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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금미 Feb 07. 2024

배운다는 건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

몇 년 전 취준에 지쳐서 제대로 지원도 하기 전에 아르바이트로 도피하던 중 내실을 다지고 싶다는 생각에 비평 수업을 들었다. 꽤 어려운 내용이라 열심히 필기하며 간신히 따라갔는데,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짜릿한 쾌감이 밀려왔다. 초중고대까지 장장 16년을 학생으로 살았는데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고 나서야 처음 깨달은 것이다. 내가 공부를 좋아한다는 걸.

그때의 어렴풋한 감각은 2021년 여름, 시시포스 신화를 읽고 카뮈의 부조리 사상에 크게 구원받으면서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 이후 막연하게 대학원을 맘속에 품으며 나름 열심히 철학지식을 모으고 모았다.

나에 대해서 끝없이 의심하는 인간이라 사람들에게 철학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내가 ‘철학을 좋아하는 나’에 심취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근데 이건 철학뿐만 아니라 뭘 좋아하든 꼭 이 의심의 과정을 거친다. 대부분 쓸모없는 생각이다.) 점점 더 많은 철학자를 알고, 다양한 대상에 대해 분석할수록 그 의심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철학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철학에 구원받은 사람이었다.

나는 사랑받는 게 어렵다. 기본적으로 타인은 날 싫어할 거라고 가정하고, 어렵게 마음을 열어도 자꾸 사소한 이유로 내가 싫어졌을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이를 만나도 자꾸 그 마음을 과소평가한다. 상대가 날 좋아할 만한 합리적인 근거를 분석하고 거기에 날 맞추려고 한다.

사랑하는 것도 어렵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곧바로 그 마음이 미안해진다. 나의 좋아하는 마음이 그 사람에겐 곧 부담일 거라고 단정짓고 마음을 표현하긴커녕 아무도 모르는 새 마음의 싹을 잘라버린다. 나라는 인간은 이렇게 아직도 방어기제가 선명하고, 상처받기 싫다는 두려움 때문에 남에게 상처줄 만큼 미성숙하다.

백날천날 이렇게 분석만 하면 뭐하냐. 실천을 해야지. 전보단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역시나 사랑이 어려운 채로 살아가던 중 현대철학 스터디 모임에서 뭉클한 말을 들었다. 실존에 대해 얘기 나눈다는 건 서로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지금 이 순간 철학 공부를 하는 우리들은 모두 사랑받고 있다고.

주로 중장년층으로 이뤄진 그 모임에서 한 분이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나를 참으로 바람직한 젊은이라며 대견해하셨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 귀중한 공부를 하는 건 축복받은 일이라고 하셨다.

몇 주 전부터 죽은 철학자들이 나를 살게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날 모임 이후로 새로운 생각이 더해졌다. 나는 죽은 철학자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왜 사냐고,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냐고 수시로 묻는 이 염세주의자를 죽은 철학자들은 쓸데없는 생각한다며 면박주지 않는다. 나보다 더 치열하게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어떻게든 저 답없는 질문에 그럴싸한 답변을 제시한다.

실존을 공부하고 나면 철학자들에게서 이러한 목소리를 듣는다. 너를 괴롭히는 고민을 나도 똑같이 했다고. 억지로 생각을 지울 필요도 없고, 부정적인 생각에 짓눌릴 필요도 없다고. 너보다 더 생각 많은 우리와 함께 답도 없는 질문을 던져대며 어떻게든 살아보라고, 죽음으로 도망치지 말고 같이 여기서 공부하자고. 그들은 그렇게 매일 나를 붙잡는다.

나도 내가 왜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지 모르겠다. 딱히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지도 않고, 곁에 좋은 사람도 많고, 나도 내가 싫지 않은데 그냥 본능적으로 삶이 허무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살같다. 나보다 더 힘든 일을 겪는 사람들도 어떻게든 살아내는데 별로 힘들지도 않은 내가 왜 이렇게 염세적인지 모르겠다.

철학은 이런 나를 공감해준다. 하이데거는 내가 본래적 자아라서 삶에 권태를 느낀다고 했고, 사르트르는 인간은 목적 없이 태어났고, 그 목적을 고민하며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만든다고 말했다. 카뮈는 부조리한 삶에서 느끼는 괴로움이 그 사람의 위엄을 완성한다고 했고, 레비나스는 산다는 것은 존재자가 존재를 떠맡는 버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철학 덕분에 나는 엄살쟁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린시절 내내 나의 고민에 귀 기울여주는 어른을 갈망했는데, 수많은 책 속에 잠든 철학자들이 내게 그 어른이었다. 나는 그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같이 실존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철학을 뜻하는 philosophy는 그리스어 philosophia에서 유래됐는데, 이 단어는 ‘사랑하다’라는 뜻의 philo와 ‘지혜’를 뜻하는 sophia가 더해져 완성되었다. 즉,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평소에 별생각 없었던 철학의 어원이 새삼스럽게 감동적이었다. 나란 인간은 사랑이 부족한 줄 알았는데, 나는 이미 철학으로써 이 끔찍한 삶과 세상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고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느낀 사랑받고 있다는 감각에 함부로 과소평가했던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다시금 미안해졌다.(사실 평소에도 주기적으로 반성하는 부분이다.) 사랑은 멀리 있지 않다는 깨달음을 잊지 않기

위해 이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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