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었다. 근데 쓰기 싫었다. 이게 뭔….
원래 나는 숨 쉬듯이 글을 쓰던 사람이었지만, 최근 몇 개월간은 글 쓰는 행위가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텅 빈 한글 화면 앞에 서는 게 무서웠다. 뻔하고 상투적인 핑계지만, 나는 글을 쓸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 무엇을 위한 마음의 준비란 말인가. 평소 하던 것처럼 생각하는 대로 뱉으면 되지 않는가. 생각. 그래, 생각이 문제였다. 최근 몇 개월간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생각을 많이 하지 않는 때가 인생에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생각이 너무 무거웠다. 평소라면 이 무거운 생각을 글로 풀어내 무게를 덜어내야 했지만, 요즘에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생각이 너무 무거워서 글이 글이 아니라 배설로 느껴질 것 같아 무서웠다.
그러면 지금은 또 왜 쓰는가? 어쨌든 나란 인간은 여독 풀 듯이 주기적으로 글로 생각을 덜어내야 하는 인간인 건 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굳이 나 혼자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에게 글을 보여줘야 하는 아주 피곤한 응석받이 성향을 지니고 있어 어쩔 수 없다. 내가 내 생각에 잠식당하기 전에 한동안 갈망하면서도 외면했던 글을 써 보려 한다.
1.
중학생 때부터 우리 엄마가 다른 엄마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모가 엄마를 자주 험담했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엄마를 안 좋게 말하는 이에게 반발심을 느끼게 마련일 텐데, 나는 사실 그 말들이 반가웠다. 그전까지 나는 나의 상황이 동정받을 상황인지도 몰랐고, 그저 내가 못난 인간이라서 외롭고 힘든 건 줄 알았다. 나의 동정심이 향한 곳은 혼자 그 많은 딸을 키워야 했던 엄마였다. 엄마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귀 기울이지 않았고, 어떤 부탁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엄마와 외출이란 걸 너무 해보고 싶어서 일부러 아픈 척 병원에 가자고 하기도 했다(물론 거절당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엄마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혼자 딸 다섯을 키우는 불쌍한 사람이니까, 언니들도 공평하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으니까 이런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고모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엄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고, 매일 든든한 식사를 차려주고, 자식의 고민에 동참하는 그런 존재였다. 고모는 나를 좋아했다. 그 시절 나는 ‘어른스러운 아이’라는 포지션에 몹시 심취했던 상태라서 대부분의 어른이 나를 좋아했다. 나는 엄마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착하고 얌전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한 보상으로 받아낸 다른 어른들의 호의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고모의 애정이 특히 기꺼웠다. 우리 아빠의 동생이므로 친척으로서 연결되기도 했고, 우리 집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고모는 내가 얼마나 척박한 환경에서 올바름을 지켜내려고 애썼는지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결정적으로 고모는 타지에 살았다. 거친 사투리로만 가득한 이 집안에서 고모는 유일하게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내 눈에는 그런 고모가 이 남루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품위를 간직한 어른처럼 보였다. 그러던 중 겨울방학의 고모네 집에서 몇 주 머물 기회가 주어졌다. 엄마의 일방적인 부탁이었지만, 고모는 흔쾌히 우리를 받아주었다.
고모네 집에서 보낸 2주는 내 인생에 가장 꿈 같은 시간이었다. 고모는 물론이고, 고모부와 사촌 언니까지 그렇게 상냥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적이기까지 했다. 언젠가 고모네 가족들과 함께 뉴스를 보는데 고모부가 당신이 아는 지식을 내게 알려주었다. 학교 밖에서 가르침을 받아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신이 난 나는 뉴스를 더 지켜보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물었다. 그러자 사촌 언니가 친절하고 자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원래의 집에서라면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면박이 이어질 질문이었다.
고모는 내가 똑똑하다고 했다. 단순히 시험 성적의 문제가 아니라 또래보다 특히 지혜롭고 현명하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반신반의했지만, 고모네 가족과 함께 있으면 내가 정말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 맞는 것 같았다. 2주의 시간이 지나가고 원래 집에 돌아갈 날이 다가왔다. 떠나기 전날, 사촌 언니가 나를 따로 불러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그 집에 머무는 동안 나는 허락받고 사촌 언니의 책을 읽었었는데, 책을 좋아하는 사촌 동생의 모습이 꽤 흐뭇했나 보다. 언니는 이 책은 읽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정말 아끼는 책인데 네가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책을 선물했다. 그 책은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 두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고통과 연대를 다룬 장편소설이었다.
본집으로 돌아온 나는 성실하게 약속을 지켰다. 밥 한 알 한 알 꼭꼭 씹어 먹듯이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열심히 그 두꺼운 분량의 책을 다 읽었다. 말한 대로 정말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혼란스러운 정세를 파악하는 것도, 긴 분량을 모두 소화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결정적으로 두 여성의 고통을 함께하는 게 너무 괴로웠다. 2010년대의 휴전국에서 사는 평범한 10대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거대한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그 고통의 여정에 동참했고, 두 여성의 연대가 빛을 발할 때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때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성인이 되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만만치 않은 책을 선물했다는 것은 고작 중학생이었던 친척 동생을 마냥 아이로만 보지 않고 지적인 주체로서 존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책은 여전히 본가에 자리 잡고 있다. 누군가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물건을 묻는다면 나는 단연 그 책을 꼽을 것이다.
2.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건 ‘낙차’다. 어렸을 때 나는 행복해 본 적이 없어서 내가 겪은 게 상처인 줄도 몰랐다. 그러다 고모네 가족을 통해 이상적인 안온한 가정을 경험했고, 잠깐의 체험 이후 돌아온 집은 어느 때보다 살얼음판 같았다. 혼자 딸 다섯 명을 키웠던 엄마가 얼마나 나약한 사람인지, 긴 시간 동안 홀로 누군가의 엄마로만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지, 이제 그 희생에 당신이 얼마나 질렸는지가 어떤 계기로 인해 한 번에 터진 것이다. 엄마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짐이라는 사실을 매일 엄마와 언니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확인했다.
엄마가 우리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집안 전체를 지배했다. 언니 중 한 명이 내게 너는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언니는 어쩜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을 수 있냐며 힐난하고 자리를 떠났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언니와 함께 엄마를 질책해야 했지만, 막상 그러자니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딸 다섯을 낳은 그녀가, 남편과 사별한 후 혼자 긴 시간을 살아온 그녀가 갑자기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라 말하기 복잡하지만 실은 단순했던 그 ‘계기’는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졌다.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지만 어쨌든 우리 가족은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다. 그저 엄마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 가족이 얼마나 서로를 모르는지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나의 마음은 답 없는 방랑을 시작했다. 혼란의 그 시기에 엄마와 언니들은 집을 자주 비웠다. 함께 있으면 싸우기만 하고, 싸우지 않더라도 부정적인 기운만 가득한 이 집에 머물고 싶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난 갈 데가 없었다는 점이다. 친구네 집에 가고 싶지도 않았고(그럴 친구도 많지 않았다), 시골 마을이라 혼자 시간을 보낼 공간도 없었다. 엄마는 저녁이 되면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탁자에 두고 자취를 감췄다. 배달 음식이라도 시켜 먹으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지폐가 왠지 모르게 모욕적이었다. 비슷한 처지였던 동생과 셋째 언니와 함께 침묵의 식사를 끝내면 어린 동생은 엄마 없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무섭다며 울었다. 나는 그 울음이 너무 싫었다. 언니로서 달래줘야 했는데 그저 베개로 귀를 틀어막기만 했다.
평소처럼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던 어느 날 마루에 멍하니 앉아 유리로 된 현관문 너머 텅 빈 마당을 바라보았다. 눈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마당을 보고 있자니 마룻바닥이 갑자기 끈적하게 느껴졌다. 어떤 접착제가 있어서 다리가 바닥에 붙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 나는 아주 강렬하게 이 집에 버려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한심하고 친구도 별로 없고 초라한 인간이라서 이 불쾌한 집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모네 집에서 호기심 많고 똑똑했던 나는 여기에 없었다. 그때부터 내 삶의 목표는 이 집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었다.
3.
사실 1번 글을 쓰고 부랴부랴 예매한 영화를 보러 가느라 2주 동안 이 글을 방치했다. 오랜만에 내가 썼던 글(1번 글)을 다시 보니 기분이 아주 묘했다. 그 2주 사이에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 생겼고, 그 경험 덕에 가족에 관한 생각이 아주 조금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난주 혈육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잠깐, 그게 벌써 지난주라고?) 정신없을 결혼 당사자와는 별 대화를 주고받지 못했고, 둘째 언니와 둘이서 생각보다 아주 깊은 대화를 나눴다. 처음부터 어두운 가정사에 대해 얘기할 생각은 없었는데, 언니의 고민을 들어주다 보니 결국 또 근원은 (언니의 표현대로) 우리의 ‘콩가루 집안’에 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1번 글을 쓴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정서적으로 학대받았다는 인식이 아주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런데 언니 입에서 듣는 우리 가족 얘기는 또 새로웠다. 언니는 내가 모르는 충격적인 에피소드를 전해주며 그때 그 기억이 아직도 너무 생생하다고 말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엄마가 상상 그 이상으로 가엽게 느껴지는 일화였다. 언니는 그때 어린 마음에 뭘 모르고 한 행동이 엄마를 힘들게 했고, 그 죄책감 때문에 엄마에게 잘해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언니는 아주 중요한 말을 남겼다. 우리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해자였다고. 나 역시 언니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남겼는데, 언니가 나중에 그 말을 전했을 때 내가 그 말을 했다는 기억이 전혀 없어서 몹시 당황스러웠다.
물론 부모가 남긴 상처와 아이가 남긴 상처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나는 너무 일찍 엄마의 사정을 이해하느라 나의 상처를 등한시했고, 그 때문에 어린 날의 상처가 뒤늦게 파도처럼 밀려와 한참을 그 파도에서 허우적댔다. 아이는 어른을 이해할 의무가 없다. 어른의 나약함이 아이에게 상처 준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집안에서 나만 절대적인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언니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언니들과 우리 가족의 어두운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좋다. 나만 상처받고, 외롭고, 불안하고, 비참했던 게 아니라고 확인받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새벽이 되도록 깊은 대화를 나누며 마음이 점점 차분해졌다. 왠지 어두운 과거에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간 기분이었다.
결혼식 중 엄마는 수시로 눈물을 훔쳤다. 엄마는 원래부터 눈물이 많았다. 다른 언니의 결혼식에서도 울었고, 내가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남긴 영상 편지를 보고도 울었다. 한복 고름으로 눈물을 닦는 그녀를 보며 나의 엄마는 저렇게 여린 사람인데 그동안 내가 받은 상처는 다 무엇이었을까 생각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이번에도 결혼 당사자가 아닌 언니와 단둘이서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그 사이에 엄마는 또 무책임한 행동으로 언니에게 답답함과 허무함을 안겨주었다. 내가 앞서 엄마의 눈물을 보며 떠올렸던 생각을 공유하자 언니도 그에 동의했다.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너무 날것 그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상처받게 된다고, 우리는 그게 익숙하지만 낯선 사람한테 오해를 살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나는 엄마가 차라리 나쁜 사람이기를 바랐다. 나의 상처를 감싸려다가도 항상 발목을 붙잡는 건 엄마에 대한 동정심이었다. 내게 엄마는 불쌍해서 더 잔인한 사람이었다. 이제 더는 확실한 원망의 대상을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받은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엄마를 악인으로 만들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엄마를 동정하기 위해 내가 받은 상처를 외면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엄마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다. 아직 내게는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그녀가 나를 사랑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아주 조금 남아있었다. 오랫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엄마를 향한 애정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그건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에 불과했다. 그래서 부모란 존재가 무서운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자식을 냉대해도 쉽게 미움받을 수 없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
내가 살면서 맺은 모든 관계 중 가장 나의 고민에 무관심한 사람이 엄마인데, 단 한순간도 나를 궁금해 하지 않았던 사람인데 아직도 나는 그 옛날 단 한 번의 위로를 기억하고 있다. 밤새 혼자 한 숙제를 망친 게 너무 서러워 자는 엄마 옆에 누워 엉엉 울었던 그때를, 잠결에 엄마가 괜찮다며 온몸을 토닥여줬던 그때를, 그 토닥임에 마법처럼 망친 숙제가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고 마음이 놓였던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나에게도 집에서 위로받은 순간이 있었다.
나의 어둠과 밝음이 점점 한데 뒤섞이고 있다. 우리 가족이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처음 인식한 중학생 때 이후 밑도 끝도 없는 자기연민과 나 정도는 괜찮은 편인데 뭐가 그리 엄살이냐는 자기검열이 내 안에서 엎치락뒤치락 싸웠다. 불행과 행복, 둘 중 하나로 내 인생을 정의하려 하다 보니 그런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나는 그냥 열심히 살았다. 살다 보니 힘든 때도 있었고, 행복한 때도 있었다. 앞으로도 나는 힘들기도 하고 행복해 하기도 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4.
어제 만난 친구가 내게 왜 그렇게까지 꼭 글을 써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글을 쓰면 한 줌에 불과한 줄 알았던 생각이 확장되기도 하고, 거대한 폭풍인 줄 알았던 생각이 간단하게 정리되기도 한다. 이 글을 쓰고 나니 확실히 알 것 같다. 내가 이해하고 싶은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그동안 내가 써온 모든 글이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는 결핍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이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정리하고 공개하는 것은 내면이 어느 정도 여유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왠지 나는 요즘 내가 그런 여유로운 어른에 한 발자국 가까워진 것만 같다. 금세 착각이라는 게 밝혀지겠지만 일단 지금은 그렇다.
글을 읽는 행위란 무엇일까?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은 단연 레슬리 제이미슨의 산문집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다. 그 책의 북토크에서 아주 통찰력 있는 말을 들었다. ‘좋은 에세이란 독자로 하여금 쓰고 싶게 만든다.’ 그렇다. 나는 레슬리 제이미슨의 솔직함에 힘입어 이 글을 완성하게 되었다. 책이라는 매개체 덕분에 서울에 사는 내가 미국에 사는 그녀를 알게 되었고,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진심으로 공감하고 나의 지난 삶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나에게 읽는 행위란 타인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를 통해 나의 세계를 돌아보는 행위다.
그렇다면 이 글도 다른 독자에게 그럴 수 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글을 쓰고 싶으면서도 쓰기 두려웠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내 글이 ‘배설’로 느껴질까 봐였다. 에세이는 대체 어디까지 솔직해도 되는 걸까? 독자는 나의 솔직함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만약 엄마가 나의 글을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 적당히 숨기면 모두가 편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바닥까지 드러내고 싶은 나는 이기적인 사람인 걸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있는데 이렇게 독자들을 배려하지 않는 내가 과연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아도 될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터무니없이 부족한 글이지만 아주 혹시… 한 명쯤은 내 글을 읽고 자신도 쓰고 싶어지지 않을까?
몇 년 전에는 글 쓰는 게 마냥 재밌었고, 글감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 재밌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가 과연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면서도 웃긴 건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할지언정 글을 안 쓰겠다는 선택지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쓰다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요즘 나는 철학 공부에 심취해있다. 객관적인 답이 없는 질문에 평생을 바쳐 고민하는 철학자들이 마치 나와 같아서 지친 하루하루에 큰 위로가 된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만 왠지 나는 평생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쓸 것 같다. 절대 해결될 수 없는 고민과 싸우며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려고 발악하듯이 글을 쓸 것 같다. 언제쯤 고민이 종결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평생 제자리에서 허우적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나아가고 있다고 나 자신을 다독이면서 그렇게 글을 쓰고 인생을 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