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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금미 Aug 26. 2020

이건 우리가 얼마나 신경 쓰지 않는지 보여주는 예술이야

로드의 음악을 들으면 콤플렉스도 개성이 된다


2014년, 고3 시절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나의 팝송 선생님이었다. 고2가 끝나갈 무렵, 우연한 계기로 롤링스톤스의 팬이 된 나는 그들의 대표곡인 '(I Can't Get No) Satisfaction'이 시그널로 쓰인다는 흥미로운 정보를 접하고 곧바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기 시작했다. 시작은 그렇게 단순했지만, 라디오 덕분에 보석 같은 아티스트를 많이 알게 되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로드(Lorde)였다. 라디오에선 홍수처럼 여러 아티스트에 대한 정보가 쏟아졌는데, 그중에서 로드가 내 관심을 사로잡은 이유는 놀라울 정도로 어린 나이였다. 로드의 성취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배철수가 던진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로드가 열일곱 살인데  이 정도 성과면 대단한 거죠."


열일곱에 빌보드에 올랐다는 놀라운 정보에 곧바로 로드를 검색해보았다. 그 당시 로드는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이었고 한국에선 많이 생소한 아티스트였다. 그래서 열일곱 소녀의 음악에 열광하고 있다는 영미권의 상황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야?라는 의문을 품고 확인한 로드의 실체는 과연 대단했다. 내가 로드를 알기 1년 전, 그러니까 로드가 열여섯 살일 때 2013년에 발매된 그의 데뷔 앨범 [퓨어 헤로인(Pure Heroine]의 '로열스(Royals)'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로써 로드는 1988년 티파니 (당시 만 16세)가 쿠드브 빈(Could've been)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 지 15년 만에 최연소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가수가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lcIKh6sBtc


처음엔 나와 비슷한 나이에 쌓은 어마어마한 경력이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결국 나를 로드의 세계로 완전히 이끈 건 음악이었다. 화려한 멜로디와 과잉된 감정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 로드의 'Royals'는 묵직한 비트를 내세운 절제된 멜로디, 덤덤한 창법과 독특한 가사로 '세상에 이렇게 세련된 노래가 있단 말인가'라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성격, 외모, 부족한 재능 등 나에게는 여러 가지 콤플렉스가 있는데 '가난'도 그중 하나다. '찢어지게'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의 집안 형편도 아니었고 일상적인 생활도 충분히 영위 가능했지만, 그 시절 나는 원하는 것을 당연하게 사는 아이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여유로운 생활을 한다고 믿었고 내가 제일 불행하다고 단정 짓곤 했다. 유료 인터넷 강의도 듣지 못해서 무료만 듣는 현실이 개탄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Royals'를 듣는 순간만큼은 나를 둘러싼 가난이 콤플렉스가 아니라 나만의 특징으로 여겨졌다. 


And we'll never be roylas (royals)
It don't run in our blood
That kind of luxe just ain't for us
We crave a different kind of buzz
그리고 우린 절대 왕족 같은 건 되지 않을 거야
그런 건 우리 피에 흐르지도 않고
그런 사치스러운 건 우리에게 어울리지도 않아
우린 다른 종류의 재미를 원하지


넘쳐나는 부러움의 대상 중에서 대표주자는 단연 스타들이었다. 화려한 외모, 억대 출연료, 사람들의 관심.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운데 그들은 작품에서마저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자랑했다. 해외 힙합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에선 차와 여자, 고급 수영장에 흩날리는 지폐 따위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는데 그러한 클리셰는 한국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내 머릿속에는 연예인은 무조건 부유하다는 공식이 세워졌고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저 사람은 돈 많으니까 행복하겠지...'라는 답 없는 생각을 펼쳤다. 


그런데 로드는 부와 명예로 무장한 빌보드라는 무대를 '가난'이라는 소재의 음악으로 누빈 것이다. 그것도 아주 당차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이다. 다이아몬드, 결혼반지도 본 적 없고 초라한 마을에 있는 집주소는 불러주기도 민망하다. 노래에서 묘사되는 상황은 분명 비참한데 그를 읊조리는 로드의 목소리는 당당하기 그지없다. 노래 하나로 사람의 가치관이 완전히 뒤바뀌기는 힘들다. 이후에도 나는 때때로 남보다 가난한 나의 처지를 비관했다. 하지만 적어도 'Royals'를 듣는 순간만큼은 가난한 내가 부끄럽지 않았다. 사치스러운 세계 따위 어차피 나와 어울리지 않다고 쿨하게 넘겨버릴 수 있었다. 


'Royals'의 라이브 영상을 보다가 실제 로드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라는 댓글을 보았다. 엄청난 반전이라는 뉘앙스의 댓글이었지만, 그것을 읽는 내 마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로드의 집안이 부유하든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가난을 예술 소재로 소환하면서 동정의 시선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다는 것, 그게 중요한 것이다. 


시간은 흘러 고3의 나는 20대 중반이 되었다. 그 기간 동안 로드도 많은 노래를 발매했지만, 내가 듣는 것은 오로지 'Royals'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별생각 없이 음원사이트에서 [퓨어 헤로인] 앨범에 대한 사람들의 평을 보았는데 대표곡 'Royals'만큼이나 '테니스 코트(Tennis Court)'가 명곡이라는 말이 많았다. 그때와 똑같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반응이 이래?' 싶은 마음으로 노래를 틀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8Ymd-OCucs


'Tennis Court'는 [Pure Heroine]의 두 번째 싱글이다. 'Royals'와 같은 시기에 나온 곡이라 그런지 멜로디가 절제되어있고 비트가 두드러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람들의 열띤 반응에 따라 들어본 노래는 역시나 한순간에 내 귀를 사로잡았고, 이후에도 자주 찾아들었다. 그렇지만 이전처럼 가사까지 음미하진 않았다.


꽤 오랜 시간 동안 'Tennis Court'를 내용도 모른 채 들으며 살아갔다. 그러다 전문적으로 팝송 가사를 해석해주는 유튜브를 즐겨 보게 되면서 자주 듣던 모든 팝송의 가사들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여러 팝송의 가사 해석을 찾아보던 중 'Tennis Court'까지 찾게 되었고 가사의 내용과 등장 배경을 알게 된 순간, 이전까지 이 노래를 좋아하던 나는 이 노래를 완전히 사랑하게 되었다. 


'Tennis Court'는 음악 산업에 대한 로드의 통찰을 담은 노래다. 스포티파이와의 인터뷰에서 로드는 고향 오클랜드에서 친구들과 나눴던 일상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에 담았다고 말했다. 테니스 코트는 그와 그의 친구들이 놀았던 공간이자 로드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이다. 


음악 산업에 발을 들이고 메커니즘을 파악한 로드는 사람이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노래의 첫 소절인 'Don't you think that it's boring how people talk'(사람들이 말하는 게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니)가 이를 잘 나타낸다. 그래서 이 노래의 서늘한 통찰이 'Royals'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보는 평론가들도 있다. 노래에서 내가 매혹된 부분은 후렴구의 가사였다.  


Baby be the class clown
I'll be the beauty queen in tears
It's a new art form showing people how little we care (yeah)
We're so happy, even when we're smilin' out of fear
Let's go down to the tennis court, and talk it up like yeah (yeah)
넌 교실의 광대가 되고
나는 눈물 속의 아름다운 여왕이 될 거야
이건 우리가 얼마나 신경 쓰지 않는지 보여주는 예술이야
우린 정말 행복해, 심지어 우리가 두려워서 웃을 때에도
테니스 코트로 내려가서 신나게 떠들어 보자


예술의 세계에서 대중의 관심은 양날의 검을 지닌다. 부와 명예를 가져다줌으로써 예술 활동을 지속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맞추기 위해 본래의 색을 잃어버리게 하곤 한다. 로드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명성을 흥분해서 만끽하는 대신 한 발짝 물러선 채 냉정하게 통찰하면서 자신의 색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한 로드의 태도에 정말 큰 위로를 받았다. 그 무렵 나는 내가 쓰고 싶어 하는 글과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것을 막 깨달은 참이었다. 학생 신분일 땐 글 쓰는 게 마냥 재밌었다.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은 채 내가 원하는 글만 썼기 때문이다. 그러다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의 관문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이제는 남들이 원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선호하는 진지한 글은 일부 전문가의 영역이고 아마추어인 내가 생계를 꾸리려면 흥미 위주의 짧고 간단한 글을 써야 한다는 조언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현실과 타협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도 그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문제는 그동안 내가 선호하는 방식의 글만 써와서 타협하는 방식의 글을 쓸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내 딴엔 나름 양보해서 지원한 곳이었는데 그곳들은 자의식 강한 내 글 대신 보편적으로 공감할 만한 다른 지원자의 글을 택했다.


글쓰기 자체에 대한 진한 회의감이 들었다. '여태 내가 써왔던 글은 뭐지?' '나 혼자 읽고 즐기는 글이었던 거야?' 따위의 물음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로드가 내 앞에 나타나 예전과 같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우리가 얼마나 신경 쓰지 않는지 보여주는 예술이야, 두려워서 웃을 때에도 우린 행복해. 고작 몇 번의 실패 경험으로 흔들리는 나와 달리 로드는 파도처럼 찾아온 명성에도 굳건하게 자신만의 길을 고집했다.  


해석을 접한 이후 들은 'Tennis Court'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감상을 안겨주었다. 예전엔 그저 로드만의 특징이 담긴 잘 만든 노래 정도였다면, 이후엔 수시로 흔들리는 내 연약한 신념을 붙잡아주는 노래가 되었다. 


깊은 고민의 기간을 거쳐 내 글이 무조건 안 읽히는 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독자들은 내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때보다 내 순수한 진심을 담을 때  더 크게 반응해주었다. 내 글을 유독 정성스레 읽는 친구가 있다. 긴 대화를 나눴던 어느 날, 헤어지면서 그는 내게 모든 사람의 피드백을 수용할 필요는 없다고, 너는 너의 길을 가라고 말했다. 


로드는 왜 그렇게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테니스 코트를 그리워했을까. 연예인이 아니었던 그 시절, 그 테니스 코트에서만큼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앞으로 살면서 더 많은 제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진심이 중요하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가면은 필요한 법이다. 그렇지만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는, 두려워서 웃을 때에도 행복할 수 있는 테니스 코트만은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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