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경제 폭망'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0일 동안 생활하다가 '엘 칼라파테'라는 작은 시골 동네로 이동했다. 이곳을 찾아온 목적은 단 하나였다. 세계테마기행에서나 볼 수 있던 파타고니아의 빙산이다. 불행하게도 나의 여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엉망이 된 아르헨티나의 환율이 문제였다. 공식 환율은 1달러에 350페소지만 암시장에서는 1달러에 900페소를 환전할 수 있는 아르헨티나는 미국 달러가 왕대접 받는 나라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비싼 환율로 결제가 되기 때문에 미국 달러를
아르헨티나 페소로 환전해서 소비하는 것이 경제적 이익이었다. 한마디로 달러 현찰이 부족한 나의 지갑에게는 치명적인 금융고문이었다.그나마 숙소는 미리 예약을 해서 빙산투어와 식비 그리고 칠레로 향하는 버스비만 해결하면 '엘 칼라파테' 여행은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칠레로 넘어가면 언제든지 현금을 다시 구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항상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여행이다.
힘들게 찾아온 '엘 칼라파테'의 숙소에 문제가 있었다. 복도 창문이 닫히지 않아서 누구든지 마음먹으면 창문을 넘어 방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 그러려니 하고 투숙할 수 있는 문제지만 이곳이 남미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게 여행자의 현실. 치안에 대해 더욱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브라질에서 소매치기와 강도 그리고 사기꾼까지 만난 경험도 크지만 무엇보다 니카라과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들의 소식 때문이었다. 최근, 스위스 출신의 페트릭은 호스텔에서 가방을 통째로 분실했다. 영국 출신의 숀은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일주일 뒤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간다고 그저께 연락이 왔다. 누구도 그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 당연히 나쁜 행동을 한 사람들이 문제지만 이곳에서는 분실당한 사람이 바보가 되는 그런 세상이다. 그들의 소식은 당연히 치안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인장은 방을 교체해주지 않았다. 안전하다고 그냥 투숙하면 된다고 짜증을 냈다. 어쩔 수 없이 예약 취소를 요청하고 그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밤 10시 40분 무렵이었다. '엘 칼라파테'는 하루에 4계절을 느낄 수 있는 신기한 마을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밤이 되면 최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때마침, 미리 예약했던 숙소의 관리자라는 사람에게 whatsaap(인터넷 전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전화가 왔다. 예약을 취소하기 전에 본인이 관리하는 다른 숙소를 소개해주겠다고 말했다. 짜증 나게도 그의 말을 믿고 찾아간 '칼라파테 호스텔'은 방이 없다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관리자에게 다시 연락을 하니, 방이 없는 줄 몰랐다고 답변했다. 이미 11시가 넘어서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져 갔다.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그의 말을 믿기로 하고 차디찬 길바닥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11시 30분. 배가 너무 고팠다. 마지막 식사가 오후 1시였으니 당연했다. 밥을 먹으며 그의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다른 남미 국가와 달리 대부분 9시에 저녁식사를 하는 아르헨티나의 문화 덕분에 영업을 하고 있는 식당을 찾는 일은 쉬웠다. 애초에 내가 배회하고 있던 장소가 '엘 칼라파테'의 다운타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보데곤'이라는 이름의 식당이었다. 언제든지 먹다가 연락이 오면 자리를 일어날 수 있도록 햄버거를 주문했다. 11시 45분. 따끈한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먹으며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 기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1시 53분 그에게서 방을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느긋하게 햄버거를 먹을 상황이 아니었다. 서둘러서 새로운 숙소를 찾아야 했다. 오늘 밤, 추운 날씨 속에서 동상 걸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불행하게도 쉽지 않았다. 아고다, 북킹스닷컴, 호텔스닷컴, 에어비엔비. 핸드폰에 있는 모든 숙박앱을 사용해서 찾아봤지만 당일이라 그런지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숙소들 뿐이었다. 애초에 내가 예약한 숙소는 1박에 6만 원이었지만 당장 예약할 수 있는 숙소들은 10만 원 이상이었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하루가 지나 새벽 12시 30분. 앱으로 숙소를 찾기를 포기하고 발품을 팔기로 결정했다. 다운타운에 있는 호스텔에 직접 다니며 가격을 물어봤다. 아니. 정확히는 도미토리 룸이라도 있는지 물어봤다. 싱글룸은 커녕 6인실 속 침대 하나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던지 다운타운을 벗어나 1시간 거리의 숙박 밀집지역으로 가야만 했다. 정말 그렇게까지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돌고 돌다 보니 다시 돌아온 곳은 햄버거를 먹었던 '보데곤'이었다. '보데곤' 옆에는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호스텔 간판이 눈에 보였다. 나에게 선택권이란 없었기 때문에 투숙 가능 여부를 물어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시간은 이미 새벽 1시가 지난 이후다.
"Do you have a room tonight?"(오늘 밤 방이 있나요?)"
가능한 최대한 착하고 불쌍한 목소리로 숙소 직원에게 물어봤다. 건방지게 말하면 기분 나빠서 방이 없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I have a room!"(방 있어)
다행스럽게 이곳은 방이 있었다! 심지어 4인실이 텅 비어서 나 혼자 사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가격도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겨우 6500페소. 한화로 1만 원도 안 했기 때문이다. 조금 아쉬운 점은 가격이 저렴해서 무조건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전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지출은 금융고문이 아닌 금융치료였다. 나는 따뜻한 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으니 말이다. 그제야 차디찬 길바닥만 보이던 시야는 반짝이는 별로 가득한 밤하늘로 향할 수 있었다.
오전 10시 57분. 눈을 뜨자마자 배낭 위에 놓인 핸드폰을 충전기와 분해한 뒤, 시간을 확인했다. 순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지난 새벽 콘센트가 헐렁해서 배낭 위에 패딩과 바람막이 등을 쌓아서 충전기를 콘센트에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남미 여행에서 스마트폰은 생존 그 자체였기 때문에 생존본능으로 잔머리를 써서 충전기를 고정시킨 스스로에게 감탄하는 미소였다. 이부자리를 정리한 뒤,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호스텔 밖으로 나와서 기지개를 켜자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바로 어젯밤 햄버거를 먹었던 '보데곤'의 사장님이었다.
"너 여기서 잔 거야?"
그는 호스텔 간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는 유심히 보지 않았던 'Hostsl' 간판에서는 'bodegon'이란 이름이 함께 있었다. 식당의 사장님이 소유한 호스텔이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우리는 어제 상황에 대한 수다를 떨었다. 창문이 닫히지 않는 숙소의 동영상을 보여드리자 손사래를 치며 이런 곳에서 어떻게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겠냐며 말도 안 된다고 맞장구까지 쳐주셨다. 사장님도 늦은 시간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식당에 찾아온 동양인에게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자신의 호스텔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했다. 점심 장사를 준비하러 간다는 그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며 자리를 떠났다.
가끔은 최악의 상황이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준다. 엘 칼라파테에서 머무는 동안 멋진 여행하길
6만 원짜리 숙소보다 1만 원도 안 하는 숙소에서 이렇게 편하게 시간을 보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호스텔의 직원과 함께 리버풀의 유로파 축구경기를 함께 시청할 줄도 몰랐다. 원래 예약한 숙소에서 찾을 수 없는 넓은 마당에서 오랜만에서 글을 쓰게 될 줄도 몰랐다. 그의 말이 옳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어제의 상황이 최고의 순간으로 다가온 오늘이니까 말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 파타고니아의 엘 칼라파체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하루로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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