대스타였다. 남아공 팬들의 노력으로 진실을 알게 된 로드리게즈는 남아공에서 대규모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치고 다시 미국에 돌아와 기존의 삶을 이어나간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수능이 끝나고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꿀 같은 휴식기간 때였다. 합격 발표가 일찍 이뤄졌던 나는 다가올 대학생활을 기대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수많은 영화를 봤는데 그중 한 편이 <서칭 포 슈가맨>이었다. 시작은 그저 누군가의 추천이었을 뿐인데 감상 이후의 여운은 꽤나 길었다. 로드리게즈의 아름다운 음악, 남아공 팬들의 진심, 기적 같은 실화 모두 내 마음을 움직였지만,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울렸던 건 톱스타의 명성을 확인하고도 다시 원래의 삶으로 복귀하는 위엄이었다. 


몇 년 뒤 한국에서 <슈가맨을 찾아서>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공식적인 발표로 듣진 않았지만, 혼자 속으로 '<서칭 포 슈가맨>에서 따온 제목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가슴 한편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러다 단지 숨 돌릴 틈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고른 책에서 6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실패에 관한 말을 몇 개 알고 있다. 성공을 전제할 때에만 유의미한 말들.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 건너온 고생에 관한 이야기들. 그렇다면 '이전에 실패한 경험이 없었다면 소설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는 조앤 K. 롤링의 하버드 대학 졸업 축사는 『해리포터 』가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더라도 유효할까.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p. 187 


성공을 전제해야만 이뤄지는 게 값진 실패라면 먼 훗날은커녕 당장 내일도 막막한 나의 비참한 현재는 언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 생각은 매일 같이 나를 괴롭혔고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분명 학교에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배웠는데, 만인에게 통할 것 같은 그 명제에서 나는 예외일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에 잠식당하던 그때 챕터를 시작하는 문장은 마치 내 속마음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 같았다. 


뮤지션으로서의 실패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그의 태도에서 작가는 한국의 또 다른 슈가맨 양준일이 한 말을 떠올린다. 


"누가 치킨 집 열었다가 문 닫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음반 내고 망할 수 있는 권리 있지 않나요?"


망할 수 있는 권리. 분명 곁에 지니고 있었는데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권리였다. 그 누구도 내게 당장 성과를 내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취업 준비에 스트레스를 받자 가족들 모두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다독여주기도 했다. 나를 불안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건 나의 부족한 재능이 아니었다. 망할 수 있는 권리를 앗아간 나 자신과 사회였다. 


<서칭 포 슈가맨>에서 제일 좋아하는 대사가 있다. 


"기적과 경이는 이 시대에도 남아있었죠."


불안이라는 단어 따위는 모르던, 대학교 합격을 인생 성공이라고 착각했던 시절에 기록한 대사였다. 순진하기 그지없었던 그때에도 나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나 보다. 평범한 삶에도 기적과 경이가 존재하다는 걸. 남의 삶을 관조하기만 했을 때 쉽게 보였던 그 진리를 내 삶에서는 적용시키지 못했다. 평범하다고만 믿었던 나의 삶에도, 화려한 사람들 사이에서 뒤처지기만 하는 줄 알았던 나의 삶에도 기적과 경이가 있었다. 


가장 최근에 이뤄진 모임에서 좋아하는 말을 발표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모임장이자 저자인 그녀를 향해 당사자 앞에서 소리 내어 글을 읽는 게 얼마나 잔인한 짓인 줄 알면서도 꿋꿋이 책의 한 구절을 읊었다. 


성공을 더 달콤하게 해주는 애피타이저로서의 실패가 아닌, 실패가 그저 실패로 끝난 두 명의 슈가맨은 내게 알려주었다. 내게도 망할 수 있는 권리, 실패할 권리가 있다고. 실패 이후의 인생에도 기적과 경이가 가득하다고 말이다.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 p. 190


모임이 진행되었던 영화 책방 35mm는 문을 닫았다. 몇 번 들린 게 다인 나도 괜히 마음이 허전한데 이 공간을 만들고 이 공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을 작가님은 얼마나 쓸쓸할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작가님은 평소의 덤덤한 말투로 작별 소식과 함께 새로운 공간을 열었음을 알렸다. 애정을 다 쏟아부은 공간이 문을 닫은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학교 생활도 끝났고 애정 하던 영화 모임도 이제 한 번만 남았다.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 쓸데없이 긴 인생이 원망스러웠다. 좋았던 시절에서 끝맺으면 좋으련만 쓸데없이 길어서 왜 이런 고통까지 느끼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적과 경이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나는 조앤 K. 롤링도, 오프라 윈프리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진금미일 뿐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그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특별한 이유는 유일해서이니까. 내가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니 이제 또 한 가지 진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나 역시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지금 쓰는 글이 절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성공 없이도 내 삶은 빛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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