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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금미 Oct 29. 2023

죽고 싶지만 글은 쓰고 싶어

자살이 주된 소재로 쓰이는 글입니다. 관련 소재에 민감하신 분들은 읽기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자주 죽고 싶다. 이렇게 말을 꺼내면 내 주변 사람 모두 크게 놀라거나 안타까워하며 나를 달래주는데 정작 충격적인 고백의 당사자인 나는 그럴 때마다 떨떠름하기만 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은 주로 혼자 삼키는 편이다. 내가 죽고 싶은 이유는 절망적인 상황에 맞닥뜨려서도,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려서도 아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처럼, 나는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감정이 들면 죽고 싶다는 말을 속으로 뇌까린다. 어제도 나는 아르바이트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에 가는 길에 계속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나는 내일도, 모레도 시답지 않은 이유로 죽음을 떠올릴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굉장히 염세적인 사람처럼 보이겠는데 맞다. 한때 내가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라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코로나와 함께 닥쳐온 우울의 파도에 휩쓸리면서 나란 사람의 근원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어둡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상치 못한 변수로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당장 내일도 안전할 수 없다는 불안이 기폭제가 되어 가슴속 묻고 있던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내 안의 어둠을 발견하고 나는 허무주의적인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왜 살아야 하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보다 더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는 나를 괴롭히는 결핍이 오히려 삶의 원동력이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의 성공 신화를 내 삶에 적용하며 역경을 이겨내고 보란 듯이 멋지게 살아갈 미래의 나를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나를 지탱했던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성공한다'라는 진리가 사실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실 나에게는 노력하는 재능마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나 자신을 의심할 때 나는 나의 지난 삶이 모두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더 나은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나는 왜 이 고통을 견뎌야 하지? 불안해하며 사느니  평온하게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나의 정신 상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어떻게든 괜찮아지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우울의 늪에서 허우적댈 뿐이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아름다운 노을빛을 받으며 한강 다리를 걸었다. 그때 나는 이 모든 완벽한 조건에도 나아지지 않는 내 기분이 절망스러웠다. 느닷없이 침묵에 잠긴 내게 친구들은 배려하는 마음으로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그 사이 나는 우울의 바다에 침잠하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질투했다. 그리고 한강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있는 모두가 이해하지 못할, 나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속이 뒤틀린 나를 저 물만은 받아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다리 쪽으로 다가갔다가 내 앞을 걷는 친구들의 모습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정말 강에 뛰어들기라도 한다면 친구들은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릴 게 뻔했다. 아무 잘못 없는 친구들을 내가 죽고 싶은 순간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정말 간신히 버텼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언제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를까 무서워 드넓은 강을 외면하고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가까스로 한강에서 벗어나 친구의 집에서 회포를 풀다가 친구가 홀로 절망과 사투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얘기를 듣던 나는 뒤늦게 용기가 생겨 내가 왜 그때 그 다리에서 침묵했는지, 침묵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털어놓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틀렸음을 확인했다. 뒤틀린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여기 있었다. 


다행히 그 뒤로 내가 다시 그만큼 강력한 자살충동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한강 일화는 내 주변 사람은 물론 내게도 제법 충격적이어서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안한 주변 상황도 많이 안정되어 내 정신 상태는 겨우겨우 정상 궤도에 올랐다. 


그러나 삶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또 사소한 변수 하나 때문에 거대한 불안에 시달렸다. 그때 구세주처럼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었다. 카뮈가 구원에 호소하지 않고도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쓴 그 책에서 나는 삶은 그 자체로 혼돈일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리고 이 어지러운 혼돈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나를 대견히 여기기로 했다. 살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삶을 이어가는 의지 자체가 그 이유였다. 


이렇게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번에야말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여전히 나는 죽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죽음을 안식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끔 TV를 통해 구제불능의 인간상을 마주하거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인물을 볼 때면 진심으로 '그냥 다 죽어버리면 안 될까'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 앞에는 큰 차도가 있었는데 횡단보도 간의 거리가 꽤 멀어서 대부분 무단횡단을 하곤 했다(하도 무단횡단을 많이 해서 지금은 그 차도에 바리케이드가 쳐져있다). 지금보다 훨씬 부정적이었던 초등학생의 나는 달리는 차들을 향해 돌진해 치이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인생은 받아들임의 연속이다. 삶은 그 자체로 혼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처럼 내가 어쩔 수 없이 죽음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삶과 죽음에 관해 얘기를 나누던 한 온라인 모임에서 삶이 축복이냐, 저주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나는 머리는 삶이 축복이라고 하지만 본능은 삶을 저주라 여긴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내뱉은 그 말에 큰 해방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삶을 긍정할 만큼 밝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염세적인 사람일 수는 있다. 


종종 살고 싶고 싶다고 생각한다. 평온한 죽음과 불안한 내일 중에 후자의 가치를 긍정하고, 살아가는 일에 굳이 의문을 갖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내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은 감당하기 벅찬 의무처럼 느껴지고, 행복을 느끼며 잘 살아가다가도 작은 위기에 곧바로 삶의 의욕을 상실하는 그런 인간이다. 결국 나는 수시로 찾아오는 자살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 뿌리치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자살을 너무 터부시 하는 사회 분위기가 절망에 빠진 개인을 고립시켜 더욱 자살에 이르도록 만든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질병을 파악하는 것처럼 삶이 저주처럼 느껴질 때면 죽음을 떠올리며 내가 정말 이 삶을 포기하고 싶은지 반추한다. 그렇게 나는 살기 위해 죽음을 생각한다. 


최근 참을 수 없이 지겨운 나를 글로 쓰면서 해소한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알쓸인잡에서 일기에 관해 얘기를 나눴던 게 떠오르면서 새로운 견해를 갖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더는 살고 싶고 싶을 필요가 없이 이미 살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떠올린 방송 내용은 이렇다. 남극 탐험을 떠난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과 대원들이 숱한 고난 끝에 634일 만에 남극에서 무사귀환한 기적 같은 실화였다. 섀클턴이 극한의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가 매일 쓴 일기였다.


패널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일기가 생존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모든 말이 주옥같았지만 나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건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며, 희망 없인 일기를 쓰지 않는다는 이호 박사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지금 이 글이 그렇듯이 나는 대체로 우울한 내용의 에세이를 쓰는 편이다. 글은 어둡지만 글을 다 쓰고 난 뒤의 기분은 개운하다. 내 글에 담긴 나는 어둡고 우울하고 죽고 싶지만,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는 그런 나를 마주하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이미 2년 전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절망에 빠졌을 때 왜 사느냐는 물음에 ‘그냥’, ‘태어났으니까’, ‘죽기는 싫으니까’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내가 의미에 집착하는 건 의미를 못 느끼면 쉽게 절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탐색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순전히 살고 싶다는 본능 때문이다. 수시로 떠오르는 생각을 그냥 흘러 넘기지 못하고 굳이 글로 기록하는 것도 사라지기 싫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 리뷰에서 발췌


내가 염세적인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였다고 해서 희망적인 부분까지 지워낼 필요는 없다. 나는 죽고 싶지만 살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죽고 싶은 마음을 글로 쓰는 사람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나는 또 별것도 아닌 일에 죽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럴 때 이 글이 나를 죽음으로 도망치지 말고 혼돈스러운 세상을 살아내자고 붙잡아주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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