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개의 역사> 리뷰
붓다에 관한 흥미로운 칼럼을 읽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으로 대표되는 데카르트의 사상에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글이었다.
“그나마 가장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게 몸이다. 하지만 몸마저 사실은 쉬지 않고 세포를 바꾸고 있다. 게다가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바깥으로부터 공기를 받아들이고 안에 있는 공기를 내뱉으며, 마신 물을 피나 체액으로 바꿔 순환시키다가 몸 밖으로 배출한다. 몸 역시 한순간도 멈춰 있지 않다.” -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을 뒤엎다, 붓다’ <충코의 철학 이야기> ≪아홉시≫
나는 나의 손톱을 바라본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유모서리다. 이 보잘것없는 신체 부위를 신경 쓰게 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문을 닫다가 엄지손톱을 세게 찧었는데 그 여파로 피가 철철 흘렀다. 완전히 망가진 손톱을 보며 언제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까 막막해하던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상처가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를 신기해하며 친구한테 전하자 친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 손톱이 거기서부터 자라는 거잖아. 그게 뭐가 신기해.” 그동안 손톱이라고 믿었던 것은 자유모서리였고 손가락의 일부로만 여겼던 반투명의 판 구조물이 손톱이었다. 손톱이 자란다는 건 정확히 말하면 손톱에 의해 자유모서리가 밀려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매 순간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을 가리켜 붓다는 ‘무상無常’이라고 말했다. 본래 무상하다는 말은 모든 것이 허무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나 자신의 존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어떠한 고정적인 본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적인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다.”
붓다의 사상에 따르면 자유모서리를 비롯한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무상’에 해당한다. 실제로도 손톱에서 밀려나는 자유모서리는 죽은 세포로 이뤄졌다. 칼럼을 곱씹어 보니 붓다의 생각대로 고정적인 본질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 몇 년 전의 나를 떠올릴 때면 생김새, 생각, 말과 행동 모두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달라 놀라곤 한다. 몇 년 전과 지금을 이어주는 본질 같은 건 무엇일까. 그나마 고정적으로 보이는 게 몸이지만, 그마저도 내부에서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데 말이다.
변화를 실감할 때마다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는 한편 순진한 만큼 용감했던 시절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씁쓸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칼럼이 말하지 않았던가. 무상이 모든 것이 허무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고. 고정적인 본질이 없어도 어제의 나도, 오늘의 나도 모두 나 자신이며 지나간 어제가 있었기 때문에 변화된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생각을 완성하는 데 붓다에 관한 칼럼은 화룡정점 같은 역할이었다. 마지막 점을 찍기 전 밑그림을 그리도록 해준 건 애증의 고향과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개의 역사>였다.
▲ <개의 역사> (2017, 김보람) 스틸컷
살아있는 존재만이 시간의 영향을 받아 늙어가고 소멸한다. 우리는 그 과정을 ‘역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에겐 역사가 있다. 후암동 거리를 떠도는 개 백구도 그 예외는 아니다. <개의 역사>는 열세 번째 이사로 후암동에 도착한 감독 김보람이 떠돌이 개 백구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열네 번째 이사로 홍은동에 가게 된 감독은 홍은동에 거주하는 여성들로 탐구 대상을 변주한다.
영화는 백구를 소재로 거창한 무언가를 완성하겠다는 야심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이사를 자주 다니는 평범한 개인이 열심히 묻고 물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파악하는 게 전부다. 사람들이 백구에 대해 말하는 건 자신의 시선에서 ‘관찰’한 내용뿐이다. 주민들의 입에서 나오는 굶어서 하루종일 돌아다녔다거나 우울해 보인다거나 대관령 슈퍼 아저씨를 따랐다는 등의 증언은 후암동에서 백구가 얼마나 소외됐는지를 드러낸다.
공간 같은 존재들이 있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는데도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고정된 자리에서 같은 모습만 보이는 존재. 백구가 바로 그랬다. 그런데 그런 백구가 죽자 사람들은 뒤늦게 그 역시 시간에 따라 변화했음을 상기하게 된다. 검은 화면에 ‘백구가 죽었다.’라는 문구만 떠오르는 시작 장면은 도리어 ‘백구도 살아있는 존재였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백구처럼 공간 같아 보이지만, 늙음과 소멸로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건 후암동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인터뷰이들은 대부분 그곳에 최소 몇 년은 살았노라고 말한다. 한 곳에 오랫동안 뿌리내렸으면 이웃 간의 정이 떠오를 텐데, 도시 번화가와 시골 마을의 경계에 위치한 후암동에서는 정착이 곧 고립을 나타낸다. 몇 년 동안 지냈는데도 아는 사람 하나 없다고 말하던 이는 이사를 준비하면서도 감독을 향해 자신을 두고 ‘여기 와서 뺑이 치다 거기 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옮겨도 별 볼 일 없다는 식의 다큐멘터리를 찍으라는 자조 섞인 말을 남긴다.
이는 두 번째 장소인 홍은동에서도 나타난다. 홍은동의 가장 핵심적인 탐구 대상은 미용 산업에 종사했던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고 (본인의 표현대로) 독거노인이 된 현재를 비관하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에 찍은 사진과 과거 자신이 쓴 글을 되짚어보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의미냐고 한탄한다. 이웃들의 텃세와 그로 인한 고립은 홍은동에서 보내는 말년을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 뒤이어 정자에 앉아 있는 노인들이 나온다. 노인정이 너무 높이 있어 올라가기엔 다리가 너무 아파 어쩔 수 없이 정자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말이 이어진다. 여기서 나이 듦은 그들을 동네에 가두고 그들의 삶에 생명력을 앗아가는 요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역설적으로 그들의 시간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음을 나타낸다.
다시 한번 나의 손톱을 바라본다. 내가 처음 손톱과 자유모서리의 이름을 구분했을 때, 멈춰버린 줄만 알았던 판 구조물이 쉬지 않고 자라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느낀 감정은 ‘경이’였다. 나는 그게 놀라웠고 또 신비로웠다. 그래서 그날의 경험 이후 자주 손톱을 들여다봤고 손톱을 자르는 일상적인 행위에 의미를 부여했다.
백구도, 후암동과 홍은동의 어르신도 박제된 것 같지만 살아있다는 점에서 나의 손톱과 공통점을 지닌다. 그런데 그들을 보면 경이로운 대신 씁쓸하고 불편했다. 손톱깎이로 얼마든지 자를 수 있는 손톱과 달리 그들은 한참 전에 떠나왔던 고향을 떠올리게 해 어찌할 바 모르겠는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개의 역사>에는 감독 김보람의 사적인 이야기도 언급된다. 남자친구와의 이별, 사랑을 불신하게 만든 부모의 이혼, 오랫동안 키운 반려견 못난이의 죽음, 외국으로 이민 간 친구까지. 후암동과 홍은동을 보여주었던 카메라는 감독의 모교와 예전에 살았던 아파트도 담아냈다.
감독과 친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이방인이다. 이사를 거듭하는 감독에겐 낯선 동네와 낯선 사람들에 적응하는 게 일상이고 해외로 이민 간 친구는 존재 자체로 이방인으로 규정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시골 마을에 염증을 느껴 타지의 학교로 진학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나는 그 둘 모두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성장했다. 떠나온 이후 가끔씩 고향을 찾았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고향은 항상 유년기부터 사춘기까지의 모습이었다. 한국에 살았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는 친구의 말대로 고향에 몸담았던 시기는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학교에서는 왕따라는 이름으로 소외됐고 집에서는 엄마의 얼마 안 되는 관심을 여러 형제와 나눠가져야 했다. 거기에 우리 가족들을 향한 동정의 시선과 제사와 명절마다 실감하는 가부장제의 견고함은 덤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과 만나며 자신감 없고 겁 많은 내가 아닌 활발하고 도전적인 나를 발견했다. 점점 타지에서의 삶에 익숙해진 나는 고향에서의 나를 빠르게 잊어나갔다. 어두운 역사는 완전히 사라졌고 밝은 현재만 남아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슬럼프를 만나고 바로 무너졌다. 우울함에 빠지자 잊은 줄 알았던 상처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지금의 내 모습이 과거 상처에 대한 방어기제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독과 친구가 모교에 방문한 시퀀스는 후암동과 홍은동을 묘사할 때와 달리 단절된 이미지로 이뤄져 멈춰있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그와 함께 멀쩡하게 들리는 대사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단절된 이미지와 이질적인 음성이 꼭 고향에서 도망쳐 앞으로 나아가는 줄 알았지만 실은 과거에 메여 있는 나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을 때, 예전과 같은 모습이면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 초라했던 나로 돌아가는 것 같았고 혼자만 도망쳤다는 생각에 괜히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차라리 내 기억 속에 박제된 채 끝났으면 더 마음이 편했을 터였다.
▲ <개의 역사> (2017, 김보람) 스틸컷
<개의 역사>를 여러 번 봤다. 처음 봤을 땐 그저 사라져가는 것들에게 보내는 영화의 시선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봤을 땐 내가 외면했던 고향 사람들이 영화 속 사람들처럼 살아갈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영화를 보고 또 봤다. 매번 놓쳤던 부분이 새로 눈에 밟혔다. 가장 마지막에 이뤄진 관람에서 눈에 들어온 건 대사나 내레이션 없이 저마다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주민들을 비추는 장면이었다.
고향에 갈 때마다 풍경을 보며 이 공간에서 내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에 대한 생각에 빠지곤 했다. 그러면서 단 한 번도 말없이 응시한 적이 없었다. 입은 다물었지만 속으로는 옛날에 대해 시끄럽게 떠들었다. 잔잔한 배경음악으로만 장식된 후암동과 홍은동은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평범한 동네였다. 내 고향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큰 상처를 안겨준 왕따 가해자는 고향을 떠난 지 오래였다. 진짜 멈춰있던 건 나 자신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크게 다친 엄지손톱은 부지런히 상처를 밀어낸 뒤에야 비로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화가 떠오를 때면 아픈 기억도 그렇게 정직하게 밀려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소망이 이뤄지기엔 삶은 손톱보다 훨씬 길었고 결정적으로 나는 내가 밀어내야 할 게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
<개의 역사>의 엔딩 크레딧은 실명을 언급하는 다른 영화와 달리 후암동 주민들과 홍은동 주민들로 나눠 검은 모자를 쓴 아주머니, 노란색 티셔츠 할머니 등과 같이 시각적인 묘사만이 담겨있다. 엔딩 크레딧에는 두 개의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 후암동의 백구와 홍은동의 백구. 하얗다는 이유로 백구라고 불린 수많은 개들이 떠올랐다. 검은 모자를 쓴 아주머니, 노란색 티셔츠 할머니와 같은 방식으로 바꾸라면 백구라는 이름도 ‘하얀 개’와 다를 바가 없다. 이름은 존재를 인식하는 첫걸음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과 다르게 이 첫걸음은 너무나 미약하다.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대상을 향한 훨씬 더 많은 발걸음이 필요하다. 카메라를 들고 아무리 열심히 말을 걸어도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었던 감독은 그 한계를 빠르게 인정했다.
이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뒤에야 내가 마을 어른은 물론이고 몇몇 친척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고만 생각하고 나를 가여워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이름을 지워버렸다. 이제와서 그들의 이름을 묻는다고 달라질 건 없다. 이름은 존재를 인식하는 첫걸음인데 나는 이미 샛길로 한참 빠진 뒤였다. 내가 써내려갈 엔딩 크레딧도 <개의 역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설프게 이름을 묻는 대신 내 시선에 포착된 대로만 크레딧을 완성하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영화 <개의 역사>와 애증의 고향에 대해 생각했다. 실타래처럼 뒤엉킨 생각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붓다에 관한 칼럼을 읽고 나서야 안개 같던 생각이 조금은 윤곽을 드러냈다.
“어쩌면 무상하다는 말에 부정적인 뜻을 결부시키게 된 것은 변하지 않는 나의 본질을 열망하는 입장에서 무상이란 개념을 인정하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고향을 벗어나고 싶어 했으면서, 그토록 변화를 갈망했으면서 상처라는 이름을 덧씌운 채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고향을 박제시켰다. 그들은 자유 모서리처럼 밀려나기도 했고 손톱처럼 무언가를 밀어내기도 했다. 나의 부재가 익숙해진 고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잔잔한 배경음악을 타고 느린 속도로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나를 부정했던 나는 오히려 옛 상처가 여전히 나를 좌지우지하길 바랐다. 문제의 원인을 과거로 돌리는 게 가장 편했기 때문이다. 자유 모서리를 아무리 잘라도 손톱이 있는 한 계속해서 자랄 것이다. 그렇지만 붓다의 말대로 이전에 잘라낸 것과 앞으로 자랄 것은 비슷해 보여도 절대 같지 않다. 나 역시 비슷한 일에 매번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상처받겠지만, 그 경험들은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우연의 일치지만 감독의 친구 이름이 ‘미래’라는 사실이 뜻깊게 다가온다. 나와 똑같이 공동체에 염증을 느끼고 이방인의 삶을 선택한 그녀에게 정말 많이 공감했다. 다시 찾은 고향에서 그녀는 자신은 항상 고향을 예전 모습대로만 인식할 것임을 인정하고 자신에 의해 상처받은 누군가를 떠올린다. 만약 내가 고향을 다시 찾았을 때 그녀의 태도를 따른다면, 그래서 그들을 말없이 응시하게 된다면 나에게도 미래가 주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