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타크루즈 다음 목적지는 또 다른 해변, 몬터레이라는 도시였다. 사실 이때부터 여행길이 순조롭지 않았다. 비가 오는 건지 해무가 진하게 낀 건지 앞이 뿌예지면서 차창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원래 목적지까지는 차로 1시간 거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차가 퇴근길 서울 급으로 밀렸다. 도착 시간은 계속 늘어났고, 부모님을 좋은 곳으로 모시려 이래저래 신경을 썼던 남편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당황한 듯 보였다.
밀리던 도로 양옆에는 거대한 논밭만 있어서 지루해지기 딱 좋은 광경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부모님은 농지 구경을 즐겼다. 우리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밭의 규모에 놀랐다. 저렇게 큰 땅에서 어떻게 작물을 심고 수확을 하는 건지. 밭 하나에 백 명이 달려들어서 한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사람 손으로 저걸 다 수확하다간 정말 사람 잡겠다.”라고 말하면서, 빙글빙글 돌며 밭에 부지런히 물을 뿌리고 있는 스프링클러를 구경했다.
분명히 딸기가 주렁주렁 열린 딸기밭을 지나왔는데, 조금 지나고 나니 갑자기 거대한 모래 언덕이 튀어나왔다. 산만큼 높은 언덕이었다. 갑자기 그 부분만 사막의 모습인 것도 신기하고, 바람이 이렇게 세게 부는데 모래가 흩날리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게다가 도로를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사막이 있는데 왼쪽 먼 곳으로는 주택이 빼곡한 마을이 한눈에 보여서 비현실적이었다. 정말, 이상하고 아름다운 북부 캘리포니아였다. 엄마는 창밖을 보며 “이렇게 사람 사는 곳 구석구석 구경도 다 해보고 좋다야~”하셨다. 차는 한참 밀렸지만 우린 낯선 광경도 보고 수다도 떨고 잠시 눈도 붙이면서 그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모두 제법 여행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몬터레이 중에서도 우린 Sea lion point라는 곳으로 향했다. 바다사자가 보고 싶다던 엄마의 말을 기억해 두었던 남편이 정한 목적지였다. Sea lion point는 ‘Point lobos state natural reserve’라는 해안 공원 안에 있었는데, 차를 탄 채로 공원 입장료를 낸 뒤 좁은 풀숲을 지나자 야생화, 깎아지른 절벽, 웅장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춥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댔고, 얼굴에는 초보습 미스트가 뿌려졌다. 이름을 모를 큰 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다녔고, 바다사자는커녕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바다가 흐리게 보였다. "우와… 역시 미국의 자연은 대단해." 감탄은 하고 있었지만, 사실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지금은 부모님을 모시고 온 여행이 아니더냐. 껴입은 옷을 뚫고 피부까지 와닿는 바닷바람과 경치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흐린 날씨에 엄마와 아빠가 조금 걱정되었다.
Point lobos state natural reserve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새들의 날갯짓만 보아도 신기해하셨고, 특히 식물을 좋아하시는 엄마는 몸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게 부는 바람 속에서도 열심히 야생화 사진을 찍으며 까르르 웃었다. 아까는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농지가 나오다가 갑자기 사막이 나오는 수준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냥 한자리에서도 양지 식물과 음지 식물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사막에서 살 법한 다육이 선인장과 마른풀들이 있었고, 그사이에 거짓말처럼 예쁜 노란 꽃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식물들이 바람의 방향에 따라 모로 누워있었다. 기이하면서도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도무지 그 마음을 알 길 없는 변덕스러운 날씨와 바다와 식물들을 온몸으로 느낀 뒤 우리는 급히 차에 탔다. 더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추웠다. 패딩을 입어야 맞겠다 싶을 정도로 너무너무 추웠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주립 공원 출구 쪽으로 향하던 길. 우리는 풀 뜯는 사슴을 발견했다. 잠시 차를 멈추고 사슴을 지켜보았다. 작고 예쁜 사슴이었다. 행운이 찾아와 준, 완벽한 마지막 일정이었다.