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금미 Sep 30. 2020

이제는 여름을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남매의 여름밤>과 함께 찍은 여름의 마침표

이 글에는 영화 <남매의 여름밤>의 스포일러가 들어있습니다. 


원래도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항상 여름이라고 답했고 영화나 책에서 '여름'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면 조건 반사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그런데 이번 여름은 유독 남달랐다. 마냥 행복했던 작년을 지나 맞이한 2020년의  여름은 오랜만에 외롭고 우울하고 무섭고 서러워서 특별했다. 


내 주변에 더위는 기본이요 습기와 벌레까지 달고 오는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추위를 많이 타고 더위를 잘 안 타는 영향도 있겠지만, 이건 여름을 싫어하지 않는 이유지 글로써 작별인사까지 할 만큼 사랑하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내가 여름을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데엔 수많은 이유가 있다. 

 

나는 여름이 밝아서 좋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이면 그 어떤 권력자도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인 하늘이 나의 행복을 기원해주는 느낌을 받는데 여름만큼 하늘의 청량함이 두드러지는 계절이 없다. 나는 여름이 해가 길어서 좋다. 해가 긴 만큼 하루가 더 오래 지속되는 느낌이다. 밖에 있는 시간까지 덩달아 길어진다.  겨울은 물론이고 봄이나 가을에도 해가 지면 곧바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오는데 여름은 새벽이 되어도 쌀쌀함을 느낄 일이 없다. 그리고 아련해서 좋다.  여름의 추억은 뭔가 더 찬란하고 아름다운 느낌. 불꽃처럼 강렬하게 타오르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느낌이다. 2020년 여름은 이 모든 이유를 매일매일 느낄 수 있었던 시기였다. 


이제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여름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벌써 2020년도 100일도 채 남지 않았고 이제 반팔만으로 밖을 거닐 수 없는 날씨가 되었다. 몇 개월 전부터 여름에게 안녕을 고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이번 여름엔 특히 '여름' 자체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찰을 많이 했기에 제대로 된 글로 작별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8월 말에 완성하려던 계획은 하루하루 미뤄지더니 결국 9월 말까지 와버렸다. 


이유야 많았다. 갑자기 바빠져 버린 일상, 천성적인 게으름, 파도처럼 넘실대는 감정의 기복... 결정적으로 나는 아직도 여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 글까지 쓰면 정말 올해 여름이 끝난 것만 같아서 아직은 아니라고 차일피일 미뤘다. 내 마음은 아직도 가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이 영화를 본 순간, 이제는 여름을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찍고 싶지 않았던 여름의 마침표를 마침내 영화 <남매의 여름밤>과 함께 찍을 수 있었다. 





공감으로 채운 영화의 여백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은 옥주 동주 남매가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네 집에서 보낸 여름방학을 담았다. 언뜻 들으면 정말 평범한 내용이지만 나는 그 줄거리를 듣자마자 바로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여름밤'이라는 마력의 키워드와 더불어 '시골에서의 추억' 역시 내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옥주 가족이 할아버지네 집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끝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시골은 정말 무료하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이기에 영화의 배경장소도 집이거나 집 주변이 다이고, 일어나는 사건도 대단히 평범하다. 자극적인 플롯에 익숙한 관람객이라면 영화에 여백이 너무 많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 여백을 지루해하겠지만, 나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모두 메울 수 있었으니까. 


나는 제주도의 좁디좁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몇 년 전부터 인스타그램에 자주 등장하며 관광지로 기능하곤 있지만, 내가 지냈을 때는 정말 황량하기 그지없는 시골 중의 시골이었다. 누군가에게 우리 마을은 단순히 바다가 예쁜 낭만의 장소겠지만 나에겐 답답하고 음울한 고통의 공간이다. 좁아터진 시골의 공동체 안에서 내가 배운 건 끈끈한 유대가 아닌 배척과 소외였다. 학교에선 왕따였고 집에선 수많은 자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던 나는 성인이 되기까지 항상 탈출에 대한 욕망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과거는 미화되기 쉽다. 녹록지 않은 현실에 치일 때면 습관처럼 제주도에 가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오랜만에 고향에 가면 탈출하고 싶었던 그 시절은 잊은 것처럼 잠깐의 낭만을 만끽하고 더 질리기 전에 빠르게 서울로 돌아오곤 했다. 사람은 지치면 장소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내게 고향은 이런 의미다. 지친 나를 받아줄 다른 곳, 가끔 부담 없이 찾아갈 수 있는 곳. 나는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둔 상태의 시골이 좋다. 관객석과 스크린의 거리만큼 말이다. 


<남매의 여름밤>를 보면서 작년  <벌새>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복잡한 플롯을 헉헉대며 따라가기보다 물결에 몸을 맡기듯이 그 많은 일을 다 겪은 주인공의 감정선을 흐르는 대로 따라가게 된다. 흐르는 대로 따라가게 된 옥주의 감정선 중에서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영화에서 가장 공감됐던 부분은 고모의 등장이었다. 나는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집에 오는 고모들을 참 좋아했다. 어린 시절 고모들은 내 삶에서 가장 상냥한 어른들이었다. 내게 부드럽게 말을 건네주고, 좋은 곳에 데려가 주기도 했다. 고모들이 주는 낯선 따뜻함에 나는 쉽게 황홀해졌다. 가장 좋아하는 고모는 유일하게 타지에 사는 큰고모였는데 큰고모가 우리 집을 떠날 때 나도 따라가겠다며 고모의 신발을 붙잡고 엉엉 울기도 했다. 


이렇게 말하면 가족들이 나를 고립시킨 것 같겠지만, 그건 아니다. 다들 따뜻했지만, 서로가 너무 익숙했고 각자 바빴을 뿐이었다. 고모들이 내게 그렇게 친절한 애정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다 가끔 봐서였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고모와 옥주의 관계는 내게 기시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둘이 같이 있는 장면만 보면 적당히 낯선 어른의 친절함이 너무나 달콤했던 어린 내가 아른거렸다.    


또 공감이 갔던 건 롤러코스터를 타는 옥주의 감정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한 아이인 줄 알았다. 항상 내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외로움과 두려움이 버겁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극적인 사건을 겪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겪은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반성했다. 그러면서 힘들고 외로워했던 나를 자기 연민에 빠져 엄살 부린 애로 전락시켰다. 영화에서 옥주가 겪는 일은 내가 겪은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느끼는 서운함, 맘대로 되지 않는 애정 문제, 가난한 집안에 대한 부끄러움, 큰소리로 싸우는 어른들에 대한 두려움 등 옥주가 겪었을 감정들은 모두 한 번쯤은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것들이었다. 



떠나간 것을 그리워한다는 것


이렇듯 나에게 <남매의 여름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감의 연속이었다. 앞서 언급한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가 다 공감됐지만, 가장 감정 이입했던 감정은 '그리움'이었다. 옥주는 할아버지가 듣는 옛날 노래를 몰래 감상하고, 아빠와 고모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인다. 어른들이 떠나보낸 그 시절, 자신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그 시절을 옥주는 상상하고 그리워한다. 


요즘 내가 가장 격하게 느끼는 감정이 '겪어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다. 나에게 '겪어보지 못한 시대'는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이다. 내가 갓난아기에 불과했을 그 시대가 요즘 나는 사무치게 그립다. <god의 육아일기>로 시작해서 핑클, 코요태, s#arp, 보아까지 유튜브로 떠나는 추억여행은 끝날 줄 모르고 매일 이어지고 있다. 왜 자꾸 혼자 까마득한 과거로 가는 것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처음부터 어른인 줄 알았던 그들에게도 지금의 나만큼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 그 사실이 주는 어떤  위안 때문이었다. 


옥주는 그해 여름 어른들의 연약하고 비겁하기도 한 면모를 많이 확인했다. 그와 함께 어른들이 비겁하지 않아도 됐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 옥주에게도 '엄마와 함께 살았을 때' 같은 그리운 시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그리움은 그렇지 못한 현재를 실감하게 함으로써 상처를 남긴다. 그렇기에 애써 부정해보지만, 감정이 사라질 리가 없다. 계속해서 남아있는 그리움은 다른 이의 옛 시절로 가지를 뻗친다. 


이 영화는 결국 내가 '겪은' 시대를 그리워하게 했다. 후반부 할아버지의 죽음에서 할머니와 살았던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내가 죽음의 무게를 실감하지 못했던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우리 자매를 얼마나 잘 챙겨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정사진 앞에서도 흐르지 않는 눈물에 당혹감을 느꼈다. 눈물이 흐른 건 5년이나 지난 뒤였다. 세상에 버림받은 것 같았던 중학생 사춘기 시절, 나에게도 온화한 애정을 받은 시기가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흘린 눈물이었다. 


옥주와 나의 공통점은 충분한 준비기간을 갖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떠나보냈다는 점이다. 다른 점은 아무 생각 없이 할머니를 떠나보냈던 나와 달리 옥주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당시 충분히 슬퍼했다는 점이다. 소리 내어 통곡하던 옥주는 잠이 들고 햇살 머금은 아침을 맞이한다. 이제 옥주에게 할아버지는 과거의 사람이 되었다. 또 그리워할 대상이 생긴 것이다. 분명 너무나 슬픈 일인데 펑펑 운 뒤 잠에서 깬 옥주의 표정은 어둡지 않다. 떠나간 것을 그리워하는 감정이 현재를 마냥 비관하기만 하는 감정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여름을 보내며


서두에 밝혔듯이 이 글은 올해 여름을 향한 작별인사다. 이번 여름은 강박적으로 바쁘게 살았던 내가 (반강제로) 몇 년 만에 한량처럼 한가하게 지낸 시간이었고, 매일 덮쳐오는 생각들로 감정의 밑바닥을 경험해 본 시간이기도 했다. 상황 때문에 힘들기도 했고 감정 때문에 힘들기도 했다. 마냥 밝은 줄만 알았던 내가 실은 얼마나 부정적인 사람인지를 이번 여름 내내 겪은 긴 방황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막막하기만 한 현재 상황이 언젠가는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일 음악을 들으며 청계천을 거닐었다. 청계천의 물에 내 불안과 우울을 띄워 흘러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내 상황과 나 자신이 달라지기를 염원했으면서 여름만은 영원하기를 바랐다. 내가 안정을 찾기도 전에 다가올 찬바람이 너무나 무서웠다. 


역시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불안과 우울도 여전한데 정해진 시기에 맞춰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여름을 떠나보내는 일이 그렇게 무서웠는데 높고 맑은 가을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싫지 않다. '뭐지, 사실 난 생각보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었을까'라며 나 자신을 의심했다. 이제 나는 자신 있게 의심에 대한 답으로 '아니오'를 외칠 수 있다. 


나의 여름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년에도 반복될 것이다. 내 마음속이 가장 차가웠던 그 시기에 세상의 온도만큼은 따뜻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빛을 발산하며 나를 위로해줬던 여름인데 어찌 애정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지금 나는 여름이 가버린 게 별로 슬프지 않다. 떠나간 것을 그리워하면서도 현재를 부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옥주의 깨달음이 내 안에도 싹튼 덕분이다. 


영화관에서 <남매의 여름밤>을 보고 펑펑 울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못할 정도로 오열했다. 통곡하던 옥주가 햇살 머금은 아침을 맞이한 것처럼 얼떨떨한 정신으로 영화관을 나온 나는 기분 좋은 가을바람을 맞았다. 모든 건 결국 끝난다. 행복했던 과거도, 영화도, 올해 여름도 다 끝나버렸다. 대부분의 이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뤄진다. 그러나 마침표를 찍는 건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다. <남매의 여름밤>과 함께 나는 미련 없이 끝나버린 것들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온 오늘을 살아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움과 미련은 다르다는 god의 가르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