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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Dec 11. 2017

은퇴 통장이 필요해

엄마 은퇴 일기

그녀는 두 딸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즈음에 금슬 좋았던 남편을 잃었다. 늘 과로에 시달리던 남편이 갑자기 간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지 한 해도 되지 않아서다. 그 젊은 나이에 창졸지간의 청천벽력을 어찌 견뎠을까. 직장에 그대로 매어 있다가는 혼자 애들 키우기가 어렵겠다고 판단한 그녀는 과감하게 시장통에 미장원을 차렸다. 뷰티산업 대기업에 다니면서 마음껏 배우고 가르쳤던 자신의 경력을 좀 더 생계형 모드로 바꿔야 할 필요가 생겼던 것이다.


딸아이 학부모 모임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었다. 엄마들이 한 곳에 모여 지지고 볶는 이야기를 한참 돌아가며 하던 판이었다. 반장 엄마였던 그녀가 자주 참석 못해 미안하다면서 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 여태  수선스러웠던 우리들 모습이 민망스러워 말문이 다 탁 막혔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 종종 머리를 자를 일이 생기면 그녀의 미장원에 들러 한 바가지 수다를 떨다 헤어지는 사이가 됐다. 내내 드라마가 돌아가는 TV와 인스턴트커피가 전부인 듯한 동네의 작은 미장원에 갇혀서도 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틔여 있고 지혜로워서 감탄스러웠던 여인이다.


살던 동네에서 멀리 이사를 나온 후로는 미장원 발걸음도 뜸해지고 아이들도 제각각의 길을 가느라 서로 소식 전할 일이 없었는데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이제 드디어 미장원 접었다고. 모처럼 얼굴이나 볼 겸 드라이브나 하러 나가잔다. 그래서 우리 둘이는 난생처음 사각형의 미장원이 아닌, 자유로 하이웨이를 내달려 임진각까지 가는 데이트를 감행했다. 그 사이에 밀린 이야기가 많았다.



그녀의  딸이 대학 졸업하고 취직을 하니 어느 정도 경제적 중압감이 줄어들더란다.  가만 생각해보니 아이들 결혼 전에 자기와 오롯이 보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와중에    버는  그렇게 급선무일까 싶어서 고민 끝에 가게를 접었더란다. 접자마자 아이들과 부산 여행을 갔단다. 그러고 나서도 6개월간 앉아있을 새가 없이 여행을 다녔단다.  사이에 혼자서 얼마나 하고픈 일이 많았으랴.  폭발력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였다.


이제부터 아이들 결혼시킬 때까지 좀 더 세상 구경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실컷 여행도 다니며 새로 아이디어를 모을 예정이란다. 이제야말로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아볼 차례가 된 것 같다고. 나는 그녀의 행보에 더할 수 없이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구절이 얼마나 어울리는 그녀던가. 그러면서 그녀가 덧붙였던 조언 하나가 아직도 귓가를 맴돌고 있다. 은퇴 통장 이야기다.




"만사를 꼼꼼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 시점에 와보니 하나 놓친 게 있습디다. 어차피 평생 한 가지 일만 하며 살 수도 없는데 시기에 따라 사는 모드를 바꾸려면 충분한 재충전과 탐색이 필요하잖아요. 휴직 시간 동안 어찌어찌 벌이 없이 살아갈 방도는 미리 생각해놓았는데 겪어보니 그게 다가 아니에요.


이때 얻은 시간을 잘 활용하려면 생계비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투자비가 따로 필요하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사람이 벌다가, 안 버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으로 압박이 생기는데 준비 없이 생각지도 못한 비용을 자기를 위해 과감하게 투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어요. 시간은 되는데 갑자기 돈이 막히는 거라.


그래서 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무조건 말해줘요. 은퇴 통장을 따로 하나 만들어두라고. 그 은퇴 통장으로 사는 일에 바빠서 여태껏 못해봤던 거, 하고 싶었지만 차마 저지를 수 없었던 것들을 충분히 하면서 자신을 위로하는 데 쓰라고. 그래야 그다음 행보가 제대로 보인다고요. 하하하."




  앞을 몰라 살아가는 일에 허덕대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한가한 소리도 하고 있다고 욕먹을까 싶어 나조차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밖으로 떠들기 어려웠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다. 만약 나에게 옛날부터 은퇴 통장이라는  따로 존재했더라면 힘들 때마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발에 오줌 누는 것처럼 찔끔찔끔 지름신을 영접하는 허당 소비를 훨씬  줄이게 되지 않았을까 싶은 거다. 모르긴 몰라도     비밀리에 모으면서 짜릿짜릿했겠지. 은퇴를 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나만의 재충전과 연구 비자금이  필요하겠구나 싶다.


은퇴 통장, 그거 좋은 아이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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