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는 조이와 잭, 제프의 삶
어린 시절 나는 동화에서든, 애니메이션에서든 이야기가 원치 않은 방향으로 끝나면 상상력을 동원해 내가 원하는 결말을 창조하고서 혼자 만족하곤 했다. 나이가 들고 현실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성급하게 고친 해피엔딩으로 남의 삶을 끝맺는 게 얼마나 오만한 행위인지 깨닫게 되었다. 현실은 동화와 달라서 해피엔딩 이후에도 불행이 존재하고, 새드엔딩 이후에도 행복이 존재한다. 모두가 끝이라고 말하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룸』과 『제프가 집에 돌아왔을 때』처럼 말이다.
범죄의 끝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다
캐서린 애킨스의 소설 『제프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건장한 소년 제프가 2년 동안의 감금 이후 집에 돌아와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렸으며,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의 영화로도 개봉한 엠마 도노휴의 소설 『룸』은 좁은 방에서 7년 동안 감금된 조이와 그곳에서 태어난 다섯 살 소년 잭의 이야기를 다뤘다.
두 이야기는 주인공이 납치 피해자라는 점, 범죄가 끝날 때 진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룸』의 경우 중반부에서 탈출을 그리고 『제프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아예 처음부터 유괴범 레이가 제프를 집에 돌려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탈출을 마지막에 배치하지 않음으로써 두 작품은 ‘과연 탈출이 성공할 수 있을까’와 같은 긴장감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긴장감을 포기하면서까지 탈출로 결말을 장식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범죄가 끝나도 그 영향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룸에서 태어난 잭은 세상을 완전히 새로 배워야 한다. 엄마 외의 사람과 소통하는 것,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예의범절을 익히는 것 등 룸 밖의 세상에 적응하는 모든 과정이 순탄치 않다.
범죄 이전에 바깥세상을 경험했던 조이와 제프는 더 극심하게 현실과 불협화음을 낸다. 두 사람은 각각 열일곱 살과 열네 살이라는, 자신이 겪은 일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에 납치되었고 폭력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제프와 조이는 범죄 이전의 찬란한 삶이 완전히 붕괴된 현실에 절망하고 무력감을 느낀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던 조이는 친절을 가르친 엄마를 원망하고 (납치 당시 닉이 거짓말로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제프는 야구 유망주에서 범죄 피해자로 전락한 자신을 혐오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폭력의 경험은 칼로 무 자르듯이 절단되지 않는다. 범죄가 끝남과 동시에 고통도 끝난다는 건 조금이라도 마음 편해지고 싶은 제삼자의 환상에 불과하다.
폭력은 유괴 현장 밖에서도 존재한다.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피해자에 대한 편협한 시선과 자극적인 보도에만 혈안인 언론의 태도가 그러하다. 사람들은 함부로 범죄에 대해 떠들어대고 언론은 무례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조이와 잭, 제프 모두 가해자에게서 벗어났음에도 세간의 관심 때문에 집 밖으로 쉽게 나가지 못한다.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이가 그들을 사람이 아닌 피해자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조이에게 가장 결정적인 상처를 안기는 인터뷰에서 조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사람들이 우리가 끔찍한 일을 겪은 유일한 사람들인 것처럼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터넷을 보면 정말 믿기지 않는 사연들도 많이 있잖아요.” -p.379. 엠마 도노휴 『룸』
제프 역시 비슷한 말을 속으로 뇌까린다.
잘못된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아이이자 변태가 되었고, 기껏해야 동정할 가치가 있는 누군가가 된 것이다.
공평하지 않아, 이 바보들아. 나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었어. 너희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고. 그렇다면,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는 대접하지 않을 텐데. -p.209. 캐서린 애킨스, 『제프가 집에 돌아왔을 때』
어떤 범죄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당한 피해자는 없다. 제프의 말대로 그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피해자를 대상화함으로써 자신을 피해자와 분리한다. 그리고는 피해자의 삶에 범죄와 무관한 부분을 손쉽게 지워버린다.
전형적인 피해자상 역시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는 특히 ‘인기 많은 야구 유망주 소년’ 제프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동성 성폭행 피해자 제프는 학교에서 ‘동성애자놈’이라는 멸시를 받는다. 어느 정도 자란 소년이 성범죄의 피해자일 리가 없다는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병원 관계자는 조이에게 룸에 향수를 느끼지 않느냐고 묻고, 제프는 레이가 자신을 사랑했다고 착각한다. 우리 사회가 오로지 범죄에만 집중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구분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2차 가해는 실제 현실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두 이야기는 우리들을 범죄가 끝나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직면하게 한다.
이야기의 끝에서 삶을 시작하다
두 작품의 성취는 이 끔찍한 이야기에서 기어코 희망을 찾아낸다는 점이다. 인물과 함께 고통스러워하던 독자 혹은 관객은 결말 부분에 다다르면 함부로 그들의 삶을 비관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쉽게 희망을 말하지 않는 두 작품은 마찬가지로 쉽게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제프의 아버지 켄은 제프가 겪었던 2년간의 납치를 부정하고 제프가 원래의 삶을 되찾길 바란다. 제프의 생각대로 이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외면해도 폭력은 분명히 일어났으며 끝난 이후에도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조건 범죄의 영향 아래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잭이 점점 평범한 아이로 거듭나는 것처럼 조이와 제프도 이야기 말미에는 어떻게든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두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잭과 조이는 룸을 다시 찾고, 제프는 레이가 채찍으로 남긴 등의 상처를 두 눈으로 확인한다. 룸과 등의 상처는 범죄가 실제로 일어났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그것들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 잭은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이곳은 더 이상 룸이 아니라고 말하고, 조이는 그런 잭을 바라보다 소리 없이 룸에게 안녕을 고한다. 더불어 제프는 흉측할 줄 알았던 상처가 희미해졌음을 알고 크게 놀란다.
『룸』과 『제프가 집에 돌아왔을 때』에서 희망은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아들이고 힘겹게 한 발 내딛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는 피해 당사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제프에게 상처를 보도록 지시한 건 다름 아닌 켄이다. 자신의 아들이 성범죄 피해자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켄은 끝에는 제프에게서 모든 진실을 듣고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던 제프는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하고 비로소 말할 준비를 마친다.
방은 어떤 일이 일어났던 구멍, 분화구 같았다. 우리는 문밖으로 나왔다. -p. 515. 엠마 도노휴 『룸』
나는 등을 돌려 아빠를 쳐다보았다. 나의 아버지를.
아빠가 나를 쳐다보셨다. 그는 내가 말하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네.” 내가 말했다. “말할 준비가 된 것 같아요.” -p.264. 캐서린 애킨스. 『제프가 집에 돌아왔을 때』
슬럼프에 빠질 때면 나는 주문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생각한다. 그러면 곧바로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 삶은 죽기 전까지 완결을 말할 수 없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문장은 동화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이 진실은 보장된 행복은 없다는 막막함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보장된 불행도 없다는 희망을 안겨준다. 제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겪었다고 해도 그 누구도 함부로 조이와 잭, 제프의 삶이 영원히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이는 우리 모두의 삶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