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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금미 Aug 15. 2020

나는야 자전거 탈 줄 아는 어른이

누구에게나 '이제 나도 어른이 되었구나!' 실감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쓰기만 했던 아메리카노의 맛을 깨달았다든지, 두렵기만 했던 어둠에 적응했다든지, 더 이상 술이 쓰지 않다든지. 


법적으로는 스무 살부터 어른이라는데 그토록 기다렸던 20대가 되어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매사에 허둥지둥 대며 사소한 일에 전전긍긍하고 나와의 타협은 쉽다. 그나마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 어두운 방이 무섭지 않을 때, 혼자 즐기는 맥주가 시원할 때에야 조금 자라긴 했구나 느낀다. 


내게는 자전거도 그중 하나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자전거는 초등학생만 되면 타는 거겠지만, 나는 자전거를 20대가 되어야 탈 줄 알게 되었다. 가르쳐줬던 사람은 많았다. 부모님도, 언니도, 친구들도, 심지어 친구의 동생까지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중학교 3학년 때 이뤄진 마지막 가르침은 스승으로 나선 친구들끼리 싸우는 걸로 끝났고 그 이후로 나는 자전거를 포기했다. 아쉽긴 했지만, 절절하진 않았다. 자전거 좀 못 타도 삶은 멀쩡하게 굴러갔다. 


그렇게 다 큰 몸뚱이로 자전거도 못 타는 사람으로 살던 내게 또다시 자전거를 가르쳐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당시 사귀었던 남자 친구였다. 사귄 지 100일을 맞아 한강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같이 자전거 타자는 그의 요청에 나는 못 탄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거기에 포기하지 않고 가르쳐주겠다는 말이 나왔다. 애써 저버리고 있었던 기대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예상했던 대로 배우는 과정은 험난했다. 자전거 뒤를 잡은 손이 떨어지면 반사적으로 땅에 발을 디뎠다. 넘어져도 괜찮다고, 최대한 페달에 발을 떼지 말라고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나.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나도, 남자 친구도 지치기 시작했다. 화기애애함은 줄어들고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긴장감만이 감돌았다. 벤치에 앉아있던 할아버지들의 응원소리가 그나마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반사적으로 자꾸 땅을 짚는 발이 원망스러웠다. 자전거 못 타는 게 잘못도 아닌데 괜히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냥 여기서 그만하면 안 되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할애된 상태였다. 여태까지 그가 기울였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지금 생각하니 뭘 그렇게까지 배려했어야 하나 싶다) 울며 겨자 먹듯이 시도를 거듭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자리걸음인 줄만 알았던 나의 자전거가 점점 더 멀리 나아가기 시작했다.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내가 스스로 자전거를 움직이는 시간이 천천히 늘어났다. 반납 시간을 목전에 두고 기적적으로 자전거가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는 물론 응원해주던 할아버지분들도 환호했다.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데까지 자전거를 움직였다. 이 기적적인 감각에 그동안의 고생이 모두 값지게 느껴졌다. 얼마 남지 않은 반납 시간까지 신나게 페달을 밟으며 달렸다. 비록 직진만 가능한 초보운전자였지만.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이 추가되는 것이다.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되니 버스 타기엔 애매하고 도보로는 먼 거리도 부담 없이 갈 수 있었고, 꿈같은 일인 줄만 알았던 한강 자전거 타기도 가능해졌다. 결정적으로 중국 교환학생 시절에  그가 선사한 가르침이 빛을 발했다. 


마냥 즐거울 줄만 알았던 외국 생활의 처음 몇 주는 친한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 외국인으로서 핸드폰 개통부터 통장 개설까지 순탄치 않다는 막막함으로 점철되었다. 함부로 외국 어플을 사용할 수 없는 중국에서 그나마 카카오톡은 수월하게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온종일 카톡에 매달려 지인들에게 '보고 싶다', '한국 가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그 대상에 당연히 남자 친구도 있었다. 그는 매일 반복되는 나의 찡찡거림을 들어주었고 나를 보러 중국까지 오려고 했다. 이렇게 든든한 그였는데, 그가 중국에 오기도 전에 우리는 헤어졌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카카오톡으로 이뤄진 정말 볼품없는 이별이었다. 내가 그에게 의지했던 시간들에 비하면 갈등의 그 순간은 정말 잠깐이었다. 그렇지만 그 잠깐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남긴 실망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슬프기보단 허무했다. 나는 그가 대단한 버팀목인 줄 알았는데, 귀국할 때 공항에서 나를 맞아줄 사람은 당연히 그일 줄 알았는데, 제법 오랫동안 신뢰를 쌓아온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별 거 아닌 걸로 한심하게 헤어지다니. 이별 과정에서 진짜 나를 괴롭게 했던 건 나에게 그가 그렇듯이 그에게 나도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는 깨달음이었다. 


하루아침에 의지할 구석을 잃어버리자 안 그래도 외로운 외국 생활이 더 힘겹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방구석에서 우는 걸로 귀중한 교환학생 기회를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 밖에 나가야 한다는 조언에 따라 잠 못 드는 밤, 기숙사에서 나와 공용 자전거를 탔다. 미친 듯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넓고 한적한 학교 캠퍼스를 몇 시간이나 활보했다. 어느 지점부터 처음 배웠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리는 내가 대견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짓눌렀던 이별의 고통이 얼굴을 스치는 바람처럼 훨훨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그때 자전거 배우길 잘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전거는 배우고 헤어져서 다행이다!...라고. 


글을 쓰고 보니 당사자인 나조차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그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었으면서 자전거 하나에 바로 감사를 표하다니. 어쨌든 그 당시 자전거는 내가 시련을 극복하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낯선 사람들만 가득한 중국에서 언제든 나를 맞아주는 자전거만큼  든든한 친구는 없었다. 외로움과 무기력, 자괴감이 밀려오는 밤이면 항상 자전거를 타러 기숙사를 나섰다. 자전거로 힘을 얻은 덕에 용기 내서 새로운 인간관계도 쌓을 수 있었다. 


그와 헤어지기 전까지 나는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매 순간 그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 봐, 너는 나 없으면 안 되지?' 그러면 나는 그렇다고 동의했다. 그런데 막상 헤어지고 보니 그가 내 곁을 떠나도 내 삶은 캠퍼스를 활보한 자전거처럼 멀쩡하게 잘 굴러갔다. 이별 이후 홀로 떠난 황산 여행에서 확실히 느꼈다. 나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마냥 어린애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와 함께 거침없이 달려준 자전거가 없었다면 얻지 못했을 깨달음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에도 자전거를 타면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그를 향한 고마움이 인다. (자전거 한정..) 그리고 점점 사람 많은 도로에도, 심지어 차도 옆에 붙은 좁은 자전거 도로에도 겁 없이 달릴 만큼 성장한 내가 자랑스럽기도 하다. 


계획에도 없던 자전거에 관한 글을 갑자기 쓰게 된 이유는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알찬 하루를 보내겠다는 전날 밤의 다짐과 달리 빈둥대다가 낮잠에 빠져 들었고 눈 뜨니 오후 네시 반이었다. 아무것도 안 했다는 자괴감, 또 늦게 잘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꿈까지 나를 심란하게 했다. 


유튜브로 <god의 육아일기>를 즐겨 보는데, 그 영향으로 2000년 당시 촬영 현장에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있는 꿈을 꾸었다. 20대의 god 멤버들과 아기 재민이는 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미래에서 온 나는 슬프기만 했다. 이 모든 게 결국은 끝날 것이고 많은 게 변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코로나 19로 당연한 일상이 당연하지 않게 된 시점부터였다. 금방 지나갈 줄 알았던 코로나 블루는 시간이 지나 깊은 우울로 진화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더욱 간절해졌고 그래서 자꾸 n 년 전 영상을 찾아보게 된 것이다. 


낮잠에서 깨어나자 다시 우울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행복했던 과거와 비교하자 막막한 현재와 불안한 미래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왜 이렇게 또 시간을 허비했을까. 지금 나는 왜 이모양일까. 앞으로 또 얼마나 힘든 미래가 펼쳐질까. 등등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중 오랜만에 빗소리가 들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나가자. 바깥바람 쐬고 자전거 좀 타서 이 거지 같은 기분 좀 전환하자. 그렇게 따릉이를 타고 달린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기분이 나아졌다. 거대한 파도인 줄 알았던 우울은 사실 거품 낀 맥주에 불과했다. 


신나게 달리면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현재가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과거에 대한 집착도 조금씩 작아졌다. 왜 무조건 현재가 과거보다 못하다고 단정 짓는가.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의 나는 자전거도 탈 정도로 성장했는데! 함부로 그 시절에 가둬 그리워했던 god와 재민이에게도 미안했다. 정작 당사자들은 충실하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여전히 나는 매번 실수하고, 감정 기복도 심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흔들린다. '이제 20대 중반인데 이렇게 그대로여도 되는 거야?'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고작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술 한 잔에, 자전거에 그래도 자라긴 자랐다고 위안을 얻는 것이다. 


사실 어른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보다 훨씬 긴 세월을 살아낸 중년들도 항상 최선의 선택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도 나처럼 불안한 미래와 막막한 현재, 후회되는 과거로 괴로워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내게 들려준 경험과 연륜의 가치는 대단했다. 자신의 말이 모두 옳다며 확신에 찬 충고를 던지는 사람보다 "아직도 난 내가 어린것 같고,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그래도 이런 걸 겪어보긴 했어." 라며 소심한 충고를 던지는 사람이 더 멋있어 보인다. 


나는 사소한 것에 뿌듯해하는 내가 좋다. 다 자랐다고 확신하는 대신 작은 변화에 기뻐하며 앞으로의 성장을 기대하는 내가, 그만큼 여전히 미성숙한 내가 좋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는 내가 모든 걸 통달한 어른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대신 자전거도 탈 줄 아는 어른이라고 하찮은 자랑이나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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