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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Oct 11. 2019

휴양지를 싫어했던 내가 변해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곳

한창 20대일 때의 나는 세계여행을 꿈꿨다.

금전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여행일지라도 떠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평소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겁쟁이지만, 저렴한 숙소에서 묵다가 벌레가 나타나더라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위생이 좋지 않은 여행지를 가더라도 현지식을 도전할 용기가 있었다. 혹시 돈이 없어서 매 끼니를 빵으로 때우더라도 맛있을 것 같았다. 매일 너무 많이 걷다가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도, 나는 마냥 여행의 행복에 취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무척 젊었기에, 그리고 그 꿈에 대한 열정이 너무 컸기에 할 수 있는 생각들이었다.

결국 나는 현실에 부딪혀 세계여행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1년 내내 먹을 것, 입을 것, 하고 싶은 것들을 참아가며 돈을 모아 여행을 떠나곤 했다. 평소 '이 돈이면 차라리 여행을 가겠어!'라는 생각을 밥먹듯이 하며 소비하고 싶은 순간들을 정말 잘 참아냈다.

여행을 할 때면 평소와는 다르게 비교적 쿨한 소비를 했지만, 그것은 식도락이나 경험의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부분들에 국한되어있었다. 무엇보다 나의 피로를 풀기 위한 소비에 있어서는 매우 박했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준비할 때면 숙소 정도는 적당히 저렴한 곳이나 에어비앤비로 찾아갔고, 좋은 호텔은 가본 적이 없었다. 물론 조식을 따로 신청해본 적도 거의 없었다. 휴가를 내고 짧은 기간 동안 여행을 하다 보니 항상 바쁘게 돌아다녔고, 가만히 어디 앉아있거나 여유를 즐기는 일은 상당히 드물었다. 여행을 하다가 다리가 아파도 웬만하면 택시는 타지 않았다. 돈도 아낄 겸, 또 조금 더 걸으며 여행지를 느껴보겠다는 취지에서였다. 무릇 여행이란 무조건 많이 보고, 무언가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평소 참 우유부단한 나지만 여행에 있어서만은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난 휴양지는 안 갈래. 사서 고생하는 여행일지라도 좋아. 난 바쁘게 돌아다니는 여행을 할 거야. 휴양지는 나중에 나이 들고 힘들어질 때 가지 뭐. 아니, 어떻게 비싼 돈 주고 해외여행을 가서 가만히 앉아있어?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까울 것 같아."


아주 단호하게 이런 이야기를 했던 나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나는 직장인으로서의 연차가 조금씩 올라갔다. 쇼핑하러 가서 여전히 티셔츠 하나를 들고도 백 번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돈을 아껴 쓰는 습관은 어디 가진 않았다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씀씀이는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나도 이제 더 이상 학생이 아닌데. 점점 나이도 드는데. 열심히 벌고 열심히 모았는데. 삶의 질을 조금 높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고개를 들곤 했다. 자연히 여행 중에 너무 저렴한 숙소는 피하게 되었고 관리가 잘 되지 않은 숙소에서는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여행만 할 수 있다면 12인실 도미토리 3층 침대에 자도 행복해하던 몇 년 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 체력은 몇 년 사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여행 중 피로를 느끼는 시간도 많아졌고, 몇 시간을 걸어도 끄떡없던 나의 두 다리는 갑작스럽게 너무 약해져서 한 시간만 걸어도 후들거리게 되었다. 이젠 많이 돌아다니고 나면 한 번씩 쉬어가야만 하는 몸이 되어버렸다. 어쩜 이렇게 빠르게 쇠약해질 수 있는 건지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부분이다.

여행 중이라면 어떠한 환경에도 둔감해질 수 있다던 그때의 패기와 자신감이 조금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찌 보면 나이가 들어가며 생기는 당연한 현상이지 않을까? 결국 나는 편안한 휴양지를 조금씩 탐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그 과도기에 서있고, '휴양지는 돈 낭비'라는 색안경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시점에, 나는 베트남 다낭 여행에 왔다. 휴양 여행은 처음인 셈이다.

1박에 6만 원 돈을 내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고급 호텔에서 머물 수 있는 곳. 조식이 포함된 가격인데 심지어 뷔페인 곳. 밖에서 놀다가 더우면 호텔에 있는 루프탑 수영장으로 직행해서 더위를 한방에 날릴 수 있는 곳. 만원 돈이면 둘이서 메인 식사 두 개에 맥주까지 마실 수 있는 곳. 택시비가 너무 저렴해서 더위에 지칠 일이 많이 없는 곳. 휴양지는 낭비라던 나의 오만한 생각에 강력한 펀치를 날려준 곳이 바로 이 곳, 다낭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미케 비치 해변에서 오두막 그늘이 있는 썬베드에 누워 이 글을 쓰고 있다. 묵직한 코코넛에 꽂힌 빨대를 한껏 빨아들이니 갈증이 시원하게 해소되고,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얼굴을 감싼다. 아무것에도 쫓기지 않는 여행. 늦잠을 자도 되는 여행. 눈을 뜨자마자 씻지도 않은 채 조식 뷔페로 가서 주린 배를 채우는 여행. 아무런 계획 없이도 마음 편한 여행.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퇴사한 다음 날에도 수첩에다가 '오늘의 할 일'을 적어놓고 실천하던 나다. 그렇기에 오롯이 나의 휴식에 집중한 이번 여행의 만족도는 매우 높다.

퇴사 기념으로 떠나온 다낭 여행. 너르게 펼쳐진 이 바다처럼 나의 마음도 시원하게 탁 트이는 기분이다. 항상 무거웠던 내 머릿속도 오래간만에 여유를 찾고 가벼워지는 중이다. 여행 중 느낀 나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긴 글로 풀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도 참 행복하다.

나는 이제 이 썬베드에 누워 달콤한 낮잠을 조금 자고,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을 생각이다.


결국 나는, 양지가 좋아져 버렸다.




커버사진/ 다낭 미케비치 해변에서. 책읽는 여유
숙소 커텐을 열면 펼쳐지는 풍경
숙소 루프탑의 수영장



글이 다음 메인에 떴네요 :)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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