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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금미 Aug 31. 2020

그리움과 미련은 다르다는 god의 가르침

떠난 게 후회될 때 언제라도 나의 품에 돌아와도 돼

나는 뭐든 뒷북치는 걸 좋아한다. 유행하는 음악, 드라마, 영화 등 모두의 관심이 식은 뒤 뒤늦게 접하곤 외롭게 열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엔 좀 많이 거슬러 올라갔다. 무려 20년의 세월이었다. 알고리즘으로 유튜브 피드에 뜬 (육아일기)를 별생각 없이 클릭했을 뿐인데, 그 한 번의 클릭으로 재민이와 지오디 형들의 일상에 푹 빠지고 말았다.


<육아일기>로 생긴 지오디에 대한 관심은 곧 그들의 음악으로 옮겨갔다. ‘거짓말’, ‘촛불 하나’, ‘Friday night’와 같이 익숙한 노래들을 들어보다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애수’, ‘관찰’ 등 낯선 노래까지 섭렵하더니 결국엔 god가 비교적 최근에 찍은 예능 <같이 걸을까>까지 정주행했다. <같이 걸을까>의 마지막 화까지 끝낸 순간 내가 지오디의 팬이 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육아일기>와 <같이 걸을까>는 무려 20년의 간격을 두고 만들어진 예능이다. 20년 동안 세상도 많이 바뀌었고 지오디에게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두 예능에서 멤버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철없고 순수했다. 차이가 있다면 <육아일기>에선 그게 당연했는데 <같이 걸을까>에선 철없는 자신을 신기해하고 고마워한다는 것이다.


두 편의 예능을 모두 섭렵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지오디의 음악을 듣는 뒤늦은 팬지오디(지오디 팬클럽 이름)로서 <god의 육아일기>와 <같이 걸을까>를 보고 느낀 감정들을 써보려 한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세계, < god의 육아일기 >

 


<육아일기>는 지오디가 맞벌이 부부를 대신해 한 살짜리 아기 재민이를 돌본다는 컨셉의 관찰 예능으로 신인 지오디를 단숨에 국민 그룹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MBC의 대표 예능이다. 1999년 12월 파일럿으로 시작해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곧바로 정규 편성되어 2001년 5월까지 방영되었다.


나에게 2000년대 초반은 안개 낀 마을처럼 모호한 시대이다. 분명 나도 태어나서 살았던 시대인데 너무 어려서 무엇 하나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2007년에 빅뱅 ‘거짓말’과 원더걸스 ‘Tell Me(텔미)’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5년밖에 차이 안 나는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는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러니 2000년에 방영되었던 <육아일기>가 기억날 리 있겠는가.


역시나 유튜브를 통해 본 <육아일기>는 모든 장면이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프로그램에서 가장 새로운 건 중년으로만 인식했던 지오디 멤버들의 20대 초반 모습이었다. 프로그램을 통해 한 번도 관심 가져본 적 없었던 그들의 매력을 많이 알게 되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재민이를 가장 살뜰하게 챙기는 왕엄마 손호영, 항상 재민이와 티격태격하는 철없는 막내 김태우, 조심스러운 마음에 재민이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면서도 묵묵히 챙겨주는 데니안 등 어떻게 모든 멤버가 이렇게 확고한 개성을 가졌는지 신기했다.


가장 놀랐던 건 박준형과 윤계상이었다. 서툰 한국어와 엉뚱한 성격이 전부인 줄 알았던 ‘와썹맨’ 박준형은 어린 동생들 사이에서 항상 중심을 잡아주는 든든한 맏형이었고, 드라마와 영화로 점잖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만 봐왔던 윤계상은 시도 때도 없이 장난치는 개구쟁이였다. 이렇게 새로움으로 가득한데도 나는 이 프로그램이 오랜만에 재회한 옛 친구처럼 반가웠다.


<육아일기>의 모든 장면이 새로운 건 아니었다. 딱 한 장면, 대기실에서 재민이가 박준형의 옷에 실례를 범하는 장면만은 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유튜브로 다시 확인한 그 장면은 역시나 내 기억 그대로였다. 20년 전 안방에서 모든 가족이 박장대소한 기억 덕분에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 그 박장대소가 내 기억의 시작이었다.


제일 오래된 기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god의 육아일기라고 답했다. 고작 한 장면밖에 기억하지 못하면서 왜 이렇게 자주 입에 올리는지 나 자신도 의아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대답을 한 적은 없었다. 프로그램과 나 사이에 이어진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붙잡고 싶었던 건 <육아일기>가 아니라 한곳에 모여 같은 것을 보고 환하게 웃었던 그때의 우리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이라 김포공항을 통해 미국에 간다든가, 내비게이션이 없어서 지도를 펼치고 운전한다든가, 전화하기 위해 핸드폰 안테나를 높이 올린다든가 등의 장면에서 잊고 있었던 20년 세월의 무게를 실감한다.


<육아일기>에 푹 빠져있다고 말하자 지인들이 혼자 왜 그렇게 옛날로 가냐고 놀렸다. ‘네가 지오디 세대는 아니잖아?’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확실히 나는 카세트테이프보다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삶이, 놓친 방송은 녹화할 필요 없이 인터넷으로 다시 보는 삶이, 풍선보다는 LED 응원봉을 흔드는 삶이 더 익숙하다. 그럼에도 <육아일기>에 묘사되는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립다.


불과 3, 4년 전에 나온 예능만 봐도 젠더 감수성과 인권 의식의 부재로 지금 시각에선 불쾌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20년 전에 나온 <육아일기>에선 눈살이 찌푸려지는 부분이 거의 없다. 무리한 시청률 욕심 없이 아기 재민이와 젊은 지오디가 본인들끼리 신나서 노는 게 전부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사회가 정의하는 어른에 가까워질수록 마냥 신나서 놀 수 있는 순간이 줄어든다.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에도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 따위의 불필요한 죄책감이 피어오른다. 제대로 겪어본 적도 없는 지오디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어른인 척하는 아이들이 걷는 길, <같이 걸을까>   



2018년에 방영된 JTBC 예능 <같이 걸을까>는 지오디 다섯 멤버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걸은 열흘의 기록을 담았다. 가 종영된 2001년으로부터 무려 17년 만에 나온 지오디 단체 예능이다.


2001년과 2018년 사이 지오디에겐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길’이 수록된 4집 앨범으로 2001년 연말 공중파 3사 대상을 휩쓸었고, 9개월 동안 전국을 일주하며 100회 콘서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영광스러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2004년 윤계상이 지오디를 탈퇴했고 이후 4인 체제로 활동하다 7집을 끝으로 지오디는 해체 수순을 밟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팬들의 그리움 속에서만 남아있던 지오디는 2012년 윤계상이 자신의 요리 프로그램

<윤계상의 원테이블>에 지오디 멤버들을 초대하며 다시 뭉쳤다. 그리고 2014년 많은 이가 그토록 염원했던 재결합이 성사되어 8집을 발매했다.


<육아일기>에서의 지오디는 한 몸이었다. 숙소에 같이 살면서 모든 스케줄을 함께 소화했다. 모두가 god라는 정체성만을 지닌 상태였다. <같이 걸을까>에선 오랜 세월을 지나온 만큼 모두가 연기, 음악, 예능, 뮤지컬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같이 걸을까>를 보기 시작했을 때 예상한 것들이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교할 테고, 성숙해진 대화가 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예상은 10화 내내 보기 좋게 비껴갔다. 서로를 놀리고 사소한 것에 깔깔대며 웃는 모습이 20년 전 그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그들의 ‘같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시대를 풍미했던 연예인 중 구설에 올라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룹의 경우 멤버들 간의 불화로 안 좋은 끝을 맞이한 사례도 많다. 연예인의 잘못은 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좋아했던 연예인의 타락은 그를 좋아했던 모든 시간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지오디 역시 멤버들 간의 갈등도 있었고, 각자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실망을 안겨준 여타 연예인과 지오디의 다른 점은 지오디는 자신들이 누린 전성기와 그 시절을 간직하는 팬들의 소중함을 안다는 것이다. <육아일기>에선 정말 본인들끼리 노는 게 재미있어서 아이처럼 굴었다면 <같이 걸을까>에선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고마워서 더 철없이 구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같이 걸을까>가 ‘그 시절 지오디’에만 갇힌 예능은 아니다. 한 살짜리 아기에서 20대 청년이 된 재민이와 인사도 나누고, 그들을 동경하는 후배와 만나 진지한 조언을 건네주고, 길 위에서 지오디로서가 아닌 자신만의 문제를 고민한다.


길을 걸으며 멤버들은 계속해서 성찰하고 깨닫는다. 가장 인상적인 건 데니안이었다. 자신만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한 그는 초반부 걷기에선 그저 뒤처지기 싫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다 후반부에 접어들자 잔뜩 껴안은 걱정을 뒤로하고 멤버들과 함께 달리고 춤추며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러면서 앞서거나 뒤처진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오르막을 내딛는 발걸음에서 희망을 느낀다.


나갈 채비를 하는 멤버들을 보며 윤계상이 이런 말을 한다.


“나이를 먹어도 그대로냐. 하나도 안 변해. 나이 먹었다고 철드는 거 하나도 없고 늙기만 하는 거야. 책임지는 것들이 많으니까 어른인 척하는 거지. 불쌍해, 어른들….”


<같이 걸을까>를 보던 당시 나는 불안한 미래에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이제 나도 많은 것을 책임져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엔 아직 너무 나약하고 혼자 멈춰있는 것 같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만 갔고 ‘뭐라도 해야 하는데’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라는 생각으로 조급해졌다. 그와 함께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았던 과거를 향한 그리움도 커져만 갔다.


그런 나에게 지오디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갈 순 없지만 그걸 추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20년이나 지나온 자신들도 여전히 어리다고, 사람은 죽기 전까진 항상 길 위의 존재라고,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육아일기>를 보면 마냥 신난 재민이와 지오디 멤버들과 반대로 혼자 울적해질 때가 있다. 이 프로그램도 결국은 끝날 것이고 많은 게 변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같이 걸을까>를 다 보고 나니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그들을 그 시절에 가둬 그리워한 것이 미안해졌다.


요즘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마냥 해맑았던 어린 시절도 그립고 모든 일상이 당연했던 불과 몇 개월 전도 그립다. 한순간에 일상이 뒤바뀐 이후부터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없게 된 탓이었다. 이렇게 내가 현재를 외면하고 역행하는 동안 지오디는 미지의 앞날을 향해 험난한 순례길을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힘들고 지칠 때 소중한 기억은 우리를 지탱한다. 행복했던 추억은 내 인생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는 걸 증명한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해 전보다 불행한 현재를 비관해서는 안 될 일이다. 과거는 과거대로 두고 나는 앞으로 나가야 한다. 내가 속한 건 현재뿐이며 시간은 미래로만 흐르게 되어있다.


사전적 정의로 그리움은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고 미련은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이다. 다시 만난 지오디가 오래 전 이야기로 아이처럼 웃는 감정은 그리움이고 나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게 하는 감정은 미련이다.


2집 타이틀곡인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에 이런 가사가 있다.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떠난 게 후회될 때 언제라도 나의 품에 돌아와도 돼


탈퇴에 해체까지 거친 뒤 결국 재결합한 지오디의 상황과 완벽하게 들어맞는 가사라고 생각한다. <같이 걸을까>에서 그 시절의 나는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때의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들과 있으니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나온다. 지나간 것과 사라진 건 다르다. 미련이 아니라 그리움의 감정으로 바라본다면 과거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모든 게 지오디가 내게 준 가르침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XbWF95Pq1Y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9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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